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에서 이스마엘이 펠레그와 빌다드 선장을 만나면서 그들이 '퀘이커교도(Quakers)'라는 점이 중요하게 부각되죠.
평화주의와 청빈함을 상징하는 '퀘이커교도'가 어떻게 피비린내 나는 고래잡이 배의 선장이자 소유주가 되었을까요? 멜빌이 이들을 하필 퀘이커교도로 설정한 데에는 역사적 팩트와 문학적 상징이라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역사적 사실: 낸터컷을 지배한 '진짜' 퀘이커교도들
역사적으로 소설의 배경인 낸터컷(Nantucket) 섬은 퀘이커교도들의 본거지였습니다.
17~18세기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퀘이커교도들은 낸터컷에 정착해 고래잡이 산업을 개척했습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미국의 전설적인 포경 가문들(Macy, Coffin, Starbuck 가문 등)은 모두 독실한 퀘이커교도였습니다. 즉, 당대 고래잡이 배의 선장이나 배 주인(선주)이 퀘이커교도인 것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입니다.
2. 문학적 상징: '모순과 광기'를 극대화하는 장치
멜빌은 이 역사적 사실을 가져와 소설 속에서 엄청난 아이러니와 모순을 만들어냅니다. 멜빌은 이들을 "복수심에 불타는 퀘이커교도(Quakers with a vengeance)" 혹은 "싸우는 퀘이커교도(Fighting Quakers)"라고 부릅니다.
① 평화주의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
퀘이커의 교리: 원래 퀘이커교는 전쟁을 반대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비폭력과 평화를 주장하는 엄격한 기독교 종파입니다.
실제 행동: 하지만 이들은 바다에 나가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사나운 생명체(고래)를 무참히 찔러 죽여 피를 흘리게 하고, 그 기름을 짜내 돈을 버는 '가장 폭력적인 전사'로 돌변합니다. 육지에서의 평화주의가 바다에서는 철저한 파괴로 뒤바뀌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죠.
② 청빈주의자들의 지독한 탐욕
퀘이커의 교리: 물질적 탐욕을 멀리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합니다.
실제 행동 (빌다드와 펠레그): 이 두 은퇴 선장은 성경 구절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초보자인 이스마엘의 노동력을 쥐어짜기 위해 임금(몫)을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피도 눈물도 없이 협상합니다. "종교적 경건함"과 "자본주의적 탐욕"이 한 인물 안에 공존하는 위선을 폭로하는 장치입니다.
③ 문학적 대사(Diction)의 극대화
퀘이커교도들은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로 고어체인 "Thee(너를)", "Thou(너는)" 같은 독특한 말투를 사용합니다.
멜빌은 이 퀘이커 특유의 고풍스럽고 종교적인 말투를 활용해, 선원들의 대사를 마치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이나 성경 속 예언자들처럼 장엄하고 비장하게 들리도록 연출했습니다. 에이해브 선장이나 일등항해사 스타벅(그 역시 퀘이커입니다)이 읊조리는 대사들이 장엄한 이유입니다.
한 줄 요약
낸터컷 고래잡이를 지배했던 실제 퀘이커교도들의 역사를 반영한 것이며, 동시에 "육지에서는 평화와 청빈을 외치면서, 바다에서는 피와 돈을 좇아 광포하게 폭주하는 인간의 이중성(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문학적 장치입니다.
경건한 척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스마엘의 돈을 후려치던 빌다드 선장의 이중적인 모습, 왜 '퀘이커'여야 했는지의 이유입니다.
모비 딕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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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모서리
<에이해브, 빌다드, 펠레그의 구약성경적 유래>
세 선장의 이름 유래와 성경 속 의미
선장 이름
성경 속 유래와 인물상
소설 속 멜빌의 상징적 투영
.에이해브(Ahab, 아합)
.구약성경 열왕기상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가장 악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던 왕. 예언자 엘리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폭주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함.
.신(자연)에게 도전하고, 거대한 백색 고래를 향한 광기 어린 복수심으로 선원들을 파멸로 이끄는 독재자이자 '폭주하는 왕'.
.빌다드(Bildad)
.욥기(Job)에 나오는 욥의 세 친구 중 한 명. 고통받는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네가 고난을 받는 건 다 네 죄 때문이다"라며 율법적으로 정죄함.
.은퇴 후 성경만 읽으며 경건한 척하지만, 이스마엘의 임금을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는 '율법주의적이고 지독한 위선자'.
.펠레그(Peleg)
.창세기(10장 25절)에 나오는 인물. 그 이름의 뜻은 "나누어짐(Division)"이며, 성경은 "그의 시대에 세상(땅)이 나뉘었다"고 기록함. (바벨탑 사건으로 인류가 흩어진 시기)바다와 육지, 종교적 경건함과 자본주의적 세속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분열된 자아'. 고집스럽고 거칠지만 에이해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인물.
