"내 몸이라는 가난한 집에는 서릿발이 안팎으로 치는데, 저 부자들은 내가 흘린 한숨과 눈물을 얼려 제 궁전을 짓고 있구나"라는 이슈마엘의 처절한 독백입니다.
자신의 육체적 고통(추위)을 우주적인 비극과 사회적 불평등으로 확장하는 이 서늘한 묘사야말로, 멜빌이 책의 초반부에 심어둔 가장 뜨거운 분노입니다.
모비 딕
D-29

kontentree
여섯모서리
이 대목은 단순히 '실내와 실외의 빈부격차'를 넘어 이슈마엘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얼어붙어 가는 처절한 상태를 직접 대입했죠.
1. 창문과 서릿발의 차이: 어디서 바라보느냐의 진짜 의미
이슈마엘은 혹독한 북동풍 '유로클리돈'을 설명하며 창문에 끼는 '서리(Frost)'의 위치로 인간의 상태를 극명하게 나눕니다.
바깥쪽에만 서리가 낀 유리창 (Frost all on the outside): 안에는 따뜻한 난로가 피워져 있고 바깥만 추울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 유리창 안쪽에 앉아 있는 부자(다이브스)에게 폭풍은 그저 창밖의 '감상용 풍경'일 뿐입니다.
안팎 모두에 서리가 낀, 창틀도 없는 창문 (Sashless window, frost on both sides): 유리조차 없고 창틀만 휑해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상태입니다. 안팎이 모두 혹한으로 얼어붙어 서리가 양면에 맺힙니다. 이 구멍 난 창을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유리공(Glazier)은 오직 '죽음(Death)의 사자'뿐입니다. 즉, 얼어 죽기 직전의 극한 상황을 뜻합니다.
2. "이 눈은 창문이고 이 내 몸뚱이는 집이다" (몸과 마음의 비유)
이슈마엘은 이 서릿발 내리는 창문을 남의 이야기로 두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그렇다, 이 눈은 창문이고 내 몸뚱이는 집이다. 그 틈새와 구멍들을 미리 막고 솜이라도 좀 틀어막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다. 하지만 이제 와서 수리하기엔 너무 늦었다."
틈새가 벌어진 몸뚱이: 이슈마엘은 지금 길거리의 가난한 나사로처럼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집)에 상처와 결핍, 방황이라는 '틈새와 구멍(chinks and crannies)'이 가득해 유로클리돈의 칼바람이 뼈마디까지 그대로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미 늦어버린 개량: 젊은 날 미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구멍들을 채워두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만, 이미 그의 온몸(집)은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이 춥고 낡은 몸뚱이의 눈(창문) 안팎에 서리가 내려앉아 시야가 흐려지고 있으며, 이 창을 완전히 닫아걸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뿐이라는 비장한 자각입니다.
3. 나사로의 좌초와 위선의 끝 (얼음 궁전의 황제)
이 처참한 '몸의 냉해'는 뒤이어 나오는 부자 '다이브스'와의 대비로 폭발합니다.
빙산이 열대 몰루카 제도에 정박하는 일: 따뜻한 인도네시아 바다에 거대한 빙산이 둥둥 떠 있는 것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은 나사로(빙산)가 따뜻한 부자의 집 문앞(댓돌)에 털썩 쓰러져 있는 모습은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인류의 비극이라는 뜻입니다.
얼음 궁전의 황제와 금주협회 회장: 그 부자는 '타인의 얼어붙은 한숨'으로 쌓아 올린 화려한 얼음 궁전에서 황제처럼 군림합니다. 게다가 겉으로는 도덕적인 척 '금주협회 회장' 완장을 차고 있지만, 그가 마시는 액체는 오직 '고아들의 미지근한 눈물'뿐입니다. 남들에게는 절제를 교훈 삼아 훈계하면서, 자신은 타인의 피눈물을 빨아먹으며 호화로움을 누리는 극단적인 위선을 드러낸다 생각해요.

서설
네이선 스웨인 (50년 전)
네이선 스웨인(Nathan Swain)은 낸터킷(Nantucket) 출신의 전설적인 작살잡이로, 단 한 번의 항해에서 고래 15마리를 잡았다는 인물. 낸터킷 포경업의 용맹함과 전통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언급.
술잔의 자오선 같은 선 / 혼 곶(Cape Horn)
술잔 표면에 가로로 나란히 새겨진 선들이 지구의 경선(자오선, meridian)처럼 보인다는 묘사. "잔을 가득 채우는 것"을 케이프 혼(Cape Horn, 혼 곶)에 비유한 건, 케이프 혼이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극한 지점—즉 '한계점, 끝까지 채운다'는 의미로 쓰인 항해 은유.
래브라도(Labrador)
래브라도는 캐나다 북동부의 극한 추위의 땅. 퀴퀘그의 모습이 "래브라도에서 탈출한 곰"처럼 묘사된 건—털투성이에 거칠고 야생적인 외모, 그리고 혹독한 환경 출신 같은 인상을 강조.
완강한 옹이에 대팻날이 걸린 것
"완강한(stubborn)"은 단순한 형용사가 아니라, 퀴퀘그라는 인물의 성격을 미리 암시. 나무의 옹이처럼 그는 쉽게 깎이거나 굴복하지 않는 존재라는 복선. 대팻날이 "걸렸다"는 것도—문명(서구의 도구)이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상징.
