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D-29
20세기 초, 조합 형태의 수리시설 관리기구가 탄생했다. 일제가 조선을 본격 침탈하기 시작하면서 1908년 전북 옥구에 처음으로 서부수리조합을 만들었다. 일제는 조선 농민들의 노동력을 징발해 저수지를 축조했고, 그들의 돈을 거둬 수리시설을 관리하고 물값까지 걷었다. 백 보 양보해서, 그때는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관계였다. 고양이가 쥐를 생각해줄 리 없었다. 1950년대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농민들은 이 기구를 민주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된서리를 맞아 농조도 농협도 모두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농어촌공사 홈페이지에서 기관 연혁을 보면 옥구서부수리조합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수탈기관으로 출발했다는 태생적 약점은 그렇게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나주 수세거부 투쟁, 이혜영 지음
나주 농민들은 1987년 당시 논 300평당 벼 23~28kg 값에 해당하는 수세를 냈다. 평균 3만 5,000원. 요즘 돈으로 치환하면 300평당 약 10만원 정도였다. 농민의 부담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농협 조합비, 갑류농지세(논), 을류농지세(특용작물 밭)까지 내야 해서 등이 휘었다. 흉년이 들면 소득은 바닥을 치고 빚도 불어나는데 '관에 바쳐야 할' 세금은 늘면 늘었지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꼬박꼬박 고지서를 보내고 못 내면 차압을 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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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명이 모였다. 자그마한 나주 시내에서 누구도 이런 규모의 인파를 본 적이 없었다. 실무자들은 깜짝 놀랐다. 집회시간인 오전 10시, 성당 마당은 이미 꽉 찼다. 농민들은 성당 옆 집들 지붕 위에 올라가 앉고, 성당 문밖을 채우고, 광목간 도로 사거리까지 꽉꽉 메웠다. 농민들 스스로도 놀랐다. 이 거대한 농민집회의 기록은 2년 뒤 1989년 서울 여의도에서 전국농민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농민들이 읍내에 나오는 과정부터 전투였다. 마을사람들이 모여 경운기 타고 털털털털, 3~4시간 걸려 대회장에 왔다. 당시엔 큰길만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이었다. 그렇게 모인 1만 명 농민들의 함성이 나주 하늘을 울렸다. '부당수세 폐지하라! 농조를 해체하라! 모든 수리시설과 농지개량사업을 국가가 전액투자하라! 수리시설을 정부가 직접 관리하라! 징수한 부당수세를 반환하라!' 그간 입에 착착 붙은 삼채가락 구호도 넘실댔다. '못~ 내 못~ 내 절~ 대 못내 부당수세 절~대 못내.' 시위대는 나주성당을 나와 농조를 향해 가두행진을 했다. 꽉 찬 가마니 두 개를 끌어다가 농조 마당에 철푸덕 던졌다. 농민들이 반납한 수세 고지서 1만 장이 들어 있었다. 농조 조합장은 시위대의 규모와 당당함에 기가 질려 강제징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농민들은 나주군청 앞에 다시 집결한 후 해산했다. 당시 인구로 볼 때 나주 모든 농가에서 1명씩 나온 셈이었다. 대회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대화에서 소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나주농민대회는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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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조와의 싸움은 지난했다. 그렇게 싸웠건만 수제는 조금 인하되는 정도에 그쳤다. 시원치 않았다. 농민들은 아예 수세폐지 투쟁에 나섰다. 1988년 3월, 2차 농민대회 때는 경찰이 폭력진압을 하기 시작했다. 매운 최루탄 가스가 섞인 봄비 속에서 농민들은 울면서 잡혀갔다. 한 달 후엔 전북 순창 농민들과 함께 전남북농민대회를 열었고 무더기로 연행됐다. 모두 나주성당 마당에서 벌인 싸움이다. 1988년 말에는 나주와 전남이 중심이 돼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1989년 2월 13일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굵은 글씨로 기록되는 날이다. 한국 정치의 심장부인 여의도에서 대규모 농민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올라온 농민들이 여의도광장에서 목청껏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지은 지 4년 된, 당시 국내 최고층으로 화제가 된 63빌딩이 이들을 내려다봤다. 이날 농민대회의 정식 명칭은 '수세폐지 및 고추전량수매 쟁취를 위한 농민대회'였다. 수세폐지 사안은 나주가 주도했다. 나주 농민 1,000여 명이 전세버스 25대에 나눠 타고 올라가 여의도광장에 섰다. 