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D-29
만성리 검은모래해변 옆 길가에 여순사건 사적지 두 곳이 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 야산과 골짜기에, 거대한 죽음이 묻혀 있다. 1948년 11월 진압군이 수백 명의 여수 주민들을 끌어다가 총살해 죽인 후 흙과 돌로 묻어버린 '학살지'다. 만성리 주민들은 그 서늘한 골짜기 옆을 지나가지 못했다. 여수 시내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빙 돌아서 다녔고,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한다면 추모의 뜻으로 돌을 하나씩 던져두었다. 학살지에 쌓인 돌들은 탑을 이뤘다. 근처에 있는 '형제묘' 역시 학살터다. 형제가 묻혀 있는 게 아니다. 1949년 1월 진압군이 125명의 주민을 끌고 와 총살하고 불태워버렸다. 시신을 5구씩 눕히고 그 위에 장작을 쌓듯이 또 5구씩 쌓아 올렸다. 5층을 이룬 시신 더미가 모두 5개, 그렇게 125명이 불태워졌다.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 시신 더미는 사흘 동안 탔다. 유가족들이 와 보니 타버린 잔해들이 엉켜 있어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도, 분리해 낼 수도 없었다. 형제처럼 다 함께 있으라고 그대로 큰 묘를 만들고 하나의 비석을 세웠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여순사건, 이혜영 지음
형제묘를 등지고 서면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보인다. 수평선을 채운 육지는 경남 남해군이다. 그 앞에 애기섬도 솟아 있다. 눈에 보일 듯 말 듯 자그마한 그 섬도 학살지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여수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찰에 소집된 후 애기섬 앞바다로 끌려가고, 총살되고, 바다에 던져졌다. 율촌, 소라, 삼일, 쌍봉면 등 외곽지역 주민 120명이 수장됐다. 더 외진 섬의 주민들은 자기네 마을 앞바다에서 처형됐다. 극단적인 국가폭력의 증거물이 눈부신 해변 풍경 곳곳에 박혀 있으니, 여순사건 이야기는 허구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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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뒷면에는 비문을 적을 자리에 점 여섯 개만 찍혀 있다. 2008년의 일이다. 60주기 추모사업을 진행하는데 여수시는 희생이라는 말을 쓰기를 원했고 시민단체나 지역민들은 학살이라는 단어를 주장했다. 완성된 비석은 비문을 기다리고 있건만 희생과 학살은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결국 추모사업추진위는 점 여섯 개의 말줄임표로 처리해버렸다. 6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정리하지 못한 사연과 입장이 답답한 묵묵부답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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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잡지 『라이프』 도쿄지국장이었던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는 한국으로 건너와 여순사건을 기록했다. 1980년 5:18 때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있었다면, 1948년 여순사건 때는 미국인 칼 마이던스가 있었다. 그는 운동장의 모습을 회고했다. "한쪽에서는 그 (총살)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무서웠던 장면은 아녀자들의 숨 막힐 것 같은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너무도 조신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과, 얼굴이 옥죄어 비틀어진 것 같은 그들의 표정, 그리고 총살당하러 끌려가면서도 한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살려달라는 울부짖음도,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었다. 신의 구원을 바라는 중얼거림도, 다음 생을 바라는 한마디의 호소조차 없었다. 수 세기의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그들은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5·18을 상무관의 통곡소리로 기억했는데, 칼 마이던스 기자는 여순사건을 운동장의 침묵으로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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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주철희의 여순항쟁 답사기 1저자는 여순항쟁을 연구하고 이에 관한 여러 저서를 저술했다. 이번 책에서는 여순항쟁의 전개 과정과 더불어 관련 장소를 주요하게 다루었다. 여순항쟁의 진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해답은 바로 여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여수가 간직한 여순항쟁의 흔적을 찾아간다.
주철희의 여순항쟁 답사기 2『주철희의 여순항쟁 답사기』 시리즈는 여순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이며, 저자는 단순한 답사기를 넘어 역사연구자답게 겹겹이 쌓여 있는 사료로 역사를 재정립하는 데 힘썼다. 1권에서는 여수가 간직한 항쟁의 흔적을 찾아갔다면, 이번 2권에서는 여순항쟁의 또다른 지역, 순천에 남겨진 항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제1공화국의 민간인 학살은 경험을 축적하더니 1950년 한국전쟁 때는 경남 거창 신원면, 충북 영동 노근리, 경남 산청 방곡리 등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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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이야기 세트 - 전2권 - 그 여름날의 기억 + 끝나지 않은 전쟁노근리 이야기 세트. 노근리 이야기 1부는 분신과도 같던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감당하지 못할 슬픔에서 피어난 이야기이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기록이다. 2부에서는 노근리 사건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피해자대책위의 치열한 싸움의 기록을 담았다.
악마의 일기 - 묻힌 기억을 끄집어내는 민간인 학살의 기록작가주의 만화가 박건웅의 한국 근현대사 그래픽 노블. 충북 지역의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박만순 선생의 책,《기억전쟁》을 모티브로 삼았다. 선생이 16년 동안 직접 발품을 팔아 1,500여 자연마을을 돌아다니며 민간인 학살의 구술 증언을 청취해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박만순의 기억전쟁20여 년 동안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 온 박만순 씨가 『기억전쟁』, 『골령골의 기억전쟁』에 이어 세 번째로 내놓는 결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 중에서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 지역의 사례를 주로 다루었다.
바야흐로 보복의 시대였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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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의 한 유족은 형제묘에 적힌 비문을 지워버렸다. 비문 속 아버지 이름 때문에 계속 빨갱이 가족으로 몰린다는 이유였다.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는 가장 끔찍한 낙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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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시내와 만성리를 잇는 마래터널을 걸어서 통과하는 일은 묘한 경험이다. 일제는 동남아 식민지의 주민들을 데려다 조선 식민지의 터널공사를 시켰다. 저항을 누르기 위해서 아예 낯선 지역으로 데려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대신 동남아로 끌려갔다. 여수의 동남아 사람들은 정으로 바위를 쪼아가며 마래산을 뚫었다. 손으로 찍어낸 바위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마래터널은 100여 년 전 제국주의의 가혹함을 증언한다. 1948년 여수 주민들을 실은 트럭들이 그 터널을 통과해 만성리로 갔다. 대부분 종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한 행렬이었다. 이미 죽어서 실린 이들도 있었다. 시신들과 함께 탄 사람들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일제가 만든 터널을 지나 자국의 군대에 죽임을 당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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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건이 일어나면 후대 역사가들은 그 사건을 연구하고 성격을 규정한 후 이름을 붙인다. 이 과정을 정명(定名)이라고 한다. 1894년 농민들의 봉기 사건은 '동학농민운동' 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1960년 부정선거를 계기로 폭발한 전 국민의 저항 사건은 '4·19혁명'으로, 1980년 광주시민들의 저항 사건은 '5·18민주화운동' 또는 '5·18민중항쟁'으로 불린다. 여순사건은 정명은커녕 '반란'이라는 질긴 꼬리표를 간신히 뗀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하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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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자기 품에 안긴 사람들을 거두어들여 자기의 몸으로 만들었다 산에 숨은 사람들은 살아서 내려가야 할 길이 주검으로도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씩 둘씩 그렇게 쓰러져서 젊음은 흙이 되고 산이 되었다 - 이성부 '젊은 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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