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D-29
<작문 노트 메모들>에서 — 오스터 자신의 언어론 (1967년, 오스터 20대 작) "세상은 내 머릿속에 있다. 내 몸은 세상에 있다." "언어는 경험이 아니다.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수단이다." "언어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주었다가 빼앗아 간다. 단숨에." "인간의 타락은 죄나 위반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가 경험을 정복하는 것의 문제다." "눈은 유동적인 세상을 본다. 말은 그 흐름을 붙잡고 고정하려는 시도이다." "말에 대한 믿음을 나는 고전주의라 부른다. 말에 대한 의심은 낭만주의라 부른다." "언어에서 멀어진 기분을 느끼는 건 자신의 몸을 잃는 것과 같다. 말이 당신을 저버리면 당신은 무의 상(像)에 녹아든다. 사라져 버린다."
내가 볼 때 중요한 것은 굶주림을 방치하는 문화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문화라는 것으로부터 굶주림의 힘과 동일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아이디어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 앙토냉 아르토, 굶주림의 예술 중,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외 옮김
<굶주림의 예술에서 > — 함순·카프카·울프슨을 다루며 (1974년 에세이) "굶주림은 주체와 대상을 분열시키는 수단이고, 변화된 의식을 가져오는 촉매이다." "그는 굶어야 하기 때문에 굶는 것이 아니라 내적 충동 때문에 굶는다." "굶주림은 은유가 아니고 문제의 핵심이다." "도덕의 영역에서 선과 악이 상대적 개념이라면, 언어의 영역에서는 거짓말과 진실이 상대적 개념이다." 바타유의 말(오스터가 인용): "저자가 꼭 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없이 쓴 책을 우리가 어떻게 오래 붙잡고 있겠는가?" "예술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무(無)로 끝날지도 모르는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걸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의 문학적 감각을 되살려 주고 문학의 본령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끔 하는 작품은 곧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 놓는 작품이다."
혼란을 수용하는 형태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에게 부여된 과업입니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베케트,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외 옮김
그 일련의 과정은 엄혹하다. 글을 쓰자면 먼저 먹여야 한다. 그런데 그는 글을 쓰지 않으면 먹지 않으려 한다. 먹지 못하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지 못한다. 그는 글을 쓴다. 아니, 글을 쓰지 않는다. 음식을 먹으면 곧 모조리 토해 낸다. 어느 시점에 한 여자를 만나 잠시 교제하지만 굴욕감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굶주린다. 세상을 저주한다. 그는 죽지 않는다. 끝에 가서 아무런 그럴듯한 이유 없이 선원 계약을 맺고 배에 올라타 도시를 떠난다. --함순의 첫 장편소설 굶주림 작가가 사랑하는 설정! "왜 다들 배를 타고 떠나는가" 함순/ 굶주림의 무명의 작가지망생처럼, 빵 굽는 타자기/오스터 자신처럼, 지금 탐독 중인 멜빌/ 모비 딕 의 이스마엘처럼 뭍은 사회다. 계약, 신분, 책임, 관계, 규칙. 실패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은 바다. 바다는 그 모든 것 바깥이디. 법도 없고, 신분도 없고, 어제도 없다. 선원 계약이라는 건 간단치 않다. 그냥 도망가는 게 아니다.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간다. 선장이 있고, 규율이 있고, 목숨을 건다. 자유로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굴레로 가는 것이다. 그래도 육지의 굴레보다는 낫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배를 탄다는 건 — 이 세계를 버리되, 완전한 자유가 아닌 다른 세계의 질서를 선택한다는 메타포. 탈출이면서 동시에 헌신. 작가들이 이 설정을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글을 쓴다는 것도 똑같다. 일상을 버리고 언어라는 다른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칼럼] 스스로 선택한 유배: 배와 언어라는 엄격한 굴레에 대하여 그 일련의 과정은 엄혹하다. 글을 쓰자면 먼저 먹어야 하지만 그는 글을 쓰지 않으면 먹지 않으려 한다. 먹지 못하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지 못한다. 