이 대회가 씨앗이 되어 이듬해 전국농민회총연맹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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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수세가 5kg 이하로 떨어졌다! 수십년 동안 해마다 25kg, 30kg씩 빼앗아가던 수세가 드디어 5kg 이하로 떨어졌다. 87년 이후 나주농민과 해남 순창 농민들이 폭력경찰의 최루탄과 몽둥이에 맞서 싸운 결과, 작년에 10kg으로 떨어진 수세가 올해는 전국 천만농민이 수세 폐지를 외치며 뭉쳐 싸우자 급기야 5kg 이하로 떨어진것이다. 노태우나 그의 똘마니 농수산부 장관 김식이란 놈이 시간있을 때마다 텔레비젼에 나와 입에 개거품을 물면서 10kg 이하로는 안된다던 수세가 어떻게 5kg 이하로 떨어졌는가? 그것은 바로 2월 13일 여의도에서 전국농민의 투쟁과 기세에 간담이 서늘해진 독재정권이 꼬리를 내리고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천만농민이 독재정권의 몽둥이와 공갈협박을 박살내고 승리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나주 농민 여러분! 수세폐지가 눈앞에 보입니다. 끝까지 단결합시다! 끝까지 싸웁시다!” - 나주농민회 소식지 (1989.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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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의 유일한 증언자처럼 그 거리 한가운데 돌기둥 두 개가 서 있다. 나주수세투쟁 20주년 기념비다. 해와 논, 강, 달과 농부 그림, 멋지게 흘려 쓴 그날의 함성이 강렬한 부조로 새겨져 있다. 2007년 나주사람들은 투쟁 2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를 꾸리고 농조 터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 농조는 사라져도 우리는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해와 강, 달, 논은 모두 농사의 기본 요소다. 어른 키만 한 두 개의 기념비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주 수세투쟁이라는 시간여행으로 들어가는 문 입구에 선 안내자처럼, 이제는 그 역사의 기억투쟁에 나선 결사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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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걸친 나주 수세투쟁이 남긴 것을 꼽아본다. 당시 농민들이 구호에 담은 세 가지 요구사항은 '수세 폐지! 농조 해체! 수리청 신설!'이었다. 수세는 나주농민대회 이후 23~28kg에서 10kg로, 다시 5kg로 인하됐다가 2000년에 완전히 폐지됐다. 전국의 모든 농민들에게 수세는 과거형이 되었다. 농지개량조합은 해체된 후 공기관인 한국농어촌공사로 통합됐다. '수리청 신설'은 국가가 수리시설을 관리하라는 의미였으니 농민들의 요구가 이뤄진 셈이다. 수세투쟁은 요구사항이 단계별로 모두 실현된 드문 성공사례였다. 나주의 투쟁으로 전국 농민들의 어깨를 누르던 수세가 사라졌다. 수세투쟁의 성공사는 전국의 농산물 수입 반대투쟁, 농산물 가격투쟁, 농협 민주화운동 등에도 영향을 줬다. 1978년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은 전국 농촌에 놀라운 충격을 줬다. '농민도 싸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줬다. 농촌을 흔들어 깨웠다. 이 멍석 위에서 1980년대 농민운동은 대중적인 운동으로 발전해갔다. 나주 수세투쟁은 그 정점이었다. 소수의 청년운동가들이 제안해 시작했지만 대다수 농민들이 지지하고 참여한 대중투쟁이었다. 자녀세대와 부모세대의 합작품이었다. 투쟁 와중에 왕곡면 수세거부대책위는 왕곡면농민회로 진화했다. 수세를 넘어 농업문제 전체에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나주여성농민회도 결성됐다. 농조 조합장 선거에서 농민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 농민들의 자부심과 주인의식은 수세투쟁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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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인지 강인지 헷갈릴 정도인 영산강 중하류에는 큰 배가 오갔다. 밀물 때 바닷물이 강을 따라 쭉 밀려 올라왔으므로 배들은 어렵지 않게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목포 하구에서 거슬러 대략 70km까지 조수의 영향을 받았다. 바로 나주 영산포 근처였다. 상류로 계속 가려는 사람과 물자는 영산포에서 작은 배로 갈아탔다. 영산포는 바다와 강의 만남의 광장이었다. 큰 강이 요즘의 고속도로와 같은 기능을 했던 옛 시절, 영산강 뱃길의 중요한 터미널이었다. 영산포구는 영산강 물길과 흥망성쇠를 함께하다 일제강점기 때 급격히 개발됐다. 영산포는 나주가 근대도시로 성장할 때 가장 자주 호명됐다. 강 건너 나주 중심부보다 더 분주했다. 마냥 흥겨운 분주함은 아니었다. 일제는 식민지인 우리 땅에 길목 좋은 포구를 개발하고 철길을 놓았다. 식민지의 쌀과 산물을 모아 일본으로 수월하게 수송하려는 목적이었다. 