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D-29
15장 차우더(Chowder) '조개(Clam)'와 '대구(Cod)'의 대비, 그리고 허스이 부인(Mrs. Hussey)이 주문을 엉뚱하게 받거나 바꾸어 주는 소동 속 숨겨진 문학적 의미. 1. 조개와 대구의 대비가 가진 의미: "운명과 삶의 본질" 멜빌은 모스호에서 내린 두 사람이 낸터컷의 '여인숙(Try Pots)'에 도착했을 때, 온통 조개 껍데기와 대구 뼈로 뒤덮인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두 식재료를 통해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운명을 대비시킵니다. 조개(Clam) — 바닥에 단단히 고착된 삶 (숙명론): 조개는 모래바닥에 스스로를 묻고 한자리에 정착해 살아가는 생물입니다. 이는 육지에서의 삶, 혹은 자신의 한계와 정해진 운명(숙명)에 순응하며 닫혀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대구(Cod) — 드넓은 심연을 헤엄치는 삶 (자유와 투쟁): 대구는 차갑고 깊은 거친 바다를 끊임없이 헤엄치는 회유어입니다. 이는 앞으로 피쿼드호가 맞이할 드넓은 바다로의 여정,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 그리고 거친 운명에 맞서 싸우는 역동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고래(Moby Dick)라는 거대한 심연의 존재를 마주하기 전 단계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2. 부인이 주문을 마음대로 주고, 나중에 바꾸어 준 것의 의미 방장님이 짚어주신 "대구를 묻는데도 조개로 주고, 나중에 대구라고 강조하자 대구로 바꾸어 주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철학적 알레고리(비유) 중 하나입니다. ① '예측 불가능한 운명'의 의인화, 허스이 부인 여인숙 주인인 허스이 부인은 손님이 무엇을 원하든 자기 마음대로 음식을 내어줍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항해)에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거대한 운명의 장난"을 뜻합니다. 인간은 "대구(자유/도전)"를 원하며 바다로 나왔지만, 운명은 우리에게 "조개(정체/고착)"를 툭 던져주며 길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허스이 부인의 제멋대로인 서빙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과 초자연적인 힘을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② "조개"에서 "대구"로의 점진적 전환: 항해의 서막 두 사람이 처음 먹은 '조개 차우더'는 아직 그들이 육지의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안전한 포구의 질서에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결국 "대구로 주세요!"라고 주문을 관철하고 나서 '대구 차우더'를 먹게 되는 과정은, 이슈마엘과 퀴퀘그가 마침내 육지의 안전함(조개)을 완전히 털어내고 거친 심연의 세계(대구)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음을 식사라는 행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③ 퀴퀘그의 작살과 대구 머리 이 장에서 퀴퀘그는 숟가락 대신 자신의 작살을 이용해 대구 머리를 정교하게 건져 먹습니다. 멜빌은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앞으로 닥쳐올 거친 바다의 운명(대구)을 길들이고 정복할 진짜 영웅은 바로 이 야만인 작살잡이 퀴퀘그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암시합니다. 요약하자면 멜빌은 15장 '차우더'를 통해 단순히 배를 채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제부터 마주할 바다는 조개처럼 안전하게 닫힌 세계가 아니라, 대구처럼 깊고 거친 심연이다. 운명(허스이 부인)이 너희에게 무엇을 던져주든, 너희는 퀴퀘그의 작살처럼 단단한 무기를 들고 그 운명을 맛보아야 한다." 라는 메시지를 아주 맛있고 사뭇 진지한 '차우더 한 그릇'에 녹여낸 것입니다.