그는 글을 쓴다. 아니, 글을 쓰지 않는다. 음식을 먹으면 모조리 토해 낸다. (…) 결국 그의 마지막은 아무런 그럴듯한 이유 없이 선원 계약을 맺고 도시에서 배로 떠나는 모습이다. — 함순, 《굶주림》 중에서 작가가 사랑하는 설정이 있다. “왜 그들은 모두 배를 타고 떠나는가.” 함순의 무명 작가지망생이 그렇고, 《빵 굽는 타자기》 속 폴 오스터가 그러하며, 《모비 딕》의 이스마엘 또한 그렇다. 그들에게 뭍은 곧 사회다. 계약과 신분, 책임과 관계라는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실패한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바깥’은 바로 바다다. 그곳엔 육지의 법도, 어제의 신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다로 떠나는 것은 단순한 자유를 향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육지의 굴레를 버리고 ‘선원의 규율’이라는 또 다른 굴레, 어쩌면 더 가혹하고 엄격한 질서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다. 단순한 해방을 향한 이탈이 아니라, 선장과 규율 아래 목숨을 거는 실존적 투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 역시 이와 똑같은 메타포를 지닌다. 작가는 일상의 무질서를 버리고 ‘언어’라는 다른 질서 안으로 망명한다. 폴 오스터는 이를 두고 “인간의 타락은 언어가 경험을 정복하는 것의 문제”라고 단언했다. 날것의 경험을 갈무리하여 언어라는 체계에 굴복시키는 과정은, 경험이 가진 본래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타락’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타락을 기꺼이 감수한다. 스스로 선택한 이 엄격한 굴레 속에서만, 비로소 흩어지는 경험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하는 ‘헌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지의 무질서(혹은 위선적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언어의 질서)라는 더 엄격한 규율을 선택한다는 설정은, 글쓰기를 ‘기꺼이 선택한 굴레’로 정의한다. 경험의 입장에서는 언어에 정복당하는 ‘타락’이지만, 의미를 남기려는 작가에게는 지독한 ‘헌신’인 셈이다. 결국 오스터의 ‘타락’과 나의 ‘언어로 살려냄’은, 삶을 문장으로 바꾸는 고통스러운 변이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결과라 할 수 있다. 날것의 경험은 죽지만(타락), 언어라는 새로운 형태의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승화’의 논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완성된다.
그것은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출발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제대로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중 사뮈엘 베케트,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외 옮김
굶주림의 예술: 결핍과 부조리에서 출발하는 예술 정답 없는 세상과의 마주함 이 예술은 풍요나 만족이 아닌, '결핍·필연·욕망'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굶주림에서 태어납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확실한 답이나 고정된 형태(질서)는 무너지고, 끊임없이 헤매는 '과정'만 남게 됩니다. 질문의 중요성 해답이 없는 부조리한 삶이기에, 예술가의 역할은 구차한 답을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혼란을 수용하는 형태" 를 찾아내어 세상에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을 자신의 삶으로 직접 살아내는 것이 오늘날 예술가의 진정한 과업(사뮈엘 베케트의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단식은 본질상 다른 사람의 이해를 거부... 오로지 그만이 자신의 단식을 구경할 수 있는 가장 흡족한 구경꾼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카프카의 단식 예술가 중,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외 옮김
카프카의 《단식 예술가》: 이해받지 못하는 절대적 고독 진정한 단식의 이유 단식 예술가가 굶는 진짜 이유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즉, 기성 사회가 제공하는 가치관과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절망의 토로'입니다. 타인은 결코 알 수 없는 세계 대중은 그의 단식을 서커스 구경하듯 즐기지만, 그의 예술(단식)이 가진 순수성과 진정성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예술가의 숙명적인 고독을 뜻합니다.