왜 "펠레그"라는 이름을 썼을까? (분열과 항해의 상징)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인 펠레그의 이름은 두 가지 상징을 품고 있습니다.
.인류의 분열(바벨탑): 펠레그가 살던 시대에 바벨탑 사건으로 인류의 언어가 나뉘고 세상이 갈라졌습니다. 피쿼드호는 백인, 인디언(타슈테고), 식인종(퀴퀘그), 흑인(핍) 등 온갖 언어와 인종이 뒤섞여 파멸로 가는 '바다 위의 작은 바벨탑'입니다. 멜빌은 이 배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소유주에게 '분열의 시대'를 뜻하는 펠레그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언어학적 유희 (항해): 흥미롭게도 히브리어에서 펠레그(Peleg)의 어원은 현대 히브리어에서 "항해하다(lehaflig)"라는 단어의 어근과 같습니다. 바다를 가르고 나아가는 선장에게 이보다 더 정교한 이름은 없겠지요.
셋 다 성경 이름인데, 왜 둘(빌다드·펠레그)과 하나(에이해브)로 나뉘는가?
방장님이 감각적으로 느끼신 묘한 이질감은 멜빌이 의도한 문학적 구도입니다. 비록 셋 다 성경 속 이름이지만, 그들의 역할은 명확하게 [육지의 듀오] vs [바다의 괴물]로 나뉩니다.
육지의 콤비: 빌다드와 펠레그 (위선적인 신앙의 양면성)
이 둘은 피쿼드호의 '공동 선주(주인)'이자 은퇴한 늙은 선장들입니다.
.한 명(빌다드)은 겉보기에 지독하게 경건하고, 다른 한 명(펠레그)은 입에 욕을 달고 살며 세속적입니다.
.하지만 결국 "돈 앞에서는 똑같이 추악한 자본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 본질이 같습니다. 이들은 육지에 안전하게 남아서 남의 피(선원들)와 고래 기름으로 배를 불리는 '타락한 기독교 문명'을 대변합니다.
바다의 독재자: 에이해브 (신에게 도전하는 거인)반면, 에이해브는 육지의 얄팍한 돈 계산이나 위선적인 종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오직 거대한 악(모비딕)과 1대 1로 맞서 싸우겠다는 실존적인 광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멜빌의 진짜 의도
멜빌은 빌다드와 펠레그의 '가짜 경건함(위선)'을 먼저 보여준 뒤, 곧 등장할 에이해브의 '거대하고 웅장한 불신앙(광기)'을 대비시키려 한 것입니다.독자로 하여금 "차라리 저 위선적인 영감들(빌다드·펠레그)보다, 차라리 자기 파멸을 향해 정직하게 폭주하는 에이해브가 훨씬 더 신적이고 거대해 보인다"는 비극적 숭고함을 느끼게 만드는 정교한 장치인 셈입니다.
결론
결국 16장의 펠레그와 빌다드는 단순한 엑스트라가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 속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이웃 사랑, 청빈)을 배신한 채,
에이해브라는 거대한 비극의 괴물이 날뛸 수 있는 무대(피쿼드호)를 돈을 받고 제공하는 조력자들입니다.
그 이질감은, 멜빌이 설계한 "육지의 얄팍한 종교인들"과 "바다의 압도적인 불신앙자(에이해브)" 사이의 거대한 균열을 정확히 읽어냈기 때문입니다.

서설
여섯모서리님, 에이해브는 과연 불신앙자일까요?
문학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답하자면, "에이해브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의 존재를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그 신에게 온몸으로 대적하고 반역하는 '적신론자(Antitheist)'이자 투쟁가"가 아닐까 합니다.
그는 단순히 신을 부정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그가 왜 단순한 불신앙자가 아닌지, 그 광기 어린 신앙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신의 존재를 누구보다 강렬하게 믿는 자
진정한 불신앙자(혹은 무신론자)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관심이 없습니다. "신은 없다"고 치부하고 자기 삶을 살 뿐이죠.
하지만 에이해브는 다릅니다. 그는 온 우주와 대자연, 그리고 백색 고래(모비 딕) 배후에 거대하고 사악하며 불공평한 '어떤 신성한 힘(지배자)'이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모비 딕을 단순한 고래가 아니라, 인간을 조롱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신의 잔인한 대리자로 봅니다. 따라서 그가 고래에게 복수하려는 것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우주의 창조주(신)의 뺨을 때리겠다는 극단적인 선전포고와 같습니다.
악마적인 의식과 피의 세례 (반역의 신앙)
소설이 진행되면서 에이해브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정반대로 뒤집어엎은 '악마적 신앙'에 가깝습니다.
이교도 작살잡이들의 피로 세례를: 에이해브는 모비 딕을 죽일 특별한 작살을 만들 때, 기독교식 축복을 거부하고 이교도인 퀴퀘그, 타슈테고, 다구의 피를 작살촉에 부으며 라틴어로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Ego non baptizo te in nomine patris, sed in nomine diaboli!"