바람이 바람과 만나는 자리 옆의 작은 소용돌이
두 힘(바람)이 충돌하는 지점 옆에서 생기는 소용돌이—이스마엘과 퀴퀘그라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접점에서, 그 주변부에 생기는 혼돈과 작은 운명의 소용돌이를 암시. 큰 사건(만남) 옆에서 조용히 생겨나는 것들을 묘사하는 시적 표현.
눈보라 치는 헤클라 산(Mount Hecla)
헤클라는 아이슬란드의 활화산으로, 중세 유럽에서는 지옥의 입구. 눈보라 속의 헤클라 = 혹독함 + 지옥적 이미지. 퀴퀘그의 외모나 그 공간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섭고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극적으로 과장.
머리를 팔러 다니는 작살잡이의 정체
퀴퀘그입니다. 그가 팔고 다니는 "머리"는 실제로 마오리족 방식의 문신된 사람 머리(mokomokai)—건조·처리된 인간 두상 공예품으로, 당시 서구에서 수집품으로 거래. 퀴퀘그는 이것을 팔아 생계를 유지. 야만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상업 경제에 적응한 존재.
사냥꾼이 도요새를 다루는 품새
퀴퀘그가 그 머리(두상)를 다루는 모습이 마치 숙련된 사냥꾼이 잡은 새를 능숙하게 다루듯—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전혀 거리낌이 없는 태도를 묘사. 이것이 이스마엘에게는 공포스럽게 보이지만, 독자에게는 퀴퀘그의 자신감과 자기 세계의 완결성을 보여주는 장면.
"저 야만인"의 등장 의도 / 벽난로 안의 제(祭)
퀴퀘그를 "야만인"으로 부르며 등장시킨 멜빌의 의도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뒤집기 위함. 벽난로 안에서 그가 작은 우상(욥욥)에게 제를 올리는 장면—이것이 서구의 기독교 예배와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음. 결국 "야만"이란 이름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퀴퀘그는 가장 신실하고 인간적인 인물로 그려짐.
"내 평생 그렇게 달게 잔 건 처음이었다" — 식인종과 함께 자면서
이것이 소설 전체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 이스마엘은 "식인종"이라고 두려워했던 퀴퀘그와 한 침대에서 잔 뒤, 가장 편안하고 달콤한 잠. 편견과 공포가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몸으로 체험하는 장면. "식인종"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타자가 실은 가장 따뜻한 존재였다는 역설—멜빌은 이 한 장면으로 인종·문명에 대한 편견 전체를 조용히 해체합니다.

kontentree
물기둥 여인숙의 그림 (The Spouter-Inn Painting)
이 장면은 소설 전체의 축소판이자 서막입니다.
핵심 묘사
여인숙 입구에 걸린 그림은 오래되고 그을리고 칠이 벗겨져서 무엇을 그린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림입니다. 이스마엘은 한참을 들여다보며 추측합니다—
빙산의 충돌인가?
폭풍 속 바다인가?
사탄이 빙하를 여행하는 장면인가?
그러다 마침내 거대한 고래가 침몰하는 배 위로 몸을 날리는 장면임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그 고래는 삼지창(작살)을 등에 꽂고 있습니다.
핵심 메시지 3가지
① 해석의 불가능성과 집착 — 인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것 앞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이스마엘이 그림에 집착하는 모습은, 에이헤브가 흰 고래에게 집착하는 모습의 예고편입니다. 소설 전체가 "알 수 없는 것을 해독하려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② 그림 자체가 모비딕 — 그 그림은 어둡고, 경계가 불분명하고, 볼수록 다른 것이 보입니다. 흰 고래 모비딕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며, 그 실체는 끝내 파악되지 않습니다.
③ 운명의 예고 — 작살을 꽂은 채 배를 침몰시키는 고래의 그림이 여인숙 입구에 걸려 있다는 것—이 항해의 결말을 처음부터 독자에게 은밀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그걸 보고도 에이헤브의 배에 오릅니다.
인간은 운명의 경고를 보고도 걸어 들어간다는 멜빌의 비극적 인간관이 이 한 장면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잔해
크레타 미궁 같은 문신
퀴퀘그의 팔을 덮은 문신이 크레타의 미노타우로스 미궁(라비린토스)에 비유됩니다. 미궁은 출구를 알 수 없고, 들어가면 길을 잃는 복잡한 구조물이죠. 즉 퀴퀘그의 문신—그리고 그 문신이 담고 있는 세계관, 신화, 정체성—은 서구의 이스마엘이 쉽게 이해하거나 해독할 수 없는 또 다른 우주적 체계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소설에서 퀴퀘그의 문신이 우주의 비밀을 담은 책이라고 명시되기도 합니다.
악몽의 손 + 퀴퀘그의 팔 — "야릇한 기분이 흡사했다"
이 대목이 소설에서 가장 정교한 심리 묘사 중 하나.
이스마엘은 어린 시절 계모에게 벌을 받아 침대에 갇혔을 때, 잠결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손이 자신의 손을 꼭 쥐는 끔찍한 꿈/환각을 경험했다고 회상합니다. 그 손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이면서 동시에 묘하게 실재감이 있었죠.