예술을 하고자 한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굶주림의 예술은 실존의 예술.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굶주림의 예술 중,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외 옮김
예술을 포기했기 때문에 맞이한 죽음 단식 예술가의 죽음은 역설적입니다. 단식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 하지만, 단식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죽음에 이릅니다. 결국 그가 죽었다는 것은 단식(예술)이라는 행위의 한계에 부딪혀 이를 '포기'했음을 뜻하며, 예술의 완성이 곧 삶의 파멸이라는 위험한 속성을 보여줍니다. 하느님도, 구원도 없는 실존 이 굶주림의 예술은 신의 구원이나 사회적 체제에 의지하지 않고, 죽음과 부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는 '실존의 예술'입니다. 모든 믿음을 내던지고 스스로 부과한 결핍을 통해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 도달하지만, 예술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허무를 디딘 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의 거짓된 정답과 타인의 시선을 거부하고, 자신의 결핍과 절망을 온전히 책임지며 죽음(무)앞에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예술가의 위대한 용기와 숙명을 말하고 있다. 깊이 있고 묵직한 실존적 사유.
루이스 울프슨은 조현병 환자이다. 저자의 강박증이 이룬 미로를 방황하면서 저자의 심정을 느끼게 되고, 그와 동일시하게 되고, 키릴로프와 몰로이의 괴팍함과 고통을 알아보게 된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뉴욕의 바벨탑,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외 옮김
키릴로프와 몰로이의 핵심 정리 폴 오스터가 조현병을 앓으며 모국어(영어)를 지워버리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한 루이스 울프슨을 이 두 인물에 빗댄 이유는, 이들이 문학사에서 '극단적인 실존적 소외와 집착'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키릴로프 (Kirillov) 출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의 등장인물 핵심 개념: 사상적·논리적 극단성과 자멸적 결단 설명: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하나의 논리적 과업이자 의무로 선택한 인물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스스로 극복함으로써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울프슨과의 연결점: 울프슨이 자신의 뇌를 학대하듯 고통스러운 외국어 변환 시스템에 집착하는 모습은, 자신이 세운 극단적인 관념과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육체적 파멸을 무릅쓰는 키릴로프의 사상적 광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몰로이 (Molloy) 출처: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몰로이》의 주인공 핵심 개념: 신체적·언어적 해체와 기괴한 강박증 설명: 기억과 언어를 점차 잃어가며 사회적 규범에서 완전히 소외된 채 살아가는 부조리한 방랑자입니다. 몸이 마비되어 땅을 기어 다니면서도 주머니 속 조약돌을 규칙적으로 번갈아 빠는 것 같은 기괴한 행동에 집착합니다. 울프슨과의 연결점: 어머니의 영어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입술에 유충이 묻을까 봐 기괴한 방식으로 음식을 입에 처넣는 울프슨의 일상은, 세계의 질서가 무너진 곳에서 자신만의 기괴한 규칙에 매달리는 몰로이의 고독한 강박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종합 요약 폴 오스터는 루이스 울프슨이라는 실존 인물의 삶이 '자기 파멸적인 사상적 집착(키릴로프)'과 '언어를 잃어버린 자의 기괴한 신체적 강박(몰로이)'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 처절하고도 강렬한 실존적 고통을 담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두 인물을 소환한 것입니다.