우리나라 교통 좋은 근대도시들은 태생적인 아픔을 갖고 있다. 목포나 영산포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영산포구와 주변 시가지는 쇠퇴했지만 골목을 돌아보면 일제 가옥들과 근대도시의 활기찬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어쨌든 영산포는 나주의 생애에 전성기의 표정을 새겼다. 영산강 뱃길도 옛날이야기다. 내륙 중심으로 도로가 발달하면서 강은 점점 할 일을 잃었다. 중간중간에 보를 놓고 목포 영산강 하구를 둑으로 막은 후에는 아예 배가 다닐 수 없게 됐다. 포구들도 시들었다. 물이 제 빛을 잃으면서 나주가 전라도 들판을 호령하던 시대도 저물었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나주 수세거부 투쟁, 이혜영 지음
영산강은 전라도 서부 들판문화의 원형을 그려낸 굵은 뼈대였고, 나주는 그 중심지였다. 땅과 물을 귀하게 여기는 농본문화가 특히 강했다. 19세기 말부터 70년간 계속된 나주 농민들의 궁삼면 토지탈환 운동은 강인한 농민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20세기 말의 수세투쟁이 있다. 1989년 봄 차압저지 결사대는 벼 포대로 조끼를 만들어 입고 바람을 가르며 영산강을 건넜다. 그들에게 불굴의 윗세대 농민들의 모습이 포개어졌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나주 수세거부 투쟁, 이혜영 지음
타오르는 강 세트 - 전9권 - 문순태 장편소설 완결판소설가 문순태가 오랫동안 문학적 생명을 걸고 혼신의 힘으로 집필한 소설로,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겪은 이 땅 민초들의 이야기다. 1886년 노비세습제 폐지에서 시작하여, 동학 농민전쟁, 개항과 부두노동자의 쟁의, 1920년대 나주 궁삼면 소작쟁의 사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까지 반세기에 이르는 웅장한 구도의 작품이다.
우리 손으로 인재를 길러낸다는 취지에 많은 사람이 감격했다. 부자는 땅을 내고 가난한 사람은 쌀 한 됫박 콩 한 됫박을 내고 그것도 없으면 나무 땔감이라도 냈다. 1947년 9월 정식 대학 인가를 신청하러 서울로 갈 때는 트럭이 동원됐다. 설립동지회원이 무려 7만 2,000여 명이었으니 관련 서류가 트럭 한가득이었다. 동행한 학생 대표들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립인가를 받은 이후로도 회원이 계속 늘어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조선대 학원민주화 투쟁, 이혜영 지음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사회가 많이 혼란스러웠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대학 설립서류 같은 종이뭉치가 잘 보관되기 어려웠다. 혼란기는 누군가에겐 기회다. 박철웅은 서류를 없애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내몰아버렸다. 서민호는 야당 정치인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수난을 겪다가 잡혀가버렸다. 가장 큰 견제대상이 무대에서 사라졌으니 박철웅에게는 호기의 연속이었다. 그는 재단법인 조선대의 정관을 야금야금 고쳐 학교의 법적 소유자를 자신으로 바꿔치기했다. 1964년 즈음이 되니 정관에서 '조선대학교 설립동지회'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설립자'가 등장했다. 설립동지회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게 됐다! 역사 왜곡을 마친 그는 측근 사람들을 재단 이사회와 주요 교직원 자리에 앉혀 학교 운영권을 장악했다. 10만 명의 사람들이 쌀 한 됫박 콩 한 말까지 내놓고 벽돌 한 장도 함께 쌓은 민립대학이 그렇게 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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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님 얼굴 보기도 힘들었어요. 교수가 건설과장이나 현장소장으로 차출돼 나가서 수업에 자주 안 들어오셨으니까. (공과대 87) […] 1987년 당시 78개 학과에 정교수가 70명이었으니, 1개 과에 정교수가 1명도 없는 셈이었다. 게다가 교수들의 제1업무는 학생들의 동태 감시와 보고였다. 공과대 교수들은 박 총장의 기업체 직원처럼 차출돼 일하느라 수업에도 자주 빠졌다. 박철웅은 조선대 부속 중고교 교사들을 값싸게 채용해 교수 직위를 주고, 이들 일부를 심복으로 길들였다. 박 총장의 지시를 거부하기 힘든 이 교수들은 학생 탄압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은 교수재임용제를 도입했는데, 정부에 비판적인 교수들을 내모는 절차로 악용됐다. 박철웅은 1980년 8월부터 82년 2월까지 43명의 교수들을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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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사에 자양[자애로운 태양, 박철웅의 호]기가 펄럭이고, 모든 발표문은 '설립자님의 뜻을 받들어'로 시작했다. 전국에서 전두환 군사독재 반대투쟁 열기가 고조되던 1986년, 박철웅은 교수들이 그 흐름에 동참할까 봐 아침 일찍 출근시켜 집단 달리기를 시켰다. "총장님, 한 바퀴 더 돕시다!"