지금 눈을 떴더니 퀴퀘그의 문신된 팔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 — 그 느낌이 그 악몽의 손과 똑같다고 합니다.
왜 이 비교인가?
그 어릴 적 손은 공포와 낯섦의 극한. 그런데 지금 가장 낯설고 두렵던 존재(퀴퀘그)의 팔이 그것과 같은 느낌이라는 건—역설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친밀감의 대상이 되는 순간을 묘사.
더 나아가, 그 어린 시절의 공포 자체가 어쩌면 낯선 것, 타자에 대한 두려움의 원형이었을 수 있고, 퀴퀘그와의 동침은 그 원초적 공포를 처음으로 온기로 변환시키는 치유의 순간
.
멜빌이 말하는 것은 "야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내면의 가장 오래된 공포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진정한 인간적 연대가 생긴다.
"애벌레도 아니고 나비도 아닌, 변이 단계의 생명체"
퀴퀘그는 고향 섬의 추장 아들로 태어났지만 문명을 배우겠다며 포경선에 올랐고, 그렇다고 서구인도 아닌 경계적 존재.
"교육은 끝나지 않았다"
는 말은 단순히 퀴퀘그만을 향한 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변이 단계에 있고, 완성된 문명이란 없다는 멜빌의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이 "미완성"이 퀴퀘그를 가장 살아있는 존재로 만듭니다.
작살날을 예리하게 간수하는 것
퀴퀘그가 면도를 할 때 작살 날을 면도날처럼 사용하는 장면. 이스마엘이 처음엔 섬뜩하게 봤지만, 나중에 그 강철의 품질과 예리함을 알고 나서는 놀라지 않게 됩니다. 퀴퀘그의 행동에는 항상 정확한 이유와 숙련된 논리가 있다는 것—"야만적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최고의 기능주의적 합리성이었다는 반전.
잔해
"우리는 이제 죽음이 갈라놓기 전엔 헤어질 수 없는 사이" 라는 4장의 장면은 정녕 유머뿐인가
이스마엘이 처음엔 퀴퀘그를 죽을 것 같이 두려워하다가, 하룻밤 자고 나서 "우리는 이제 죽음이 갈라놓기 전엔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하는 건 — 스스로도 알고 쓴 자기 풍자적 유머입니다.
멜빌은 이 장면을 분명히 희극적으로 썼습니다.
그러면 상징은 없느냐 하면 — 그게 멜빌의 기술입니다.
그 문장이 소설 끝에서 문자 그대로 실현됩니다.
퀴퀘그는 나중에 자신의 관을 미리 짜고, 그 관 뚜껑이 침몰 후 이스마엘이 잡고 살아남는 구명 부표가 됩니다. 퀴퀘그가 죽은 후에야, 그의 물건이 이스마엘을 살립니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갈라놓을 수 없다"던 농담이 — 죽음으로써 오히려 연결이 완성되는 결말로 돌아오는 거죠.
멜빌이 치밀한 건, 이걸 미리 설계해 놓고 유머로 포장해서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심어뒀다는 점이 아닐까요. 웃고 넘어갔던 문장이 결말에서 다시 되돌아오는 구조입니다. 유머와 상징이 동시에 작동하는, 멜빌의 방식이랄까.
즉, 퀴퀘그와 이스마엘의 관계를 멜빌은 의도적으로 혼인에 준하는 결합으로 묘사합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급진적인 설정입니다. 인종·문화·언어를 초월한 이 결합이 소설 전체의 정서적 뼈대가 되며, 퀴퀘그의 관 뚜껑이 결말에서 이스마엘을 구하는 장치가 되는 것도 이 연결의 연장선이라 생각합니다. 흥미로워요.

kontentree
잠을 자면서도 어찌나 나를 꽉 껴안았는지 죽음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아무것도 갈라 놓을 수 없을 듯 했다.
『모비 딕 - 상』 4. 이불,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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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문학적 계보,
성경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이 다시 그리스 비극의 철학과 맞닿고...
탐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적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작가가 단순히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대한 배경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책의 스케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허먼 멜빌은 단순히 고래 잡는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인류가 가진 모든 지식(해부학, 법학, 신학, 천문학, 고전 신화 등)을 '고래'라는 거대한 상징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 뒤에 숨은 수천 년의 역사가 불쑥 튀어나오는 경험을 하죠.
백과사전식 서술로 고래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모든 지적 도구를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고 그 방대함 자체가 곧 '우주의 신비'를 상징하기도 하죠.
성경과 신화의 변주도 있습니다.
이슈마엘과 에이합 선장. 이름부터가 성경적 복선이고 광야에서 쫓겨난 자와 타락한 왕의 이름이 부여된 캐릭터들이어서 그들의 말이 성경구절과 공명할 때 느껴지는 전율이 상당합니다.
숙명론과 자유의지. 그리스 비극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운명론이 배경에 깔려 있어, 단어의 어원을 찾아가다 보면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멜빌은 이슈마엘의 냉소적이고도 인간적인 입담 그리고 자신의 자기비하적 유머로 독자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선원 캐릭터들의 낙천적인( 무신경한 ) 유머도 에이합의 광기어린 진지함과 대비되어 긴장감을 줍니다.