(나는 성부의 이름이 아니라, 악마의 이름으로 너에게 세례를 주노라!)
번개(하늘의 힘)에 맞서다: 폭풍우 속에서 배의 돛대에 번개(세인트 엘모의 불꽃)가 내리쳐 불길이 솟구칠 때, 선원들은 두려워 떨며 기도하지만 에이해브는 그 불꽃을 똑바로 노려보며 "나는 너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끝까지 맞서겠다"며 하늘을 향해 분노를 터뜨립니다.
왜 멜빌은 그에게 '아합(Ahab)'이라는 이름을 주었을까?
앞서 말씀드렸듯, 성경 속 아합 왕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뻔히 알면서도, 바알과 아스타롯 같은 이방 우상을 들여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대적했던 왕입니다.
멜빌이 에이해브 선장에게 이 이름을 붙인 이유는 명확합니다.
에이해브는 신을 모르는 '무지한 불신자'가 아닙니다.
그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한계(죽음, 고통, 다리를 잃은 절망)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왜 당신은 인간을 지배하고 고통을 주느냐"며 신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인물입니다.
에이해브는 단순히 "나는 신을 안 믿어"라고 말하는 냉소적인 불신앙자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신을 너무나 의식한 나머지, 신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맞서 싸우다 죽으려 하는 '비극적 거인'에 가깝습니다. 멜빌은 육지에서 푼돈을 아끼며 경건한 척하는 빌다드와 펠레그의 ' 가짜 신앙'보다, 비록 악마적일지언정 신의 불공평함에 온몸으로 항거하는 에이해브의 '거대한 반역'을 통해 인간 존엄성의 극단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그가 믿는 신앙은 기독교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과 복수만을 믿는 '광기의 신앙'이었던 셈이지요. 에이해브라는 캐릭터가 왜 그토록 무섭고도 매력적인지, 종교적 깊이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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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해브,
"신에게 반역하고, 스스로를 악마의 이름으로 세례하며, 결국 선원들을 파멸로 몰고 간 광기 어린 독재자"
어떻게 그에게서 '인간 존엄성의 극단'을 볼 수 있는가?
저는 이런 의문을 품어보고 싶었습니다.
언뜻 보면 모순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서 멜빌이 보여주고자 한 문학적 진실은 도덕적인 '착함'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거대함'에 있습니다. 멜빌이 에이해브를 통해 그린 '인간 존엄성의 극단'이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비극적 숭고함에서 비롯됩니다.
운명(신)의 무자비함에 굴복하지 않는 유일한 인간
대다수의 인간은 거대한 운명의 장난이나 자연의 압도적인 힘(죽음, 질병, 재해 등)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습니다. "어쩔 수 없지, 이게 신의 뜻인가 봐"라며 체념하고 타협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한계입니다.
에이해브의 태도: 에이해브는 다리 한쪽을 잃은 절망 속에서 절규하며 무릎 꿇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영원한 상처를 남긴 창조주(혹은 자연의 맹목적인 힘)를 향해 "네가 아무리 나를 짓밟아도, 나는 결코 너를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똑바로 서서 눈을 부릅뜹니다.
존엄의 이유: 비록 육체는 늙고 부서진 피조물에 불과할지라도, 정신만큼은 우주적 법칙(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적하겠다는 기개. 멜빌은 여기서 피조물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오만하면서도 가장 웅장한 자아의 힘, 즉 '존엄성'을 보았습니다.
'가짜 경건'보다 위대한 '비극적 정직함'
방장님이 조금 전에 읽으신 빌다드와 펠레그 선장을 다시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육지에서 성경을 끼고 살며 도덕과 신앙을 말하지만, 바다에 나간 선원들의 고혈을 짜내고 고래를 난도질해 돈을 버는 위선자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온순해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얄팍하고 비겁합니다.
반면 에이해브는 지독하리만큼 정직합니다. 그는 자신이 악마와 손을 잡을지언정, 비겁하게 신의 뒤에 숨거나 타협하지 않습니다.
멜빌은 얄팍한 도덕률 안에서 타협하며 사는 평범한 인간들보다, 차라리 자기 파멸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한계(인간의 운명)를 시험하기 위해 끝까지 질주하는 거인의 모습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엄청난 심연과 위대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주체성
그냥 평범한 고래잡이 선장들이라면 고래에게 다리를 잃었을 때 "재수가 없었다"며 은퇴하거나, 그저 먹고살기 위해 다시 배를 탈 것입니다. 고통을 그저 '우연한 사고'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하지만 에이해브는 자신의 고통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그는 모비 딕이라는 하얀 고래에게 인간이 겪는 모든 보이지 않는 고통과 악의 상징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내가 저놈을 침으로써, 인간을 영원히 가두고 괴롭히는 우주의 장벽을 부숴버리겠다."
