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군광주병원
505보안부대, 안기부 광주지부와 근거리에 있었다. 당시 광주 외곽 신흥 주택가 속에 군대와 보안시설들이 자리해 있었던 셈. 부상 당한 군인, 연행한 시민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죽은 시민들을 검시했다. 이곳에서의 시민 불법 화장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1980년 5월의 절대공동체,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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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향팔님의 문장 수집: "국군광주병원
505보안부대, 안기부 광주지부와 근거리에 있었다. 당시 광주 외곽 신흥 주택가 속에 군대와 보안시설들이 자리해 있었던 셈. 부상 당한 군인, 연행한 시민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죽은 시민들을 검시했다. 이곳에서의 시민 불법 화장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 어쩌면 가장 많은 사상자가 머문 곳은 전남대병원이 아니라 화정동 국군광주병원일지 모른다. 계엄군이 실어간 부상자가 많았다. 신군부는 군병원의 현황을 절대 공개하지 않아 '군기밀'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 화정동은 시내와 멀었다. 도심과 상무대의 중간지점쯤 1~2층짜리 주택들이 지어지고 있는 신흥택지지구였다. 그 한적한 주택가 사이에 국군광주병원이 있었다. 상무대나 505보안부대로 끌려갔다가 계엄군의 폭행과 고문에 심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국군광주병원으로 옮겨졌다. 국군 관할의 병원이었으니 치료와 취조가 병행됐다.
그럼에도 시민들에게는 오로지 무자비함밖에 없는 상무대나 505보안부대보다는 병원이 더 나았다. '국군광주병원은 천국, 보안부대는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곳에서도 투쟁들이 조용히 벌어졌다. 의료진이었다. 주로 전남대와 조선대 의대 출신이었던 공보의들은 환자가 아직 낫지 않았다며 치료를 계속하곤 했다. 치료가 완료됐다고 사실대로 계엄군에 보고하면 그 시민은 다시 상무대로 이송돼 조사와 고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 병원들은 서로살림의 최전선이었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1980년 5월의 절대공동체,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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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나는 들불에 와서 슬픔을 알았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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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들불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불이 꺼진 것은 시들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들불의 활동 기간은 1978년 7월부터 1981년 7월까지다. 그 사이를 5·18이 관통한다. 5·18을 전후로 7명의 강학이 세상을 떠났다. 들불야학 근거지는 혹독한 탄압에 시달렸다. 남은 강학과 학강들은 광주천변 제방에서 수업을 재개했지만 예전의 웃음소리는 사라졌다. 결국 들불은 1981년 7월 하순 4기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노동야학으로 전국에 번지자'는 소망을 담아 들불이라고 이름 지었다.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들불은 한국민주화 역사에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큰 불로 번졌다. 일찍 하늘의 별이 된 들불 강학들을 후대 사람들은 '들불 7열사'라고 부른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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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문득 한 강학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유인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하듯 물었다. 윤상원은 다그쳤다. "계엄군 저놈들은 지금, 총을 든 시민 한 명보다, 천 명의 시민을 움직이게 만드는 한 장의 유인물을 더 무서워한단 말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들불팀의 유인물은 광주시민들이 피해상황을 파악하는 언론도 됐고 항쟁의지를 다지는 결의문도 됐다. 며칠 후 들불팀은 시내 도청 옆 YWCA로 옮겨가 본격 유인물을 만들었다. 시민들의 제보도 점점 쏟아졌다. 들불팀의 유인물은 훗날 5·18의 대표 기록물 중 하나가 됐다. 『투사회보』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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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윤상원은 항쟁지도부 대변인 자격으로 도청 본관에서 외신 기자 회견을 열었다. 그는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국내 언론이 통제된 채 유일한 '외부'였던 외신기자들을 향해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광주항쟁 의 의미를 밝혔다. 그는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입니다"라고 회견을 매듭지었다. 죽음을 자청하고서 이토록 차분하고 단호한 브리핑을 하는 시민군 대표를 외신기자들은 잊지 못했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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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향팔님의 문장 수집: "윤상원은 항쟁지도부 대변인 자격으로 도청 본관에서 외신 기자 회견을 열었다. 그는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국내 언론이 통제된 채 유일한 '외부'였던 외신기자들을 향해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광주항쟁의 의미를 밝혔다. 그는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입니다"라고 회견을 매듭지었다. 죽음을 자청하고서 이토록 차분하고 단호한 브리핑을 하는 시민군 대표를 외신기자들은 잊지 못했다."