그는 이렇게 지식과 유머로 버무려진 텍스트로 미장센을 할 줄 아는 작가입니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기술, 그가 사건을 서술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장면의 분위기와 상징을 시각적으로 설계하기 때문입니다.
멜빌은 방대한 지식을 동원해 독자의 머리 속에 정교하게 거대한 무대세트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마치 눈 앞에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죠.
지금 이렇게 한 페이지를 붙들고 한 시간을 고민하는 것도 가장 사치스럽고 고결한 취미 아닐까 하지만 나만의 주석 달기를 이곳에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읽을 때를 위한 나만의 해설서입니다.
잔해
뉴베드프드는 그야말로 기름의 땅이니 가나안과는 다르지 않다... 딸의 지참금으로 고래를 주고...집집마다 기름으르 보관하는 저유조가 있어서
<모비 딕 읽으며 알게된 고래기름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당시 고래기름이( 특히 향유고래기름) 현재의 석유만큼이나 핵심 에너지였습니다.
포경선 한 척은 오늘날의 유전 하나와 맞먹는 가치를 가졌습니다. 고래가 멸종위기에 처했을 때 석유의 발견으로 고래를
구한 셈입니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19세기 포경업 자본가들이 남긴 막대한 부가 훗날 스탠더드 오일(석유), 버크겨 해서웨이, JP 모건 같은 현대적 금융 산업 자본의 뿌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kontentree
7장에서는
기독교의 부활 교리가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작가가 말한 '의도하지 않은 불신앙'이란, 시신없는 비문들을 보며 느끼는' 죽음은 끝 이다' 라는 솔직한 절망같은 것.
이슈마엘이 갑자기 명랑해진 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닙니다. 죽음이 압도적이란것, 그러니 벌벌 떠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꺠달음-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대한 반항으로서의 웃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야말로 굴조개가 된 느낌이에요. 꽉 다문 자신의 껍데기 위에는 다시 두텁고 탁한 바닷물이라니.. 하지만 마음만은 명랑하게!
8장은
마지막 문장이 전부인것 같습니다.
"그렇다 세계는 항해에 나선 한 척의 배이며, 우리의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슈마엘은 이제 허무를 응시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명랑함을 안고 바다로 향합니다.

kontentree
영적인 것을 보는 우리는 물속에서 태양을 보며 투텁고 탁한 물을 더없이 얇고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굴조개와 흡사하다.
『모비 딕 - 상』 7장 예배당,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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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신앙은 자칼처럼 무덤들 사이에서 먹이를 찾고, 이런 맥빠지는 의욕 속에서도 가장 생기 넘치는 희망을 끌어 모은다
『모비 딕 - 상』 7장 예배당,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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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신앙은 자칼처럼 무덤 속에서 먹이를 찾는 지경에 생기를 가지라.
신앙은 죽음이라는 비극을 먹고 사는 기묘한 존재!
부활 같은 거창한 위로보다 허무를 직시하라는 멜빌의 독설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굴조개 비유가 현실적이라 느꼈어요. 태양(영적인 것)을 물 속에서 보며 바닷물 깊이에 가린 것을 보지 못하고, 얄팍한 공기 인줄로만 아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
화제로 지정된 대화
잔해
6장에서 식인종들이 뼈를 들고 다닌다는 묘사에 깜짝 놀라지 않으셨나요?
사실 원문을 보면 그건 손에 든 뼈가 아니라, 그들의 '몸'을 의미하는 비유인데요.
6장 '거리' 에서
영문원본 일부입니다.
"... many of whom yet carry on their bones unholy flesh."
그들 몸 위에 여전히 야만적인 살점을 두르고 있다 는 뜻으로
아직 문명화(기독교화) 되지않은 날것 그대로의 야만인의 상태를 문학적으로 묘사한거죠.
그런데 강수정번역의 열린책들에서
뉴베드퍼드에는 진짜 식인종들이 길모퉁이에서 수다를 떤다.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야만인들이 고약스러운 살점이 그대로 붙은 뼈를 들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오역을 했네요.
번역에 따라 식인종이 순식간에 호러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네요.
우리가 어떤 번역본으로 보느냐에 따라 참 다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잔해
제7장 '예배당(The Chapel)'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철학적 선언이 담긴 핵심적인 장.
이슈마엘이 뉴베드퍼드의 고래잡이 예배당에서 비문들을 보며 겪는 심경의 변화와 그 속에 담긴 멜빌의 의도.
1. 논리의 전개: 절망에서 초월로
① 죽음의 허무와 불신앙 (비리얼리즘적 현실)
이슈마엘은 예배당 벽에 걸린 추도비들을 봅니다. 이 비석들의 특징은 '시신이 없는 무덤'이라는 점입니다. 고래에게 끌려가거나 파도에 휩쓸려 육신조차 찾지 못한 자들의 이름만 적혀 있죠.
부활을 거부하는 허무: 기독교적 전통에서 부활은 '육신의 회복'을 전제로 하지만, 바다에 뿌려진 이들에게는 그 약속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멜빌은 이를 "의도하지 않은 불신앙"이라 표현합니다.