비록 그 수단이 광기와 파멸일지라도,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 거대한 우주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과 맞장뜨겠다는 의지 자체가 인간을 단순한 '동물'이나 '희생양'이 아닌 '주체적인 투쟁가'로 격상시키는 순간입니다.
"비록 패배할지라도, 나는 나로서 싸우다 죽겠다."
에이해브는 도덕적으로 본받아야 할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타인까지 파멸로 이끄는 위험하고 독선적인 괴물입니다.
하지만 멜빌이 에이해브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 존엄성의 극단'은,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영혼만큼은 절대 강제로 무릎 꿇릴 수 없다는 인간 정신의 절대적 불가침성입니다. 에이해브는 결국 고래에게 끌려가 바닷속으로 사라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채 당당히 소멸합니다.
왜 문학평론가들이 에이해브를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에게 불을 훔쳐다 주고 영원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하는지, 이제 압니다.
잔해
노예의 발꿈치와 말굽에 잔뜩 파인 흔해 빠진 도로를, 길로 뒤덮인 땅을 얼마나 경멸했던가!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떤 흔적도 용납하지 않는 바다의 도량을 찬미했다.
『모비 딕 - 상』 13. 외바퀴 수레.,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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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마엘이 왜 그토록 바다를 갈망했는지, 그리고 멜빌이 생각하는 '바다'와 '육지'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가장 감각적이고 철학적으로 보여주는 문장
1. 문장의 의미 분석
① "노예의 발꿈치와 말굽에 잔뜩 파인 흔해 빠진 도로" (육지의 억압)
육지의 상징: 육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규격화된 사회입니다. '도로'는 이미 누군가 닦아놓은 길이며, 그 길 위를 걷는 존재들은 "노예"와 노동에 시달리는 "말(말굽)"로 비유됩니다.
즉, 육지는 사회적 계급, 구속, 의무, 억압, 그리고 쳇바퀴 도는 고단한 일상을 의미. 이슈마엘은 모든 사람이 정해진 궤도(도로)로만 움직여야 하는 문명사회의 획일성과 답답함을 극도로 경멸했던 것입니다.
② "어떤 흔적도 용납하지 않는 바다의 도량" (바다의 절대적 자유)
바다는 아무리 배가 지나가도 그 뒤에 영구적인 길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거품을 일으키며 파도가 치고 나면 다시 완전한 무(無)의 상태, 즉 날것 그대로의 야생이자 자유로 돌아갑니다.
바다는 사회적 지위나 과거의 흔적(상처, 낙인, 신분)을 모두 깨끗이 지워버리는 공간입니다. 백인이든 야만인이든, 왕자든 부랑자든 바다 앞에서는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이슈마엘은 이 모든 차별과 굴레를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바다의 위대하고 넓은 도량(자유)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2. 멜빌이 이 대목을 쓴 의도
첫째, '문명적 자아'의 완전한 탈피
이슈마엘은 지상에서 쌓인 우울함과 답답함을 떨쳐내기 위해 바다로 왔습니다. 정기선 모스호가 드넓은 바다로 미끄러져 나가는 순간, 그는 비로소 육지가 주던 정신적 감옥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로운 단독자'로서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둘째, 퀴퀘그와의 수평적 연대의 배경
만약 이들이 육지의 도로 위에 있었다면, 기독교인 백인과 문신을 한 야만인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흔적(선입견)도 용납하지 않는 바다" 위로 나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문명의 편견을 벗어던지고 온전한 인간 대 인간으로 결합할 수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멜빌은 이 구절을 통해 "누군가 닦아놓은 억압적인 길(육지)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항로를 개척해야 하는 무한한 자유의 공간(바다)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해방감"을 강렬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화면 속에서 이 문장을 마주하셨을 때 느껴진 그 가슴 벅찬 해방감이 바로 멜빌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날것의 공기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여섯모서리
진정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선 철학적으로 살거나 살려고 애쓰는 것에 대해 의식하지 말아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모비 딕 - 상』 10.소중한 친구,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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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아무리 완고한 편견이라도 사랑으로 구부리자고 들면 얼마나 부드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모비 딕 - 상』 11. 잠옷,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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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위트와 풍자>
조지 워싱톤이 식인종으로 성장했으면 퀴퀘그가 되었을 것이다. - 10. 소중한 친구
향유 바른 머리를 이발사에게 가발걸이로 팔아 버린 후 - 13. 외바퀴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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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멜빌이 이 장을 쓴 작가의 메세지
첫째,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도 전복
멜빌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누가 진짜 야만인인가?" 겉으로는 교양 있어 보이지만 탐욕스럽고 사악하게 살아가는 기독교 문명인들과, 문신을 새긴 식인종이지만 영혼만큼은 황제처럼 고결하고 이타적인 퀴퀘그를 대조시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서구 사회의 제국주의적 오만을 비판합니다.