1. "멍청이(Chowder-head)"는 차우더 머리? 영어 표현 중에 'Chowder-head'는 바보, 멍청이,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놀리는 말. 멜빌은 온통 차우더 냄새로 진동하는 낸터컷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이곳 사람들의 머릿속도 온통 차우더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유머. 2. 냄비라는 뜻의 여관 이름과 '생선'으로 가득 찬 세상 이 여관의 이름은 '가마솥 여인숙(Try Pots)'인데, 여기서 'Try pot'은 고래 기름을 짜내기 위해 배 위에 설치하는 거대한 가마솥(냄비). 여관 이름부터 이미 고래잡이의 운명을 상징. 차우더(생선찌개)만 먹다 보니 내 몸이 생선 그 자체가 되어 가시가 돋아날 것 같다는 이슈마엘의 유쾌한 과장 대구 목걸이, 상어가죽 장부, 심지어 육지의 동물인 암소마저 생선 대가리를 먹고, 도로의 말굽(편자)에는 편자 대신 대구 대가리가 박혀서 덜커덕거립니다. 멜빌은 이 기괴하고도 재미있는 묘사를 통해 "이곳은 육지의 법칙이 통하지 않으며, 모든 만물이 바다와 생선의 질서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동화된 세계"임을 보여줍니다. 낸터컷은 이미 육지가 아니라, 바다 그 자체인 셈입니다. 3. 작살을 방에 못 가지고 가게 하는 허스이 부인의 트라우마 "진짜 고래잡이는 잘 때도 작살을 품고 자는 법"이라며 우기는 퀴퀘그. 과거 '네이선 콜먼'이라는 고래잡이가 방에 작살을 가지고 들어갔다가, 그가 작살 위에 쓰러져 죽어 있는 끔찍한 사고. 앞으로 피쿼드호에서 벌어질 '작살(무기)이 가져올 비극적인 파멸과 죽음'을 예고하는 복선. 작살은 고래를 잡는 도구이지만, 결국 인간 스스로를 찌르는 파멸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허스이 부인의 입을 통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4. "대구, 조개 둘 다 주세요"와 "훈제청어(Red Herring)"의 의미 마지막에 두 사람이 "대구와 조개 차우더를 둘 다 달라"고 주문하고, 거기에 훈제청어까지 곁들이는 장면 역시 깊은 문학적 의미. 둘 다 달라는 것의 의미 (운명의 포용): 앞서 말씀드렸듯 조개(육지의 고착)와 대구(바다의 심연)는 대조적인 운명. 이 두 가지를 "둘 다 주세요"라고 해서 맛있게 먹어 치우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운명(안전함이든, 거친 폭풍이든)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두 사람의 단단한 결의를 상징합니다. 훈제청어(Red Herring)의 진짜 의미: 영어에서 'Red Herring(훈제청어)'은 아주 유명한 관용구로,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속임수, 혹은 가짜 단서"를 뜻합니다. (사냥개를 유혹하기 위해 냄새가 강한 훈제청어를 바닥에 문질러 사냥 경로를 방해했던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멜빌이 이 유치하고 유쾌한 음식 소동 속에 온갖 철학적이고 무거운 상징들을 숨겨두었지만, 독자들에게 "이건 그저 가벼운 저녁 식사 에피소드(Red Herring, 가짜 단서)일 뿐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는 위트. 15장 은 "온통 생선 냄새로 가득 찬 낸터컷(바다의 세계)에서, 인간의 부질없는 무기(작살)를 내려놓고, 운명이 던져주는 모든 맛(조개와 대구)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본격적인 항해를 준비하는 유쾌하고도 엄숙한 전야제.