엘레판타 동굴: 인도의 거대한 석굴 사원처럼 압도적이고 이교도적인 고립감을 비유합니다. 죽음이 안식처가 아닌, 거대하고 낯선 심연으로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② 인간의 모순과 '자칼' 같은 신앙
아담은 골동품: 인류의 조상 아담조차 수천 년째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는 표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인류의 오랜 확신이 사실은 증명되지 않은 막연한 기다림일 수 있다는 냉소적 질문입니다.
자칼 같은 신앙: 매우 날카로운 비유입니다. 자칼이 무덤을 파헤쳐 먹이를 찾듯, 인간의 신앙은 역설적으로 '죽음'과 '공포'라는 먹잇감이 있어야만 '희망'이라는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통찰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신앙도 굶주릴 것이라는 뜻이죠.
③ 급작스러운 명랑함과 영혼의 독립
여기서 이슈마엘의 태도가 급변합니다. 그는 갑자기 "웬일인지 다시 명랑해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허무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얻는 해탈에 가깝습니다.
그림자와 실체: 우리가 사는 이승의 삶(육체)이 실은 '그림자'이고, 죽음 너머의 영적인 상태가 진짜 '실체'라는 플라톤적 인식이 등장합니다.
굴조개의 비유: 굴조개가 탁한 물을 공기라고 착각하며 살듯, 인간도 육체라는 좁은 감옥 안에서 이 불완전한 세상을 진리라고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제우스도 뚫을 수 없는 영혼: 내 육체(배)에 구멍이 뚫려 죽더라도, 나의 본질인 '영혼'은 신(제우스)조차 파괴할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2. 멜빌이 이 대목을 쓴 의도
멜빌이 이 복잡하고도 강렬한 문장들을 배치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슈마엘'이라는 캐릭터의 무장
이슈마엘은 이제 곧 죽음이 일상인 포경선을 타야 합니다. 멜빌은 주인공이 죽음의 공포를 단순히 '용기'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는 내가 아니다"라는 철학적 깨달음을 통해 공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야만 광기 어린 에이허브 선장의 항해 속에서도 관찰자로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19세기 근대적 신앙에 대한 질문
당시 미국 사회를 지배하던 낙관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관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멜빌은 거친 바다라는 극한 상황을 통해, "시신도 없는 죽음 앞에서도 당신들의 신앙이 유효한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외부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불멸하는 영혼을 깨달음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셋째, 비극적 숭고함(Sublime)의 구축
《모비딕》은 거대한 자연(고래)과 인간의 대결을 다룹니다. 이 대결이 단순한 사냥이 되지 않으려면, 인간 역시 신에 필적하는 '파괴 불가능한 영혼'을 가진 존재여야 합니다. "제우스도 내 영혼은 뚫을 수 없다"는 선언은 인간을 신화적 수준으로 격상시켜, 앞으로 펼쳐질 비극을 더욱 웅장하게 만듭니다.
요약하자면: 멜빌은 죽음의 허무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뒤, 오히려 그 허무를 발판 삼아 육체의 필멸성을 비웃고 영혼의 자유를 선포하는 이슈마엘의 정신적 승리를 그려낸 것입니다.
이 장을 이해하고 나면, 이후 고래와의 사투에서 이슈마엘이 보여주는 기묘한 침착함과 관조적인 태도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잔해
세상은 항해에 나선 한 척의 배이며, 설교단은 그 배의 뱃머리다
『모비 딕 - 상』 8장 설교단,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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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7장에서 이슈마엘이 죽음 앞에서 허무를 느꼈다면, 8장의 설교단은 그 거친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들에게 방향타를 제시합니다. 설교단이 뱃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은, 종교나 철학이 단순히 위로를 주는 곳이 아니라 폭풍우(고난)를 가장 먼저 맞으며 길을 밝히는 '선봉'이어야 함을 의미
매플 목사는 과거에 작살잡이였던 인물로, 신앙과 거친 현장을 모두 아는 '실천적 선지자'로 묘사됩니다. 고립된 요새의 파수꾼이죠
넬슨 제독과 빅토리호의 은판: 희망의 빛
그림의 내용: 사나운 폭풍 속에서 난파 위기에 처한 배가 있고, 그 위 구름 사이로 천사의 얼굴과 한 줄기 햇살이 비치고 있습니다.
은판(Silver Plate) 비유: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 제독이 전사한 빅토리호의 갑판 자리에는 그를 기리는 은판이 박혀 있습니다. 멜빌은 그림 속 천사가 비추는 햇빛이 배의 갑판을 밝히는 모습이 마치 그 '영광스러운 은판'처럼 빛났다고 묘사합니다.
비극 속의 영광: 넬슨은 승리의 순간에 죽었습니다. 바다에서의 죽음이 7장에서는 '비참한 허무'였다면, 이 비유를 통해 '숭고한 희망'으로 치환됩니다.
구원의 확신: 아무리 참혹한 폭풍(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하늘의 빛(진리/구원)이 비치고 있다면, 그 항해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확신을 줍니다.
대조: 7장의 어두운 대리석 추도비(절망)와 8장의 빛나는 은판(희망)을 대조시켜, 이슈마엘이 다시 명랑해질 수 있는 영적 근거를 시각화한 것입니다.
왜 멜빌은 이 장면을 썼는가?