둘째, 퀴퀘그라는 인물의 신화적 격상
퀴퀘그를 단순히 '이색적인 동반자' 수준에 머물게 하지 않고, 표트르 대제에 비유하거나 "바다의 웨일스 공(황태자)"으로 묘사함으로써 그에게 신화적이고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을 부여합니다.
셋째, 이슈마엘과의 영적 결속 강화
기독교 문명에 환멸을 느끼고 "어딜 가나 전부 사악한 세상이라고, 이교도로 살다 죽겠노라"고 다짐한 퀴퀘그의 상처를 이슈마엘이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이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공동 운명체로서 피쿼드호라는 거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12장은 퀴퀘그가 고향의 순수함을 잃지 않기 위해 오히려 백인들의 종교를 거부하고 "스스로 순수한 이교도로 남겠다"고 선언하는 역설이 그려진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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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외바퀴 수레 (Wheelbarrow)
이슈마엘과 퀴퀘그가 뉴베드퍼드를 떠나 고래잡이의 본고장인 '낸터컷'으로 향하는 정기선(모스호) 안에서의 소동과 모험.
문명인들의 편협함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인류애에 대한 묵직한 주제 의식
① 세상을 살아가는 고달픔에 대한 통찰
"원양을 누비던 길고 위험한 항해가 끝나면 두 번째가 시작되고,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며, 그렇게 한없이 계속되는 법. 아무렴, 세상의 노고란 모두 그렇게 끝이 없고 고달픈 것이다."
항구에서 다음 항해를 준비하는 배들을 보며 이슈마엘이 던지는 독백. 끝없는 고래잡이 항해는 곧 '끝나지 않는 인간 삶의 굴레와 노동의 고단함'.
② 편견에 사로잡힌 문명인들을 향한 일침
"그들은 백인이 회칠을 한 검둥이보다 더 고상한 존재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둘이 그렇게 사이좋게 어우러진 모습을 신신기한 듯 쳐다봤다."
피부색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 문명인들의 얄팍하고 편협한 가시성을 폭로합니다.
③ 13장의 가장 위대한 깨달음 (인류 공동체 선언)
"세상은 공동 자본으로 세운 주식회사 같은 거야. 어딜 가나 마찬가지야. 우리 식인종은 이 기독교도들을 도와줘야 해."
자신을 놀리던 백인 풋내기가 물에 빠지자, 퀴퀘그는 주저 없이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어 그의 목숨을 구합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파이프를 피우며 속으로 이 생각을 하죠. 이 문장은 "인류는 종교나 인종을 떠나 서로를 돕고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공동 운명체"라는 거대한 인류애를 식인종의 입을 통해 가장 순수하게 선포.
2. 작가의 메시지
첫째, '외바퀴 수레'와 '펀치 볼' 일화를 통한 문화적 상대성 풍자
퀴퀘그는 외바퀴 수레를 쓸 줄 몰라 어깨에 짊어지고 갔고, 백인 선장은 퀴퀘그 고향의 신성한 혼례용 펀치 볼(음료 항아리)을 손 씻는 '핑거볼'로 착각해 무례를 범했습니다.
멜빌은 이 두 가지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대조시키며, "낯선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저지르는 실수는 야만인이나 문명인이나 똑같다". 백인들이 야만인의 무지를 비웃을 자격이 없음을 풍자.
둘째, 진짜 '기독교적 정신'의 역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것은 기독교인 선원들이 아니라, 그들이 '식인종', '악마'라며 배척하던 야만인 퀴퀘그였습니다. 입으로만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외치는 문명인들보다, 묵묵히 행동으로 생명을 구하는 야만인이 훨씬 더 참된 기독교적 가치(이웃 사랑)를 실천하고 있다"는 메시지.
셋째, 이슈마엘의 완전한 정신적 귀속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도 어떠한 생색도 내지 않는 퀴퀘그를 보며 이슈마엘은
"그때부터 나는 따개비처럼 퀴퀘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고 말합니다.
이슈마엘은 이제 완전히 문명사회의 편견을 탈피했으며, 퀴퀘그라는 위대한 영혼과 영원한 동반자(공동 운명체)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입니다.
13장은 퀴퀘그의 압도적인 육체적·정신적 영웅성이 빛나는 장이며, 우리에게 "과연 교양이 인간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편견 없는 순수한 인류애가 인간을 구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서설
15장 차우더(Chowder)
'조개(Clam)'와 '대구(Cod)'의 대비, 그리고 허스이 부인(Mrs. Hussey)이 주문을 엉뚱하게 받거나 바꾸어 주는 소동 속 숨겨진 문학적 의미.
1. 조개와 대구의 대비가 가진 의미: "운명과 삶의 본질"
멜빌은 모스호에서 내린 두 사람이 낸터컷의 '여인숙(Try Pots)'에 도착했을 때, 온통 조개 껍데기와 대구 뼈로 뒤덮인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두 식재료를 통해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운명을 대비시킵니다.