라는 어느 교수의 목청 큰 아부는 추락한 조선대의 자조적인 상징이 되어 오래도록 회자됐다. […] 스스로 신이 된 총장은 교직원을 패고, 양심을 버린 일부 교직원은 학생을 팼다.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는 사회 도처에 폭력이 흔했다. 특히 1980년대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이 최고 권력자였다. 그럼에도 대학에서 교직원이 학생을 폭행한 것은 당혹스럽다. 교직원들은 군사정권의 수사기관을 닮아가더니, 학교와 시국에 비판적인 학생들을 잡아다가 급기야 고문까지 했다. 박철웅은 아예 무술 유단자나 군 특수부대 출신들로 학교 경비대를 뽑았다. 이들은 허리에 방망이를 차고 캠퍼스를 누비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집회가 열리면 달려 나와 학생들을 패면서 끌고 갔다. 조선대 의대신문은 1987년 9월 28일에 "최근 6개월간 학생처에서 폭력, 고문을 당한 학우들이 60여 명에 이르고 … 학우 증언에 따르면 칸막이가 있는 학생처 고문실 또는 여관에 끌려가 구타와 수모를 당했다"라고 보도했다. 한겨레신문은 1988년 7월 30일자에서 "조선대를 '광주의 대학'으로"라는 제목의 칼럼을 냈다. "… 부정입학, 공금 횡령, 교수의 어용화, 청부폭력, 대학의 사유화 등 학원의 비리를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광주 조선대학교 … 조선대 역사는 '박철웅 왕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 관선이사회와 교수협의회가 함께 조사한 결과, 박철웅 씨 부부의 횡령, 착복액은 425억여 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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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닮았다. 한국 정치의 어두운 권력자들이 조선대 권력자에 포개어진다. 국가운영을 잘하라고 뽑아놓은 대통령이 나랏돈을 자기 것처럼 쓰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도리어 국민에게 총을 겨눈다. 일꾼을 뽑아놨더니 학교를 먹어치우고 학생들을 탄압한다. 그뿐인가. 부실한 사업체를 여러 개 만들어놓고 문어발식 경영으로 덩치를 키운 한국 특유의 재벌문화, 정치권력과의 음험한 결탁, 반인권적인 군사문화가 조선대에 모두 들어 있었다. 박철웅 왕국사는 어두운 한국현대사의 축소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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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조선대 ‘박철웅 왕국사’는 너무 충격적이다.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네.
박철웅은 학원자율화 이후 활발해진 학생운동을 가만두지 않았다. 교직원들을 닦달해 학생들을 강하게 통제했다. 폭력이 난무했다. 급기야 1987년 여름, 교직원 회의에서 박철웅은 연로한 치과대학 병원장을 두들겨 팼다. 학생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이 소식에 많은 학생들이 치를 떨었다. 때가 왔다. 1987년 가을, 학생들이 대장정을 시작했다. 본관 총장실 점거농성이었다. 더이상 방법이 없어 택한 외골목의 절박함이었다. 농성은 1987년 9월 18일부터 1988년 1월 8일까지 무려 113일 동안 이어졌다. 총장실과 이사장실을 점거한 첫날에는 그렇게 길어질 것이라 예감하지 못했다. 그 가을 한국 사회는 6월항쟁 승리와 대통령 직접선거 열기로 뜨겁고 들떠 있었다. 조선대 점거농성은 조용히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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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조선대의 전설적인 전투조직 '녹두대'가 탄생했다. 첫 녹두대는 주로 2학년인 86학번 남학생들이 대원이 되고 85학번들이 중대장을 맡았다. 야전사령관도 있었다. 녹두대는 교내 집회나 외부 거리집회 때 시위대 맨 앞에서 학교 측이나 진압경찰들과 싸웠다. 한 손에는 쇠파이프, 또 한 손에는 화염병을 든 학생전사였다. 싸움의 목적은 상대를 깨부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싸우면서 시간을 벌어 대열 뒤쪽의 학생들이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폭력의 시대가 낳은 독특한 시위 분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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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릴레이로 혈서 플래카드를 쓰며 의지를 드높였다. 연대의 고리가 계속 이어졌다. 교수들이 학원민주화를 촉구하는 양심선언을 수차례 발표했다. 학부모 모임이 결성되고, 졸업한 동문들이 '구교(救校 학교를 구하다) 동문회'를 결성해 후배들 지원에 나섰다. 학생-교수-학부모-졸업생의 고리가 완성됐다. 수세에 몰린 박철웅 측이 결국 경찰에 지원 요청을 했다. 1988년 1월 8일 새벽, 진압경찰이 농성장에 몰려왔다. 