멜빌은 이슈마엘(인간)이 광활한 바다로 나가기 전, 정신적인 무장을 시켜줍니다.
7장에서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면, 8장에서는 "그 죽음과 고난이 가득한 항해를 이끄는 것은 결국 숭고한 영혼의 외침(설교단)"임을 강조합니다.
매플 목사가 사다리를 치우고 뱃머리 모양의 설교단에 서는 행위는, 앞으로 에이허브 선장의 광기 어린 항해 속에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영적인 중심'이 무엇인지 예고하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8장의 핵심 요소인 매플 목사의 줄사다리와 넬슨 제독의 은판 비유가 자아내는 대조의 묘미도 즐겨보죠.
두 장치는 결국 "폭풍 같은 삶(바다)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
세상과 단절하여 영적 고결함을 지키려는 목사의 사다리와, 참혹한 비극 속에서도 숭고한 희망의 빛을 잃지 않는 넬슨의 은판은 이 항해를 단순한 고래잡이가 아닌 정신적 구도의 여정으로 만듭니다.
잔해
제9장 '설교(The Sermon)'에서는 드디어 매플 목사가 단상에 올라 그 유명한 '요나의 이야기'를 포효하듯 쏟아냅니다.
설교의 전개와 매플 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는 요나의 죄와 참회의 본질입니다.
먼저, 매플 목사가 요나의 죄를 언급하며 "아미때의 아들 요나(Jonah, the son of Amittai)"라고 부른 대목을 보고 생소하겠지만 멜빌이 이를 언급한 배경에는 흥미로운 문학적·성경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이름의 어원과 상징: "진리의 아들"
'아미때(Amittai, 히브리어: אֲמִתַּי)'는 히브리어로 '진리' 또는 '진실함'을 뜻하는 '에메트(Emet)'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즉, 이름 자체의 뜻이 "나의 진리" 혹은 "진실한 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요나를 "아미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학적으로 거대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냅니다.
요나의 모순: 요나는 '진리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내린 진리(사명)를 저버리고 거짓과 도망의 길을 택했습니다.
매플 목사의 의도: 매플 목사가 설교에서 굳이 이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른 이유는, "진리의 자식으로 태어난 인간조차 얼마나 쉽게 진리를 배반하고 도망치는가"를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2. '진리'를 향한 멜빌의 집착
《모비딕》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바로 '진리(Truth)의 추구'입니다.
매플 목사는 설교 후반부에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거짓됨이 구원일지라도 진실되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 화 있을지니!"
"거짓에 맞서 진실을 설파하라!"
멜빌은 요나의 아버지 이름인 '아미때(진리)'를 통해, 우리 인간이 아무리 두렵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세상의 편안한 거짓(타르시스로 도망치는 배) 대신 불편하고 거친 진리의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나가 진리를 피해 도망쳤다가 고래 배 속이라는 참혹한 심연을 거쳐 다시 '진리의 대변자'로 거듭났듯, 이 배를 탄 이슈마엘과 에이허브 역시 피할 수 없는 진리와 마주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인 셈입니다.
그럼, 1. 요나가 저버린 '하느님의 명령'은 무엇인가?
"거짓에 맞서 진실을 설파하라!"
원래의 사명: 하느님은 요나에게 당장 니네베(Nineveh)로 가서 그들의 죄악을 꾸짖고 회개를 촉구하는 "진실을 외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요나가 저버린 것: 니네베는 이스라엘의 원수이자 매우 잔인하고 간교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요나는 그곳에 혼자 가야 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이 진실을 외쳤을 때 마주할 적대감과 박해에 겁을 먹었습니다.
도망과 불복종: 그래서 요나는 하느님의 명령(사명)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반대 방향인 다르싯(스페인 카디스, 당시 기준 세상의 끝)으로 가는 밀수선에 몸을 싣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즉, '진실을 말해야 하는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2. 요나는 무엇을 '자백'했는가?
풍랑 속에서 선원들이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자"며 제비를 뽑았고, 요나가 뽑히게 됩니다. 선원들이 떼로 몰려들어 "네 직업이 뭐냐, 어디서 왔냐"고 추궁할 때, 요나는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고백합니다.
① 자신의 정체성과 불신앙의 자백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바다와 마른 땅을 지으신 우리 주 하느님을 경외합니다!"
요나는 단순히 고향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묻지 않은 죄상까지 스스로 털어놓은 것입니다.
② 자신의 죄에 대한 처벌을 자백(수용)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요나가 한 가장 위대한 자백은 바로 "이 폭풍은 나 때문에 온 것이니, 나를 바다에 던져 희생시켜라"고 말한 대목입니다.
비겁하게 도망쳤던 그가 죽음(바다)을 대면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죄를 온전히 인정하고, 남을 탓하거나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채 '스스로 처벌을 받겠다'고 자백한 것입니다.
3. 멜빌이 이 대목을 통해 하고 싶은 말
매플 목사는 요나의 이 '자백'을 "진실하고 거짓 없는 참회"의 표본으로 제시합니다.