조개(Clam) — 바닥에 단단히 고착된 삶 (숙명론):
조개는 모래바닥에 스스로를 묻고 한자리에 정착해 살아가는 생물입니다. 이는 육지에서의 삶, 혹은 자신의 한계와 정해진 운명(숙명)에 순응하며 닫혀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대구(Cod) — 드넓은 심연을 헤엄치는 삶 (자유와 투쟁):
대구는 차갑고 깊은 거친 바다를 끊임없이 헤엄치는 회유어입니다. 이는 앞으로 피쿼드호가 맞이할 드넓은 바다로의 여정,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 그리고 거친 운명에 맞서 싸우는 역동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고래(Moby Dick)라는 거대한 심연의 존재를 마주하기 전 단계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2. 부인이 주문을 마음대로 주고, 나중에 바꾸어 준 것의 의미
방장님이 짚어주신 "대구를 묻는데도 조개로 주고, 나중에 대구라고 강조하자 대구로 바꾸어 주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철학적 알레고리(비유) 중 하나입니다.
① '예측 불가능한 운명'의 의인화, 허스이 부인
여인숙 주인인 허스이 부인은 손님이 무엇을 원하든 자기 마음대로 음식을 내어줍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항해)에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거대한 운명의 장난"을 뜻합니다.
인간은 "대구(자유/도전)"를 원하며 바다로 나왔지만, 운명은 우리에게 "조개(정체/고착)"를 툭 던져주며 길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허스이 부인의 제멋대로인 서빙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과 초자연적인 힘을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② "조개"에서 "대구"로의 점진적 전환: 항해의 서막
두 사람이 처음 먹은 '조개 차우더'는 아직 그들이 육지의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안전한 포구의 질서에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결국 "대구로 주세요!"라고 주문을 관철하고 나서 '대구 차우더'를 먹게 되는 과정은, 이슈마엘과 퀴퀘그가 마침내 육지의 안전함(조개)을 완전히 털어내고 거친 심연의 세계(대구)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음을 식사라는 행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③ 퀴퀘그의 작살과 대구 머리
이 장에서 퀴퀘그는 숟가락 대신 자신의 작살을 이용해 대구 머리를 정교하게 건져 먹습니다. 멜빌은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앞으로 닥쳐올 거친 바다의 운명(대구)을 길들이고 정복할 진짜 영웅은 바로 이 야만인 작살잡이 퀴퀘그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암시합니다.
요약하자면
멜빌은 15장 '차우더'를 통해 단순히 배를 채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제부터 마주할 바다는 조개처럼 안전하게 닫힌 세계가 아니라, 대구처럼 깊고 거친 심연이다. 운명(허스이 부인)이 너희에게 무엇을 던져주든, 너희는 퀴퀘그의 작살처럼 단단한 무기를 들고 그 운명을 맛보아야 한다."
라는 메시지를 아주 맛있고 사뭇 진지한 '차우더 한 그릇'에 녹여낸 것입니다.

서설
1. "멍청이(Chowder-head)"는 차우더 머리?
영어 표현 중에 'Chowder-head'는 바보, 멍청이,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놀리는 말.
멜빌은 온통 차우더 냄새로 진동하는 낸터컷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이곳 사람들의 머릿속도 온통 차우더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유머.
2. 냄비라는 뜻의 여관 이름과 '생선'으로 가득 찬 세상
이 여관의 이름은 '가마솥 여인숙(Try Pots)'인데, 여기서 'Try pot'은 고래 기름을 짜내기 위해 배 위에 설치하는 거대한 가마솥(냄비). 여관 이름부터 이미 고래잡이의 운명을 상징.
차우더(생선찌개)만 먹다 보니 내 몸이 생선 그 자체가 되어 가시가 돋아날 것 같다는 이슈마엘의 유쾌한 과장
대구 목걸이, 상어가죽 장부, 심지어 육지의 동물인 암소마저 생선 대가리를 먹고, 도로의 말굽(편자)에는 편자 대신 대구 대가리가 박혀서 덜커덕거립니다.
멜빌은 이 기괴하고도 재미있는 묘사를 통해 "이곳은 육지의 법칙이 통하지 않으며, 모든 만물이 바다와 생선의 질서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동화된 세계"임을 보여줍니다. 낸터컷은 이미 육지가 아니라, 바다 그 자체인 셈입니다.
3. 작살을 방에 못 가지고 가게 하는 허스이 부인의 트라우마
"진짜 고래잡이는 잘 때도 작살을 품고 자는 법"이라며 우기는 퀴퀘그.
과거 '네이선 콜먼'이라는 고래잡이가 방에 작살을 가지고 들어갔다가, 그가 작살 위에 쓰러져 죽어 있는 끔찍한 사고.