“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 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 그는 한국인에게 흔치 않은 곱슬머리였다. 그의 행동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무장한 동료들의 허둥거림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침착함이 있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 ”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1980년 5월 27일 | 광주 시민군 지휘자 윤상원 사망, 김형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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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계엄군의 진압이 예고된 5월 26일 밤 그는 어린 시민군들과 여자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며 부탁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총을 내려놓고 울먹이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소멸이 다가오는데도 윤상원은 후대의 길을 조직했다. 오월광주의 한복판에서 그는 당대의 사건을 넘어선 '역사'를 전망했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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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향팔님의 문장 수집: "계엄군의 진압이 예고된 5월 26일 밤 그는 어린 시민군들과 여자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며 부탁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총을 내려놓고 울먹이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소멸이 다가오는데도 윤상원은 후대의 길을 조직했다. 오월광주의 한복판에서 그는 당대의 사건을 넘어선 '역사'를 전망했다."
“ 달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여 내보낼 사람들을 내보낸 뒤 남은 사람들은 카빈총을 쥐고 예정된 최후를 기다린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도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했던 예수와 같이.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고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며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는 여성의 방송 말미에 드르륵 드르륵 M16 소총 소리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광주 도청 진입 작전이 전개됐고 끝까지 총을 놓지 않고 싸우던 윤상원은 계엄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목숨을 잃는다.
그의 바지에는 전날 만났던 외신 기자들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보안사 요원이 찍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는 두 팔을 벌린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누워 있다. 사망한 뒤 누였던 매트 위로 불 붙은 커튼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의 시신은 불에 그을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광주가 이 나라의 십자가였다면 그는 그 위에서 못 박히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며 죽어 간 목수의 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역사에는 예수를 닮은 이들이 많다. 육신으로는 부활하지 못하였으되 수많은 청춘들의 결단과 노래 속에 부활한. 윤상원, 그도 그랬다. ”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1980년 5월 27일 | 광주 시민군 지휘자 윤상원 사망, 김형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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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사람들은 이제 5월 광주를 서서히 지워간다.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광주의 '구체적 실감'이 사라진 사람들의 가슴속엔 민주, 열사, 항쟁, 성지, 기념식 같은 '역사적 추상' 만 남았다. ”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오월 | 1999년_5월, 김규항 지음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출판인이자 칼럼니스트인 김규항씨의 칼럼집. 지난 1998년부터 『씨네 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등에 연재했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김규항의 글은 간결하고 평이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듯한 힘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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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향팔님의 문장 수집: "사람들은 이제 5월 광주를 서서히 지워간다.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광주의 '구체적 실감'이 사라진 사람들의 가슴속엔 민주, 열사, 항쟁, 성지, 기념식 같은 '역사적 추상' 만 남았다."