"요란스럽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처벌을 달게 받는 태도."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 때문에 진실(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치는 '요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대자연의 폭풍(신의 손길)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고 그 대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고래 배 속(심연)에서 구원받아 마른 땅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요나의 이야기는 앞으로 광기 어린 에이허브 선장을 따라 파멸의 항해를 떠날 이슈마엘에게 "인간이 신의 뜻을 거스르고 도망치려 할 때 어떤 폭풍을 맞이하게 되는가"를 경고하는역할을 합니다.
매플 목사의 설교 마지막 대목인 *"이 확고부동한 만세의 용골에서 흔들어 떨어뜨릴 수 없는 자에게 기쁨 있을지니"
이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모비딕》 속 문학적 의미입니다.
1. 사전적·기술적 정의: 배의 '척추'
용골(龍骨)은 한자 뜻 그대로 '용의 뼈'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선박의 기초 뼈대: 배의 맨 밑바닥 중앙을 이물(선두)에서 고물(선미)까지 꿰뚫고 있는 거대한 세로 방향의 뼈대입니다.
건물의 '주춧돌'과 '들보':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다지고 기둥을 세우듯, 배를 만들 때 가장 먼저 바닥에 까는 것이 바로 이 용골입니다. 이 용골을 중심으로 갈빗대 모양의 늑골들이 좌우로 붙어 배의 형체를 완성하게 됩니다.
역할: 배가 파도의 압력을 견디도록 중심을 잡아주고, 배가 좌우로 흔들릴 때 뒤집히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아래로 잡아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2. 《모비딕》 제9장에서의 문학적·철학적 의미
멜빌은 이 기술적인 단어를 매플 목사의 입을 통해 인간 영혼의 가장 깊고 단단한 중심을 상징하는 비유로 승화시켰습니다.
①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
"소란스러운 폭도가 사나운 파도처럼 밀려들어도 이 확고부동한 만세의 용골에서 흔들어 떨어뜨릴 수 없는 자에게 기쁨 있을지니."
세상의 비난, 유혹, 혹은 광기(사나운 파도)가 아무리 배를 흔들어 대더라도, 영혼의 밑바닥에 신념이라는 '확고부동한 용골'을 품고 있는 사람은 결코 중심을 잃거나 뒤집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② 겉치레와 본질의 대조
배의 돛대나 갑판은 눈에 잘 보이고 화려하지만, 폭풍이 불면 가장 먼저 부러지거나 휩쓸려 갑니다. 반면 용골은 바다 밑바닥 어둠 속에 잠겨 있어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배의 생사를 결정짓습니다.
목사는 세속의 평판이나 눈에 보이는 영광(돛대)에 연연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영혼의 가장 단단한 뼈대(용골)인 '진실함'을 지켜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물리적인 배에서 용골이 배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한 척추인 것처럼,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용골은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고결한 신념과 주체성을 의미합니다.
이슈마엘이 신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치는 요나와 같다면, 대체 이슈마엘은 무슨 신의 뜻을 거슬렀는가? 아니면 그게 에이허브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둘 다 요나의 성격을 나누어 가졌지만, 그 양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멜빌은 요나라는 인물을 반으로 쪼개어 에이허브에게는 '불복종과 파멸'을, 이슈마엘에게는 '도망과 참회(구원)'의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요나와 닮아 있고, 또 어떻게 다를까요.
1. 에이허브: 끝내 회개하지 않고 신과 맞서는 '창조적 요나'
에이허브는 요나가 가졌던 "신의 명령에 대한 근본적인 불복종과 반발"을 극대화한 인물입니다.
신의 질서에 대한 거부: 요나가 니네베로 가라는 신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도망쳤듯, 에이허브는 모비딕(대자연과 신의 섭리)이 자신에게 가한 고통(다리를 앗아간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망 대신 '전쟁'을 선포: 요나는 두려워서 도망쳤지만, 에이허브는 도망치는 대신 신의 피조물인 모비딕을 죽이겠다며 정면으로 전쟁을 선포합니다. 매플 목사가 경고한 "지상의 선장들에 맞서 굽히지 않는 자아"를 넘어, 에이허브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오만(Hubris)을 부립니다.
참회의 거부: 요나는 폭풍 속에서 "나를 바다에 던지라"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징벌을 달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에이허브는 항해 내내 찾아오는 경고(폭풍, 나침반의 고장, 다른 배들의 조언)를 모두 무시하고 끝내 자백하거나 참회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고래 배 속에서 살아 돌아온 요나와 달리, 고래에게 끌려 심연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는 파멸을 맞이합니다.
2. 이슈마엘: 현실로부터 도망쳤으나, 결국 '참회'로 구원받는 요나
"왜 이슈마엘이 신의 뜻을 거스르고 도망친다는 것인가?"에 대한 답은 이슈마엘이 포경선을 타게 된 본질적인 이유와 닿아 있습니다.
삶으로부터의 도망(방랑): 1장 '희미한 시작'에서 이슈마엘은 자신이 바다로 가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입가가 험악하게 굳어질 때, 내 영혼에 가랑비 내리는 11월처럼 쓸쓸함이 찾아올 때...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대신 서둘러 바다로 간다.”