앞으로 피쿼드호에서 벌어질 '작살(무기)이 가져올 비극적인 파멸과 죽음'을 예고하는 복선. 작살은 고래를 잡는 도구이지만, 결국 인간 스스로를 찌르는 파멸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허스이 부인의 입을 통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4. "대구, 조개 둘 다 주세요"와 "훈제청어(Red Herring)"의 의미
마지막에 두 사람이 "대구와 조개 차우더를 둘 다 달라"고 주문하고, 거기에 훈제청어까지 곁들이는 장면 역시 깊은 문학적 의미.
둘 다 달라는 것의 의미 (운명의 포용): 앞서 말씀드렸듯 조개(육지의 고착)와 대구(바다의 심연)는 대조적인 운명. 이 두 가지를 "둘 다 주세요"라고 해서 맛있게 먹어 치우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운명(안전함이든, 거친 폭풍이든)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두 사람의 단단한 결의를 상징합니다.
훈제청어(Red Herring)의 진짜 의미:
영어에서 'Red Herring(훈제청어)'은 아주 유명한 관용구로,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속임수, 혹은 가짜 단서"를 뜻합니다. (사냥개를 유혹하기 위해 냄새가 강한 훈제청어를 바닥에 문질러 사냥 경로를 방해했던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멜빌이 이 유치하고 유쾌한 음식 소동 속에 온갖 철학적이고 무거운 상징들을 숨겨두었지만, 독자들에게 "이건 그저 가벼운 저녁 식사 에피소드(Red Herring, 가짜 단서)일 뿐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는 위트.
15장 은 "온통 생선 냄새로 가득 찬 낸터컷(바다의 세계)에서, 인간의 부질없는 무기(작살)를 내려놓고, 운명이 던져주는 모든 맛(조개와 대구)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본격적인 항해를 준비하는 유쾌하고도 엄숙한 전야제.
여섯모서리
15장 '차우더'와 16장 '배'의 연결점
15장에서 허스이 부인이 주문을 제멋대로 받고, 대구와 조개가 뒤섞이는 소동은 단순한 유머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엇을 주문하든(원하든), 환경과 운명은 자기 마음대로 차우더를 내놓습니다. 낸터컷이라는 공간 자체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곳임을 보여줍니다.
16장으로의 전이
음식을 먹을 때까지는 유쾌했던 이스마엘이, 배를 고르는 문제에 직면하자 '합리주의자'로서의 자아가 발동합니다. 그는 퀴퀘그의 종교적 행동(라마단 금식)을 "멍청한 짓"이라 생각하며 자기 고집대로 배를 선택하려 하지만, 결국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합리적이고 광기 어린 선장(에이해브)의 배에 스스로 걸어 들어갑니다.
"나는 내 뜻대로 하고 있다"고 믿는 인간(이스마엘)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인 운명의 그물망(요조의 신탁)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잔인한 코미디입니다.
16장 배 the ship
"너는 우연처럼 그 배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이미 배를 골라놨다. 이스마엘 네가 혼자 가면, 너는 필연적으로(infallibly) 그 배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퀴퀘그는 "배를 고르는 일은 전적으로 이스마엘(너) 혼자 해야 한다(rest wholly with me)"고 자신의 우상 요조가 주장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마엘은 이 계획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did not like that plan at all)." 그는 베테랑인 퀴퀘그의 안목에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퀴퀘그의 '라마단(Ramadan)'
유쥬(요조)가 이스마엘을 혼자 보내기 위해 쓴 구체적인 장치가 바로 제17장에 나오는 퀴퀘그의 '라마단(금식과 명상)'입니다.
결국 이스마엘은 퀴퀘그의 고집(혹은 미신)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혼자 항구로 향합니다.
이미 점찍어둔 '죽음의 배'로 이스마엘의 발걸음이 정확히 인양됨. (숙명에 포획됨)
결과적으로 그가 고른 배가 운명이 정해둔 파멸의 배 '피쿼드호'였다는 것이 아이러니.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지성과 자유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려 해도, 결국 거대한 운명의 시나리오 안인가?'
<15장과 16장의 '선택'을 관통하는 진리.>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선택당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기다렸다면 비극은 피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자신의 지성(합리주의)을 믿었기에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거대한 운명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가"

kontentree
16장 배
" 몇 번이나 시도해 봤음에도 퀴퀘그의 기도서와 39개항은 도무지 숙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9개항 (The Thirty-Nine Articles) 이란 무엇이기에 퀴퀘그의 기도서와 함께 놓여야만 하나?
영국 성공회의 '39개항 신앙 교리'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성공회의 독자적인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만든 공식 신조입니다.
이 교리는 예정설, 성찬례, 교회의 권위 등 인간의 머리로는 쉽게 납득하기 힘든 지극히 복잡하고 추상적인 신학적 논쟁과 도그마(독단적 교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둘 다 똑같이 난해하고 불합리하다"
이슈마엘은 문명인(기독교인)의 관점에서 퀴퀘그가 작은 나무 인형(요조)을 앞에 두고 하루 종일 굶으며 읊조리는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미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멜빌은 여기서 기발하고 냉소적인 대비를 시도합니다.