“ 이제 5월의 정신은 여전히 그 도살의 기억을 떨치지 못하는, 여전히 세상을 응급실로 파악하는 몇몇 어리석은 사람들의 썩어진 가슴속에만 살아 있다. 더러운 조선의 역사는 오늘도 장강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풍선 하나씩 손에 든 채 놀이동산과 패스트푸드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기자기한 목소리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읊조리며 그들의 5월을 사뿐히 통과한다. ”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오월 | 1999년_5월, 김규항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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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그런가 하면 엊그제 지나친 영등포 어느 대로변엔 "5.18 광주 순례단 모집, 한나라당 00 지구당"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런 걸 '개나 걸이나' 라고 했던가. 다큐멘터리 영화 <민들레>에는 유가협 어머니들이 한나라당 당사 화장실에서 "이놈들 화장실 좋은 것 좀 봐. 이놈들이 우리 자식 죽인 놈들인데…." 하고 독백하는 장면이 있다. 내 생각에 그 당을 그 독백만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 당에 아무리 젊은 피와 붉은 피(다른 말로, 빌어먹을 자식들과 벼락 맞을 자식들)가 수혈된다 해도 말이다. ”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광주 단상 | 2000년_5월, 김규항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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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폭도라 하면 폭도인가 했고 이제 항쟁이라 하니 항쟁인가 할뿐인 우리가 굳이 광주를 추억하고 광주 20주년을 기념할 이유는 무엇인가. 광주 2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는 그 20년 동안 광주에 지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어떤 절차를 거쳤던가. 2만 명의 학생이 다니는 대학에서 열린 5.18 강연회에 모인 열 명이 못 되는 학생과 도살자의 당이 영등포 대로변에 내건 5.18 광주순례단 모집 플래카드의 머나먼 거리 속에서 대체 우리는 우리의 어떤 인간적 분별력을 추출할 수 있는가. 20년이 아니라 200년이 지난다 해도, 참회가 없는 우리는 여전히 도살자의 충실한 공범일 뿐이다. ”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광주 단상 | 2000년_5월, 김규항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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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광주는 처음엔 엘리트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마지막에 가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떠납니다. 계엄군과 협상을 해서 더 이상의 희생을 줄여야 한다, 헛되게 죽지 말고 힘을 기르자, 이런저런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던 수습파들은 떠나고 무릎 꿇느니 차 라리 죽겠다는 항쟁파만 남습니다. 그 순간부터 시민군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부터 광주 인민의 군대라고 해야 맞습니다. 항쟁파의 대부분은 평소에 인간 취급 못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본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목숨보다 귀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 취급 못 받고 사는 세상,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자. 결국 그들만이 인간의 품위를 간직했습니다. ”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의 정신 | 2005.05.18...연세대 강연문, 김규항 지음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세상을 향해 한 문장 한 문장을 날이 선 비수를 벼리듯 글을 쓰는" B급 좌파 김규항의 두 번째 칼럼집.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 '씨네21'과 '한겨레신문' 등에 기고한 칼럼을 비롯해 아포리즘 형식의 단상과 사적인 기록(2004년 ~ 2005년)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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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지나간 일,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을 갖지 않는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
우리는 광주에서 끝까지 싸웠던 사람들을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늙은 어머니, 처음으로 입을 맞춘 날의 두근거림이 그대로 남은 애인, 제 목숨보다 귀한 새끼와 영원히 만나지 못할 상황입니다. 일제시대의 독립군들처럼 죽고 나서 존경과 명예가 남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폭도요, 빨갱이로 남는 것입니다. 남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언제까지 어떤 고통을 겪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끝까지 총을 들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바로 광주의 정신입니다.
여러분들 매일 밤 인터넷에서 활동하지요? 지금 이 나라의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먹고 나서 인터넷 세상에 들어가 다들 사회평론가로 활동합니다. 바야흐로 온 국민이 사회평론가인 시절이지요. 그러나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얼굴이지만 그 대부분은 개혁이라는 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을 뿐입니다. 체제는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네티즌"이라고 부추기고 그들은 다시 "세상을 바꾸는 네티즌들"로서 활동합니다. 오로지 체제가 제공하는 이슈에 매일 밤 메뚜기 떼처럼 몰려다니며 좀더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들을 은폐하는 데 동원되지요. ”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의 정신 | 2005.05.18...연세대 강연문, 김규항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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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네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미쳤고 나머지 한 사람은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한 사람이 나였다.'