즉, 이슈마엘은 지상에서의 고통, 우울, 삶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바다(피난처)를 택했습니다. 이는 신이 허락한 지상의 삶이라는 소명을 버리고 다르싯으로 도망치려 했던 요나의 심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방관자라는 죄: 이슈마엘은 에이허브의 광기 어린 복수극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않습니다. 매플 목사는 설교에서
"거짓됨이 구원일지라도 진실되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 화 있을지니"
라고 외쳤습니다. 에이허브의 광기(거짓된 구원)에 침묵하고 방관한 것 자체가 이슈마엘이 저지른 '진실을 외쳐야 하는 인간의 사명'을 저버린 죄입니다.
처벌의 수용과 참회: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듯, 피쿼드호가 침몰할 때 이슈마엘도 바다 한가운데 홀로 던져집니다. 그 절대적인 고독과 죽음의 심연 속에서 이슈마엘은 비로소 자신의 오만과 방관을 뉘우치고, 신의 섭리(생명)를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이교도 친구 퀴퀘그의 관(棺)을 붙잡고 유일하게 살아남아 "자백하는 예언자(기록자)"로서 세상에 이 진실을 알리는 진짜 요나가 됩니다.
결국 멜빌은 요나의 비극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도망치거나(이슈마엘) 분노하며 반역하는(에이허브) '요나'가 된다.
하지만 그 폭풍 속에서 자기 내면의 영혼의 용골(신념과 겸손)을 붙잡고 참회하는 자(이슈마엘)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끝까지 스스로를 신이라 믿으며 오만을 부리는 자(에이허브)는 파멸할 것이다.
이 설교가 끝난 뒤, 이슈마엘은 10장에서 이교도인 퀴퀘그와 온 마음으로 우정을 나누며 기독교적 오만을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이미 이슈마엘의 내면에서는 '참회와 열린 마음'이라는 구원의 용골이 싹트고 있었던 셈이지요.
여섯모서리
제10장 '소중한 친구(Bosom Friend)'이슈마엘의 인생과 작품 전체의 철학에서 엄청난 전환점이 되는 장입니다.
1. 가장 중요한 핵심 문장 (기독교적 오만의 극복)
"하지만 섬긴다는 건 무엇인가? 신의 뜻대로 하는 것, 그것이 섬김이지. 그리고 신의 뜻이란 무엇인가? 이웃이 내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행하는 것, 그것이 신의 뜻이다. 그런데 퀴퀘그는 내 이웃이다."
💡 왜 가장 중요할까?
이슈마엘은 엄격한 장로교 집안에서 자란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런 그가 이교도인 퀴퀘그가 나무 조각(우상)에 예배를 드릴 때, 함께 절을 하고 건빵을 바치며 우상 숭배에 동참하기 직전에 던지는 철학적 자문자답입니다.
문명인이 야만인을 일방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신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이교도의 의식에 기꺼이 동참하는 장면입니다. 편협한 종교적 교리를 넘어서서 '인간 대 인간'으로 결합하는 우주의 법칙을 깨닫는 선언이기에 이 장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문장입니다.
2. 마음의 빗장을 열어준 구원의 문장
"안에서 뭔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산산이 갈라진 가슴과 성난 손이 더는 늑대 같은 세상에 저항하지 않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 주는 저 야만인이 세상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 왜 중요할까?
1장에서 이슈마엘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우울(늑대 같은 세상) 때문에 권총을 만지작거리다 바다로 도망쳐 왔습니다. 하지만 문명사회는 그에게 치유를 주지 못했죠. 역설적이게도 사회에서 '식인종', '야만인'이라 부르며 배척하는 퀴퀘그의 침착하고 가식 없는 모습을 보며, 이슈마엘은 상처받았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세상과의 화해를 경험합니다. 퀴퀘그야말로 이슈마엘에게 구원자가 된 순간을 묘사합니다.
3. 참된 철학자에 대한 통찰
"하지만 진정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살거나 살려고 애쓰는 것에 대해 의식하지 말아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 왜 중요할까?
이슈마엘은 문명을 배우지 못한 퀴퀘그가 그 어떤 백인 철학자보다 완벽한 평온함과 영혼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보며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스스로 철학자라 자처하는 문명인들의 위선을 꼬집으며, 아무런 의식 없이 삶 그 자체로 진리를 살아내는 야만인의 고결함을 예찬하는 문장입니다.
4. 소중한 친구(혼인)의 선언
"그는 이마를 맞대고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이제부터 우리는 혼인한 거라고 말했다. 퀴퀘그의 고향에서는 그게 소중한 친구라는 뜻이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다."
💡 왜 중요할까?
서로 파이프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두 사람의 영혼이 완전히 하나로 묶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혼인(Marriage)'은 세속적인 제도를 넘어,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영적 공동체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우정은 훗날 피쿼드호가 침몰할 때 퀴퀘그의 관(棺)이 이슈마엘을 살려내는 기적의 복선이 됩니다.
📌 요약하자면
제10장 '소중한 친구'는 "편견과 문명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인간애를 통해 영혼의 구원을 얻는 과정"을 다룹니다.
이 장을 기점으로 이슈마엘은 단순히 '도망치던 자'에서, 이교도 친구마저 온전히 품을 수 있는 '넓고 단단한 용골을 가진 자'로 완전히 재탄생하게 됩니다.
여섯모서리
몸의 온기를 제대로 만끽하려면 어느 한 부분은 차가워야 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특징은 단지 비교에 의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비 딕 - 상』 11장 잠옷 (nightgown),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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