15장 '차우더'와 16장 '배'의 연결점 15장에서 허스이 부인이 주문을 제멋대로 받고, 대구와 조개가 뒤섞이는 소동은 단순한 유머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엇을 주문하든(원하든), 환경과 운명은 자기 마음대로 차우더를 내놓습니다. 낸터컷이라는 공간 자체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곳임을 보여줍니다. 16장으로의 전이 음식을 먹을 때까지는 유쾌했던 이스마엘이, 배를 고르는 문제에 직면하자 '합리주의자'로서의 자아가 발동합니다. 그는 퀴퀘그의 종교적 행동(라마단 금식)을 "멍청한 짓"이라 생각하며 자기 고집대로 배를 선택하려 하지만, 결국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합리적이고 광기 어린 선장(에이해브)의 배에 스스로 걸어 들어갑니다. "나는 내 뜻대로 하고 있다"고 믿는 인간(이스마엘)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인 운명의 그물망(요조의 신탁)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잔인한 코미디입니다. 16장 배 the ship "너는 우연처럼 그 배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이미 배를 골라놨다. 이스마엘 네가 혼자 가면, 너는 필연적으로(infallibly) 그 배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퀴퀘그는 "배를 고르는 일은 전적으로 이스마엘(너) 혼자 해야 한다(rest wholly with me)"고 자신의 우상 요조가 주장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마엘은 이 계획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did not like that plan at all)." 그는 베테랑인 퀴퀘그의 안목에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퀴퀘그의 '라마단(Ramadan)' 유쥬(요조)가 이스마엘을 혼자 보내기 위해 쓴 구체적인 장치가 바로 제17장에 나오는 퀴퀘그의 '라마단(금식과 명상)'입니다. 결국 이스마엘은 퀴퀘그의 고집(혹은 미신)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혼자 항구로 향합니다. 이미 점찍어둔 '죽음의 배'로 이스마엘의 발걸음이 정확히 인양됨. (숙명에 포획됨) 결과적으로 그가 고른 배가 운명이 정해둔 파멸의 배 '피쿼드호'였다는 것이 아이러니.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지성과 자유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려 해도, 결국 거대한 운명의 시나리오 안인가?' <15장과 16장의 '선택'을 관통하는 진리.>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선택당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기다렸다면 비극은 피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자신의 지성(합리주의)을 믿었기에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거대한 운명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가"
16장 배 " 몇 번이나 시도해 봤음에도 퀴퀘그의 기도서와 39개항은 도무지 숙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9개항 (The Thirty-Nine Articles) 이란 무엇이기에 퀴퀘그의 기도서와 함께 놓여야만 하나? 영국 성공회의 '39개항 신앙 교리'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성공회의 독자적인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만든 공식 신조입니다. 이 교리는 예정설, 성찬례, 교회의 권위 등 인간의 머리로는 쉽게 납득하기 힘든 지극히 복잡하고 추상적인 신학적 논쟁과 도그마(독단적 교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둘 다 똑같이 난해하고 불합리하다" 이슈마엘은 문명인(기독교인)의 관점에서 퀴퀘그가 작은 나무 인형(요조)을 앞에 두고 하루 종일 굶으며 읊조리는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미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멜빌은 여기서 기발하고 냉소적인 대비를 시도합니다. "야만인 퀴퀘그가 믿는 기괴한 기도문이나, 너희 문명인들이 가장 엄숙하고 정교하다고 자랑하는 '성공회 39개항 교리'나,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라며 문명의 위선을 꼬집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신비(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한계와 맹목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허무주의적 깨달음입니다.
배 이름 피쿼트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고대 메디아 제국처럼 절멸한 매세추세츠에 위치한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명확합니다. 웅장하고 강력했던 거대 제국(미디아)이나,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맹위를 떨치던 용맹한 부족(피쿼트)이나,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했어도 정복 당한 후 독자적인 정체성과 문화가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엄혹한 운명론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화려한 뼈 장식과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지만 결국 흔적도 없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피쿼드호의 운명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는 비유는 없을 것입니다.