5·18 항쟁이 끝난 2년 뒤 박효선이 형 김 영철을 만나고 와서 쓴 일기다. 마지막 시민군으로 전남도청을 지켰다가 윤상원의 죽음을 지켜본 김영철은 정신병 증세가 점점 깊어졌다. 박효선은 자주 병문안을 갔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형의 말동무가 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찾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형, 저 왔어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김영철은 한참 만에야 박효선임을 깨닫고 해맑게 웃곤 했다. "박효선. 집에 가부렀어." 박효선의 입은 웃지만 마음은 찢어졌다. '집에 가버렸다'는 말은 그에게 '도망갔다'는 말로 들렸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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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박효선은 뛰어난 연극연출가이자 배우였다. 전남대에 다닐 때 연극 동아리를 이끌었고, 선배 윤상원과 연이 닿은 것도 그 동아리에서였다. 윤상원과 박효선은 끼가 넘치는 천상 광대였다. 박효선은 일찌감치 신명 나면서도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연극을 만들어냈다. 1978년,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에서 승리한 농민들을 위해 만든 마당극 '함평 고구마'도 그중 하나다. 함평 농민들이 포대를 고구마 모양으로 잘라 입고 무대에 올랐다. 농민들 자신이 고구마가 되어 목소리를 냈다. 임진택 명창은 훗날 "대단히 활기차고 힘이 솟는 마당극이었다. 기존 동·서양 어떠한 연극 형태도 모방하지 않은 진짜 토종 농촌 마당극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런 후배 박효선을, 윤상원이 들불야학 특별강학으로 초청했다. 그는 들불 학강들의 신명을 북돋웠다. 오랜 공장 노동에 지친 학강들은 광천시민아파트 마당에서 박효선이 가르쳐주는 탈춤을 추며 고단한 몸을 달랬다. 이 해방의 마당에는 아파트 주민들도 함께했다.
'함평 고구마'의 농민들도, 노동연극의 학강들도 연극을 준비하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다. 박효선은 배우들이 자기 삶의 주체로 서게 돕는 조력자였다. […] 1980년 3월에는 '극단 광대'를 결성했다. 광주에 본격 연극판을 펼치려던 찰라, 광대 박효선은 5·18을 만났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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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박효선은 윤상원의 들불팀과 함께 YWCA 건물에 머물며 시민군 홍보부장으로 활동했다. 도청 광장의 시민궐기대회 무대 진행을 도맡았다. 그의 특기가 발휘됐다. 박효선은 마지막 항전을 앞둔 5월 26일 밤 집에 돌아왔다. 고통스러운 일기에서 지칭한 '죽은 두 사람'은 윤상원과 박용준이고 '미친 한 사람'은 김영철이었으며 '도망쳐서 살아남은 나머지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예기치 못한 격랑에 휘말린 개인은 누구나 어떤 선택을 하게 된다. 그날 밤 집에 갔든 도청에 남았든 집에서 아예 나오지 않았든, 누구도 그 선택을 평가할 수 없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가능할 것이다. 박효선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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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향팔님의 문장 수집: "1980년 절대공동체를 만나는 도보길 추천
전남대 정문(대학생들) - 무등경기장(택시운전사들) - 광천동 성당+시민아파트(들불야학 『투사회보』 제작자들) - 양동시장(주먹밥 만든 상인들) - 광주공원(시민군들) - 적십자병원(의료진과 헌혈하는 사람들) - 황금동(헌혈하는 사람들) - 5·18민주광장(시민들의 바다)
2시간 반~3시간 소요. 총 8km 중 광주천변 산책로 구간이 3.5km. 특히 5월 17일에 걸어서 도청 앞 5·18민주광장에 도착하면 5·18 전야제에 참여할 수 있다. 광주 원도심 풍속 탐사 코스로도 좋다. 광천동시민아파트 일대는 재개발이 예정돼 있다."
“ 광천시민아파트
광천동성당 옆에 있다. 1970년 7월 완공된 광주 최초의 아파트이자 빈민 연립주택이다. 광주시가 빈민 판자촌을 철거한 자리에 지었다. 주민들이 상환금을 제때 내지 못한다며 광주시가 건물 뼈대만 지은 상태로 분양한 탓에 입주자가 직접 마감공사를 했다. 입주 당시 전체 184가구(2019년 현재 24가구)의 75%가 빈곤가구였다. 층마다 하나씩 있는 공동세면장·세탁장·공동화장실을 이용했다. 광천동성당과 함께 들불야학 근거지로 보존 가치가 크지만 2015년 광주시 역대 최대 규모인 주택재개발사업지구에 포함됐다. 아파트 보존 방법을 수차례 모색했으나 결국 철거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