"야만인 퀴퀘그가 믿는 기괴한 기도문이나, 너희 문명인들이 가장 엄숙하고 정교하다고 자랑하는 '성공회 39개항 교리'나,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라며 문명의 위선을 꼬집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신비(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한계와 맹목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허무주의적 깨달음입니다.

kontentree
배 이름 피쿼트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고대 메디아 제국처럼 절멸한 매세추세츠에 위치한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명확합니다.
웅장하고 강력했던 거대 제국(미디아)이나,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맹위를 떨치던 용맹한 부족(피쿼트)이나,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했어도 정복 당한 후 독자적인 정체성과 문화가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엄혹한 운명론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화려한 뼈 장식과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지만 결국 흔적도 없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피쿼드호의 운명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는 비유는 없을 것입니다.
잔해
풍상을 겪은 낡은 선체의 빛깔은 흡사 이집트와 시베리아 전투에 모두 참전한 프랑스 척탄병처럼 검게 그을었다
『모비 딕 - 상』 16. 배 피쿼드호,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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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kontentree
16장을 읽다 보면 의아한 문장이 나옵니다.
"새로 세웠다는 돛대들은 쾰른 삼성왕(三聖王)의 등뼈처럼 꼿꼿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의 등뼈가 왜 이렇게 꼿꼿하다는 거지?하고 갸우뚱한데요. 번역의 한계가 만든 오역에 가까워요. 6장에 이어 16장에서도요.
"쾰른의 세 왕(The Kings of Cologne)"은 단순한 성경 속 인물이 아니라, 쾰른 대성당 그 자체와 그 안에 안치된 성골함을 가리키는 거대한 문화적 아이콘
원문 : "Spines of the three kings of Cologne"
'쾰른 삼성왕의 등뼈'는 실제 사람의 척추가 아닙니다. 유럽 고딕 건축의 정수인 '독일 쾰른 대성당'의 장엄한 내부 기둥들과 지붕을 곧게 가로지르는 웅장한 아치형 뼈대(Spine)를 비유한 것입니다. (쾰른 대성당은 '동방박사 3인의 성골함'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성당이라 영미권에서는 이렇게도 불립니다.)
돛대가 "쾰른 대성당의 대들보와 기둥들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서설
늙은 갑판은 베케트가 피를 흘린 자리에서 순례자들이 경배를 올리는 캔터베리 대성당의 포석만큼이나 닳고 주름이 졌다
『모비 딕 - 상』 16.배. Thomas Becket에 대하여,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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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토마스 베케트는 12세기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 성직자이자,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순교자 중 한 명입니다.
재밌는 점은, 그가 처음부터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국왕 헨리 2세(Henry II)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왕의 명령을 받들어 세속적인 정치를 도맡아 하던 영리한 대법관(Chancellor)이었습니다.
친구가 교회를 장악해 주길 원했던 헨리 2세는 그를 영국의 최고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앉힙니다. 하지만 대주교가 된 베케트는 왕의 기대와 달리 "이제 나는 왕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겠다"라며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해 왕과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갈등은 1164년 헨리 2세가 발표한 클라렌던 헌장(Constitutions of Clarendon)이라는 정책 때문에 폭발했습니다.
가장 갈등이 컸던 법안 (교회 재판권 박탈): 당시에는 성직자가 살인, 강도 등 무거운 죄를 지어도 일반 법정이 아닌 '교회 법정'에서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나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헨리 2세는 "죄를 지은 성직자도 일반 세상 법정에 세워 처벌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베케트 대주교는 교회의 독립성과 성직자의 특권을 수호하겠다며 이 정책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교회의 신성한 권리를 침해하는 왕의 오만이라고 보았습니다.
몇 년간의 망명과 갈등 끝에 베케트가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대한 주교들을 파문하자, 헨리 2세는 극도로 분노해 폭발하고 맙니다. 궁정에서 왕이 홧김에 내뱉은 이 한마디가 화근이었습니다.
"저 비열한 사제 놈 하나를 내 앞에서 치워줄 자가 이 궁정에는 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이 말을 진짜 국왕의 명령으로 오해한 네 명의 기사들이 곧장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1170년 12월 29일, 성스러운 성당의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리려던 베케트 대주교의 정수리를 칼로 내리쳐 참혹하게 살해했습니다.
베케트가 살해당한 후 "수많은 순례자의 손길과 무릎에 닳아버린 캔터베리 대성당의 핏자국 바닥처럼, 피쿼드호의 거친 갑판 역시 수십 년간 고래의 피가 흐르고 선원들의 거친 발길에 짓밟혀 그토록 깊고 불길한 주름이 파여 있었다."
이 배가 앞으로 겪게 될 광신적인 폭주(에이해브의 복수)와 피비린내 나는 비극적 제사를 암시하는 복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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