풍상을 겪은 낡은 선체의 빛깔은 흡사 이집트와 시베리아 전투에 모두 참전한 프랑스 척탄병처럼 검게 그을었다
모비 딕 - 상 16. 배 피쿼드호,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16장을 읽다 보면 의아한 문장이 나옵니다. "새로 세웠다는 돛대들은 쾰른 삼성왕(三聖王)의 등뼈처럼 꼿꼿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의 등뼈가 왜 이렇게 꼿꼿하다는 거지?하고 갸우뚱한데요. 번역의 한계가 만든 오역에 가까워요. 6장에 이어 16장에서도요. "쾰른의 세 왕(The Kings of Cologne)"은 단순한 성경 속 인물이 아니라, 쾰른 대성당 그 자체와 그 안에 안치된 성골함을 가리키는 거대한 문화적 아이콘 원문 : "Spines of the three kings of Cologne" '쾰른 삼성왕의 등뼈'는 실제 사람의 척추가 아닙니다. 유럽 고딕 건축의 정수인 '독일 쾰른 대성당'의 장엄한 내부 기둥들과 지붕을 곧게 가로지르는 웅장한 아치형 뼈대(Spine)를 비유한 것입니다. (쾰른 대성당은 '동방박사 3인의 성골함'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성당이라 영미권에서는 이렇게도 불립니다.) 돛대가 "쾰른 대성당의 대들보와 기둥들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늙은 갑판은 베케트가 피를 흘린 자리에서 순례자들이 경배를 올리는 캔터베리 대성당의 포석만큼이나 닳고 주름이 졌다
모비 딕 - 상 16.배. Thomas Becket에 대하여,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토마스 베케트는 12세기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 성직자이자,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순교자 중 한 명입니다. 재밌는 점은, 그가 처음부터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국왕 헨리 2세(Henry II)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왕의 명령을 받들어 세속적인 정치를 도맡아 하던 영리한 대법관(Chancellor)이었습니다. 친구가 교회를 장악해 주길 원했던 헨리 2세는 그를 영국의 최고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앉힙니다. 하지만 대주교가 된 베케트는 왕의 기대와 달리 "이제 나는 왕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겠다"라며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해 왕과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갈등은 1164년 헨리 2세가 발표한 클라렌던 헌장(Constitutions of Clarendon)이라는 정책 때문에 폭발했습니다. 가장 갈등이 컸던 법안 (교회 재판권 박탈): 당시에는 성직자가 살인, 강도 등 무거운 죄를 지어도 일반 법정이 아닌 '교회 법정'에서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나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헨리 2세는 "죄를 지은 성직자도 일반 세상 법정에 세워 처벌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베케트 대주교는 교회의 독립성과 성직자의 특권을 수호하겠다며 이 정책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교회의 신성한 권리를 침해하는 왕의 오만이라고 보았습니다. 몇 년간의 망명과 갈등 끝에 베케트가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대한 주교들을 파문하자, 헨리 2세는 극도로 분노해 폭발하고 맙니다. 궁정에서 왕이 홧김에 내뱉은 이 한마디가 화근이었습니다. "저 비열한 사제 놈 하나를 내 앞에서 치워줄 자가 이 궁정에는 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이 말을 진짜 국왕의 명령으로 오해한 네 명의 기사들이 곧장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1170년 12월 29일, 성스러운 성당의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리려던 베케트 대주교의 정수리를 칼로 내리쳐 참혹하게 살해했습니다. 베케트가 살해당한 후 "수많은 순례자의 손길과 무릎에 닳아버린 캔터베리 대성당의 핏자국 바닥처럼, 피쿼드호의 거친 갑판 역시 수십 년간 고래의 피가 흐르고 선원들의 거친 발길에 짓밟혀 그토록 깊고 불길한 주름이 파여 있었다." 이 배가 앞으로 겪게 될 광신적인 폭주(에이해브의 복수)와 피비린내 나는 비극적 제사를 암시하는 복선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질병에 불과한 것을.
모비 딕 - 상 16.배,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집착, 광기, 치유되지 않는 상처, 혹은 극단적인 우울함 같은 내면의 '질병(결함)'. 정신적·육체적 균열이야말로 인간을 평범함 너머의 '위대함'으로 밀어 붙일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에이해브가 앞으로 보여줄 파멸적인 광기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고귀한 형태의 투쟁(위대함)이 될 것임을 독자에게 미리 선언 하네요.
수염조차 넘침이 없어서 챙 넓은 모자의 닳아 빠진 보풀마냥 그의 턱에 보풀 같은 수염만 부드럽고 알뜰하게 돋았다.