<키릴로프, 자살을 ‘논리적이고 자발적인 과업’으로 선택한 이유> 그에게 자살이 단순한 절망이나 도피가 아니라 인간이 완벽한 자유를 얻고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한 유일한 철학적 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키릴로프가 펼치는 이 독특하고도 기괴한 논리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됩니다. 1. 신의 거부와 죽음의 공포 키릴로프는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삶의 고통과 특히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견디지 못해서, 위안을 얻기 위해 신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발명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지금까지 모든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신이라는 절대 권력에 복종하는 '노예'로 살아왔다고 봅니다. 2. "죽음의 공포를 이기면 내가 곧 신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벽하게 극복하고, 아무런 이유 없이 오직 자신의 순수한 자유 의지만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신의 손아귀(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 절대적인 자유를 획득하게 됩니다. 키릴로프는 신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이 스스로 최고의 존재, 즉 '인간-신(Man-God)'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3. 왜 하필 '자살'인가?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 의지)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본능은 '살고자 하는 본능'이며,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따라서 키릴로프에게 자살은 타인이나 환경에 등 떠밀려 하는 타협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장 강력한 본능(생존 욕구)을 스스로 통제하고 꺾어버리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자발적이고 최고의 자유 의지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최고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죽는 것이다. ... 오직 그것만이 나를 구원하고, 다음 세대의 인간들을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4.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선구자적 과업 그는 자기 한 몸 잘살자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한 명은 총대를 매고 "보아라, 인간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이토록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숨 바쳐 증명(선례)해야, 남은 인류가 신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살은 충동적인 파멸이 아니라, 인류의 의식을 진화시키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논리적인 사명이자 과업'이 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키릴로프에게 자살은 역설적이게도 삶과 자유를 격렬하게 사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신이 없는 비참한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절대적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가장 무서운 적인 '죽음'을 스스로 선택해 무너뜨리려 했던 광기 어린 실존적 결단이었던 셈입니다. 알베르 카뮈 역시 훗날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키릴로프의 이 사상을 두고 '부조리에 대항하는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철학적 실험'으로 깊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는 결국 죽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결단을 실행으로 옮겼고 실험에 성공했나" 1. 키릴로프 자신은 "성공했다"고 믿으며 죽었다 키릴로프의 개인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결단을 완벽하게 실행에 옮겼고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공포의 극복: 그는 마지막 순간에 총을 머리에 겨누고 극심한 정신적 발작과 광기를 겪으면서도, 끝내 도망치거나 타협하지 않고 방각쇠를 당겼습니다. 신의 살해와 자아의 신격화: 그는 죽음의 공포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쇠사슬을 오직 자신의 '순수한 자유 의지'로 끊어냈습니다. 스스로 신이 없음을 증명했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섰다고 확신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자살은 철저히 계산된 계획의 완성이자 성공이었습니다. 2. 도스토옙스키의 시선: "가장 비참한 실패다" 그러나 이 소설을 쓴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에서 키릴로프의 실험은 완벽한 실패이자 비극입니다. '악령'들에게 이용당한 죽음: 키릴로프는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순수한 의도로 죽음을 선택했지만, 정작 그의 자살은 소설 속 냉혈한 정치 음모가인 '베르호벤스키'에 의해 다른 살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합니다. 무(無)로 돌아간 자유: 신에게서 벗어나 절대적인 자유를 얻겠다며 목숨을 끊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차디찬 시체(무)뿐이었습니다. 삶이 없는데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스토옙스키는 키릴로프를 통해 *'신을 부정하고 오직 인간의 이성과 의지만을 절대화하는 실존주의적 사상이 얼마나 허무하고 자멸적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3. 그는 '사랑'을 했는가? 키릴로프는 인간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너무나 기괴하고 독단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와 신이라는 환상에 시달리며 노예처럼 사는 것을 진심으로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 공포를 깨부수는 선구자가 되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거대한 인류애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살아있는 구체적인 이웃과의 따뜻한 교감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조립한 철학적 관념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인류를 사랑했기에 그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지만, 정작 자기 앞의 삶과 세상은 사랑하지 못한 채 허무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그는 결단을 실행으로 옮겨 자신만의 철학적 실험(자살)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공의 대가는 인류 구원이 아닌 허무한 죽음과 정치적 이용이었기에, 그의 삶은 문학사에서 가장 순수하면서도 가장 눈물겨운 '실패한 성자'의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사뮈엘 베케트의 말대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향해 온몸을 던진 셈입니다.