진압 예정 통보를 받고 전날 밤 총장실에 모인 학생 지도부는 비통함에 빠졌다. "올 게 왔다"는 분위기였다. "새벽 되면 징역 가야 하는구나" 하는 비장한 분위기도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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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아수라장의 전쟁터에 이글대는 화재현장이 되어버렸다. 박공지붕까지 쫓겨 올라간 학생들은 절규했고 구호를 외쳤다. 두 학생은 화상을 입었고, 한 학생은 결국 옥상에서 몸을 날렸다. 그는 다행히 바닥의 매트리스로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이날 새벽 경찰력 1,500여 명이 투입됐고, 학생 45명이 구속됐다. 113일을 버틴 농성이 비통하게 막을 내렸다. 아니, 끝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더 큰 항쟁이 시작됐다. 분명 1월 8일 새벽 지도부 학생들은 끝까지 지키다가 무참히 진압을 당했다. 그러나 날이 밝자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학교로 밀고 들어와 전경들을 몰아냈다. 본관 화재의 잔해가 치워진 1월 10일부터는 대규모 시위가 연이어 계속됐다. 운동권과 일반학생들의 구분이 없어졌다. 시민들도 합세했다. 거대한 조선대인의 탄생이었다. 1987년 농성장에 찾아와 먹을거리와 돈을 쥐어주고 간 학생들과 1947년 민립대학 설립에 쓰라고 쌀과 콩과 돈을 내놓은 사람들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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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책증정] 쓰는 사람들의 필독서!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함께 읽기[김영사 / 책 증정]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편집자 & 번역가와 함께 읽기[김영사/책증정] 무작정 퇴사하기 전에, <까다로운 사람과 함께 일하는 법> 함께 읽기[벽돌책 독파] 주자와 다산의 대결 <두 개의 논어> 편집자와 함께 읽기 [김영사/책증정]수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세상은 아름다운 난제로 가득하다》함께 읽기
같이 연극 보실 분들, 구합니다.
[그믐연뮤번개] 3. [독서x관극x모임지기 토크] 우리 몸에 살고 있는 까라마조프를 만나다[그믐연뮤번개] 2. [독서x관극x번역가 토크] 인간 내면을 파헤치는 『지킬앤하이드』[그믐연뮤번개] 1. [책 읽고 연극 보실 분] 오래도록 기억될 삶의 궤적, 『뼈의 기록』
우리의 노동 일지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5. <쇳돌>[그믐연뮤클럽] 6. 우리 소중한 기억 속에 간직할 아름다운 청년, "태일"[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일을 즐기고 있나요?[그믐밤] 4.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시 읽기 @국자와주걱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기원 단장과 함께 스토리의 비밀, 파헤칩니다
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1. 호러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2. 액션 + 로버트 맥키의 액션스토리 탐험단 시즌 2 : 장르의 해부학 읽기 3. 신화 4. 회고록과 성장물
한국 희곡 낭독이 이렇게 재밌다니!
<플.플.땡> 4.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플.플.땡> 3 당신이 잃어버린 것 2부<플.플.땡> 2. 당신이 잃어버린 것플레이플레이땡땡땡
히어로와 함께
카라마조프의 피도스토옙스키와 29일을[그믐연뮤번개] 3. [독서x관극x모임지기 토크] 우리 몸에 살고 있는 까라마조프를 만나다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
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8.신의 화살, 치누아 아체베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7.더 이상 평안은 없다, 치누아 아체베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6.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혼자이기에 오히려 깊이 읽은 책들
<인간의 대지> 오랜만에 혼자 읽기 『에도로 가는 길』혼자 읽기천국의 열쇠 혼자 읽기거실의 사자 : 고양이는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고 세계를 정복했을까
부커상을 받았어요
[책증정][1938 타이완 여행기] 12월 18일 오후 8시 라이브채팅 예정! [이 계절의 소설_봄]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함께 읽기[Re:Fresh] 3. 『채식주의자』 다시 읽어요.[서울국제작가축제X비채]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함께읽기 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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