모비 딕 - 상 16 배. 빌대드선장의 묘사 중,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왜 '챙 넓은 모자(broad-brimmed hat)'였을까 그의 종교적 배경과 성격 1. 퀘이커교도(Quaker)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 빌대드 선장은 낸터컷의 아주 엄격한 퀘이커교(종교개혁 시기 영국에서 발생한 개신교 교파) 신자입니다. 역사적으로 퀘이커교도들은 세속의 화려한 패션을 거부하고 극도로 단순하고 수수한 옷을 입었습니다. 이때 그들이 썼던 대표적인 모자가 바로 평평하고 챙이 아주 넓은 검은색 또는 담갈색 모자였습니다. 즉, '챙 넓은 모자'는 그가 세속적인 허영을 멀리하는 독실한 퀘이커교도임을 한눈에 보여주는 시각적 표식입니다. 2. 세상을 향해 눈을 가리는 '영적 맹목성' 실용적인 면에서 챙이 넓은 모자는 햇빛을 가려줍니다. 하지만 문학적인 관점에서 이 모자는 빌대드의 '좁고 닫힌 시야'를 상징합니다. 빌대드는 평생 바다 괴물의 피를 흘리며 가혹하게 선원들을 착취해 부를 쌓았으면서도, 머리로는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는 성경 구절을 읊조리는 모순적인 인물입니다. 챙 넓은 모자는 그가 자신의 물질적 탐욕과 종교적 위선 사이의 모순을 교묘하게 외면하고(시야를 가리고), 오직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좁은 교리와 이익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고집스러운 내면을 시각적으로 은유합니다. 3. '낡아 빠진 보풀'과의 연결성 그가 쓴 모자의 챙은 오랫동안 거친 바닷바람과 풍상을 맞으며 가장자리가 헤져 보풀이 일어났습니다. 멜빌은 그의 턱에 돋아난 빈약한 수염을 이 모자의 닳아 빠진 보풀에 비유함으로써, 빌대드라는 인물이 평생 지켜온 완고한 신념(모자)과 그의 육체(수염)가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음을 보여줍니다. 신념도, 육체도, 성격도 모두 쓸데없는 낭비 없이 '알뜰하게' 닳아 가고 있는 완고한 노인의 초상을 이 모자 하나로 완성한 것입니다. 단 한 문장의 묘사만으로 인물의 평생에 걸친 성품과 살아온 궤적을 이토록 완벽하게 압축해 내는 허먼 멜빌의 문장력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들꿩이 초원에 살듯 그들은 바다에 산다. 그들은 파도에 몸을 숨기고 영양 사냥꾼이 알프스에 오르듯 파도를 탄다.
모비 딕 - 상 14. 낸티컷,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갈매기들이 해 지면 날개를 접고 파도 사이에서 흔들리며 잠을 자듯, 먼바다에 저녁이 내리면 돛을 말아 올리고 베개 밑으로 바다코끼리와 고래가 떼 지어 지나는 곳에 누워 잠을 청해.
모비 딕 - 상 14. 낸터컷 사람들 ,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인간의 위대함이란 질병일 뿐이다. Man's greatness is but disease.
모비 딕 - 상 16. 배,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망망대해에서 많은 밤을 불침번으로 지새우며 고독과 고요를 경험하고, 여기서는 볼 수 없는 북해의 별자리 밑에서 관습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키우며, 자연이 자발적으로 은밀히 내맡긴 순결한 가슴에서 갓 나온 달콤하거나 야만적인 인상을 모두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우연한 모험을 거치면서 대담하고 힘차며 고상한 언어를 배운 사람의 내면에서, 세계만큼이나 넓은 두뇌, 그리고 육중하고 단단한 가슴과 결합한다면, 그는 온 나라를 통틀어 하나뿐인 숭고한 비극에 어울리는 대단히 화려한 인물이 된다. 연극의 관점으로 봤을 때 태생이나 다른 어떤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천성의 밑바닥에 반쯤은 의도적으로 보이는 과도한 우울함을 지녔더라도, 이 인물의 가치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비극에 적합한 위대한 인물은 어느 정도 병적인 우울함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야망에 부푼 젊은이들이여, 명심하라. 인간의 위대함이란 질병이다.