소설 《악령》에서 키릴로프의 순수한 철학적 결단이 정치 세력에게 어떻게 처절하게 이용당했는지는 작품의 핵심 악역인 표트르 베르호벤스키(Pyotr Verkhovensky)라는 인물의 정교한 음모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과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비밀 서약: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필요할 때 죽어다오" 표트르는 지방 도시에 혁명적인 혼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으려는 냉혈한 정치 공작원입니다. 그는 키릴로프가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조만간 자살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게 됩니다. 표트르는 키릴로프의 철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만 했죠. 그래서 그는 키릴로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약속을 받아냅니다. "어차피 당신의 자유 의지로 자살할 것이라면, 우리 조직에 가장 도움이 되는 타이밍에 죽어달라. 그리고 죽기 직전, 우리가 지정하는 범죄를 당신이 저지른 것처럼 유서를 써놓고 죽어달라." 키릴로프는 자신을 '인간-신'이라 믿었기에 세상의 법이나 도덕, 정치적 음모 따위는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 어떤 유서를 쓰든 나의 자살은 오직 나의 자유 의지일 뿐"이라며 흔쾌히 동의해 버립니다. 2. '샤토프 살해 사건'의 은폐 도구 표트르의 진짜 음모는 조직의 배신자인 샤토프(Shatov)를 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표트르는 조직원들을 공범으로 만들어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샤토프를 잔인하게 처형합니다. 이 살인 사건의 수사망이 좁혀올 때, 표트르는 미리 준비해 둔 카드인 키릴로프를 찾아갑니다. 샤토프를 죽인 진범이 사실은 키릴로프 자신인 것처럼 꾸미기 위함이었습니다. 3. 광기 속에서 강요된 유서 표트르는 약속대로 키릴로프에게 "내가 샤토프를 죽였다"라는 내용이 담긴 허위 유서를 쓰라고 독촉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기괴하고 섬뜩한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키릴로프는 극단적인 정신적 발작과 광기에 사로잡혀 방 안을 뛰어다니고, 표트르는 그가 유서를 쓰기 전에 마음이 바뀌거나 그냥 죽어버릴까 봐 권총을 든 채 전전긍긍합니다. 결국 키릴로프는 광기 속에서 표트르가 불러주는 대로 허위 유서에 서명한 뒤, 옆방으로 뛰어 들어가 스스로 머리에 총을 쐅니다. 결론: 왜 비참한 실패인가? 키릴로프는 "인류를 죽음의 공포와 신의 구속으로부터 해방하겠다"는 거대한 철학적 순교를 목표로 방각쇠를 당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을 감은 직후, 그가 남긴 유서는 오직 '비열한 정치 살인마의 도망 시간을 벌어주는 위조 수사 자료'로 전락했습니다. 표트르는 키릴로프의 시체를 뒤로한 채 유서를 챙겨 유유히 기차를 타고 해외로 도피해 버립니다. 결국 도스토옙스키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아무리 개인이 순수하고 거대한 실존적 결단을 내린다 한들, 신을 부정하고 도덕적 기준을 잃어버린 인간의 관념은 결국 현실의 영악한 '악령(정치적 사기꾼)'들에게 가장 부리기 좋은 도구로 이용당할 뿐이라는 차가운 현실을 폭로한 것입니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교란을 일으키는 힘이며 공포와 전율 속에서 마주친 현존으로서 인생의 진실과 엄청난 가능성을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장편소설 하늘의 푸름의 서문, 조르주 바타유,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외 옮김
문학은 연속되는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일련의 일탈 행위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게 될 책은 집필 당시의 문학 사상에 역행하는 책이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하늘의 푸름, 조르주 바타유,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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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증정-선착순 10명] 청선고로 모여라!『열여덟의 페이스오프』작가와 함께 읽기[청소년 문학 함께 읽기] 『스파클』, 최현진, 창비, 2025[문학세계사 독서모임] 염기원 작가와 함께 읽는 『여고생 챔프 아서왕』[북다] 《위도와 경도》 함윤이 작가와 함께하는 라이브 채팅! (4/9)[북다/라이브 채팅] 《정원에 대하여(달달북다08)》 백온유 작가와 함께하는 라이브 채팅!
위기의 시대에 다시 소환되는 이름
[세창출판사/ 도서 증정] 편집자와 함께 읽는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 [문예출판사 / 인증 미션] 한나 아렌트 정치 에세이 <난간 없이 사유하기>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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