장 그리니에가 제자 카뮈를 잃고 7년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을 때, '카뮈를 추억하며' 속 회고의 심연에는 뜻밖에도 허먼 멜빌이 있었다. 갈리마르판 카뮈 전집의 에세이와 수첩 속, 카뮈가 평생 비밀처럼 품고 다녔던 대양(大洋)과 형이상학의 흔적들을 원문으로 짚어낸디. Ⅰ.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1952) 이 글은 카뮈가 마제노(Mazenod) 출판사의 《유명 작가들》 전집을 위해 쓴 비평문입니다. 카뮈가 멜빌에게 바친 가장 정제된 헌사입니다. (주요 문단 전문을 번역했습니다.) 1. 프랑스어 원문 (Excerpt) "S’il est vrai que le talent réorganise la vie, tandis que le génie y ajoute un mythe, Melville est d’abord un créateur de mythes. [...] Les livres admirables de Melville sont de ces œuvres exceptionnelles qu’on peut lire de différentes manières. Ils sont à la fois évidents et obscurs, sombres comme le soleil et transparents comme l’eau profonde. [...] Melville n’a jamais écrit qu’un seul livre, qu’il a recommencé sans cesse. Ce livre unique est l’histoire d’un voyage, d’abord inspiré par la curiosité joyeuse de la jeunesse, puis habité par une angoisse de plus en plus sauvage et brûlante. [...] Traversé par ce récit sans défaut — qu'on peut placer au rang des plus belles tragédies grecques — Melville vieillissant nous dit que, si l'ordre doit être maintenu, il a d'abord accepté le sacrifice de la beauté et de l'innocence." 2. 한국어 완역 (전문 구성) "재능이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천재는 삶에 하나의 '신화'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멜빌은 무엇보다도 신화의 창조자이다. 멜빌의 이 경이로운 책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아주 드문 작품들이다. 그것들은 명백한 동시에 모호하며, 한낮의 태양처럼 어두우면서도(sombres comme le soleil) 깊은 바닷물처럼 투명하다. 그리하여 현자나 아이나 모두 거기서 자신의 양식을 찾을 수 있다. 멜빌은 평생 단 한 권의 책만을 썼으며, 그것을 끊임없이 다시 시작했을 뿐이다. 이 단 하나의 책은 바로 '항해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젊은 날의 즐거운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더 거칠고 뜨거운 고뇌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스 최고의 비극들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이 결점 없는 이야기들을 통해, 노년의 멜빌은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면, 그는 무엇보다 먼저 아름다움과 순수함의 희생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말이다. 멜빌이 결국 그 가혹한 질서를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스스로 바랐던 것처럼 '산호초 너머, 햇빛 없는 바다 속으로' 인도되기를 원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긴 고뇌를 응시하는 자라면, 자기 정복의 결실이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던 그의 대답이 지닌 위대함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Ⅱ. 《작가수첩 (Carnets)》 속의 메모들 (1942~1951) 카뮈가 수십 년간 품고 다녔던 멜빌에 대한 내밀한 단상들입니다. 1. 1949년의 기록 (35세의 카뮈가 적은 글) "Melville à 35 ans : J’ai consenti à l’annihilation." (35세의 멜빌: 나는 소멸에 동의했다.) 주석: 카뮈는 자신도 35세가 되던 해에 이 문장을 적으며, 멜빌이 겪었던 창작의 고통과 실존적 허무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2. 항해와 고향에 대하여 (Carnets II) "Le voyage de Melville. Il n’y a pas de terre promise pour celui qui a contemplé l’infini de l’océan. La seule patrie, c’est le pont du navire." (멜빌의 항해. 대양의 무한함을 응시한 자에게 약속된 땅은 없다. 유일한 조국은 배의 갑판뿐이다.) 3. 육체와 형이상학 (Carnets III) "Le secret de Melville est de ne jamais séparer la chair de l'esprit, ni l'océan de la métaphysique." (멜빌의 비밀은 결코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지 않으며, 바다와 형이상학을 떼어놓지 않는 데 있다.) Ⅲ. 《반항인 (L'Homme révolté)》 중 에이허브 분석 카뮈의 철학적 주저에서 멜빌을 직접 인용한 대목입니다. "에이허브의 반항은 형이상학적 반항이다. 그는 단지 고래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피조물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악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악이 되는 파멸의 논리를 보여준다." Ⅳ. [진짜 추가 기록] 웁살라 대학 강연 (1957)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 카뮈가 예술의 본질을 설명하며 멜빌을 언급한 대목입니다. "가장 위대한 작품은 언제나 멜빌, 톨스토이, 몰리에르의 작품처럼, 세상의 떨리는 육체와 그 세상에 대한 인간의 저항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는 작품입니다." 대양의 무한함을 응시한 자들에게 안온한 고향이나 약속된 땅은 없다. 오직 흔들리는 갑판 위,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에이허브의 흰 고래, 시지프의 바위, 그리고 리외의 페스트로 그 형태를 바꿀 뿐이다. 부조리한 악에 맞서는 이 가혹한 질서들은 결국 하나의 신화적 계보로 수렴된다.
23. 바람이 닿는 해안 불킹턴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리 탐구의 고통과 가치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더없이 경이로운 것들은 언제나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가슴 깊은 곳의 추억에는 묘비도 세울 수 없는 법이니, 이 짧은 장은 벌킹턴의 비석 없는 무덤인 셈이다. 폭풍우에 뒤집혀 바람이 불어 가는 해안을 따라 하릴없이 떠밀리는 배처럼 그에겐 그게 어울린다고만 해두자. 항구는 자비롭다. 항구에는 ...우리 인간에게 다정한 모든 것이 있다. 하지만 그런 돌풍 속에서는 항구가, 육지가, 배에게 가장 긴박한 위험이 된다. 배는 모든 환대를 피해 달아나야 한다. 조금이라도 뭍에 닿았다간, 용골을 살짝 스티기만 해도 충격에 몸서리칠 것이다. 그리하여 배는 돛을 모두 펼치고 온 힘을 다해 해안에서 멀어지려 한다. 배는 고향으로 불어 가려는 바람에 맞서 싸우고, 파도가 휘몰아치는 망망대해로 나갈 방법을 모색한다. 피난처를 찾겠다며 필사적으로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유일한 친구가 가장 가혹한 원수라니! 깊고 진지한 생각이란 모두 바다의 광활한 독립성을 지키려는 영혼의 용맹한 노력에 다름 아니며, 하늘과 땅의 거친 바람이 서로 힘을 합쳐 위험하고 비열한 해안으로 배를 내동댕이치려 한 다는 것을,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그 진실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가장 숭고한 진리, 신처럼 가없고 무한한 진리는 망망대해에만 존재한다. 그러니 바람이 아우성치는 무한한 바다에서 죽어 없어지는 편이 바람이 불어 가는 해안에 수치스럽게 내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설사 그곳이 안전한다 할지라도 누가 벌레처럼 뭍으로 기어 가겠는가? 끔찍한 그 공포! 이 모든 고통이 다 부질없단 말인가? 굳세어라, 벌킹턴, 굳세어라! 불굴의 의지로 버텨라, 영웅이여! 그대가 죽어 묻힐 바다의 물보라, 그것에서 그대는 신이 되어 솟아오르리!
바람이 아우성치는 무한한 바다에서 죽어 없어지는 편이 해안에 수치스럽게 내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설사 그곳이 안전하다 할지라도.
모비 딕 - 상 23. 바람이 닿는 해안,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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