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D-29
상무(尙武)는 무예를 숭상한다는 뜻이다. 상무관은 경찰들이 평소 체력단련을 하는 아담한 체육관이었다. 기합소리가 울렸던 체육관이 순식간에 통곡소리로 가득한 영안실이 되어버렸다. 해방광주 기간 상무관에 60여 구, 도청 뒤뜰에 14구. 하지만 모두가 알았다. 시민들 손으로 안치한 '운 좋은' 시신들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계엄군들이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는 것을. 참혹한 시신들은 정성껏 돌봄을 받았다. 젊은 여인은 양말 수십 켤레를 사다가 시신의 맨발에 하나하나 신기고 물을 떠다가 시신들의 얼굴을 닦았다. 열아홉 청년은 시신 지키는 일을 맡았다. 처음에는 무섭고 섬뜩했으나 나중에는 망자들과 동지가 되어 광주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20세 청년은 도청 빈터에 안치된 시신을 씻기고 염하는 일을 맡았다. 재수생이었던 그는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총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씻겨주었던 시신들과 함께 망월동 국립5·18묘지에 묻혀 있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1980년 5월의 절대공동체, 이혜영 지음
공동체와 역사를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 지킨 도청은 뜨거운 상징들로 가득하다. 그중 하나가 정문이다. 공무원들과 민원인들이 무심히 들고났던 일상의 문이었으나 1980년 5월 26일, 마지막 항전을 앞두고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경계선이 됐다. 제아무리 단단한 마음이라도 정문을 통과하며 흔들렸을 것이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것임을 알았을 테니까. 문을 바라보며 나가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갈등한 이가 있다. 죽음을 각오했지만 살고 싶어져 몰래 나간 이도 있다.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라고 문을 나선 후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지 않은 이도 있다. 흔들리고 미안하고 자책하는 마음들이 그 정문에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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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관을 둘러싼 5월의 숲이 싱그럽다. 4월에는 자줏빛 박태기꽃이 만발하더니 5월에는 새하얀 병아리꽃이 활짝 피었다. 위로의 빛깔처럼 여겨진다. 지금은 '민주평화교류원'으로 불리는 도청 민원실에 들어가 본다. 5월 27일 새벽, 항쟁지도부 대변인이 총에 맞아 죽은 공간이다. 오래된 격자무늬 창가에 서보면 창밖 숲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그 너머로 무등산이 웅장하다. 그 새벽, 그들은 칠흑 속에서도 무등산을 똑똑히 보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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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팔며 도시의 그림자 속에 살던 '황금동 여인들'은 5·18 때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광주시민 누구라도 분노와 자책감의 힘으로 거리로 뛰어나왔지만, 황금동 여인들은 편견의 벽까지 넘어야 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사태에 그녀들도 주저함이 없었다. 아니다. 그녀들이 주저 없이 나왔는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무수한 5·18 증언 속에 그녀들의 직접 증언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광장으로 나온 이후 거침없이 활약했음은 확실하다. 헌혈을 하고 주먹밥과 물을 나르고 취사를 도왔다. 상무관의 시신들도 돌보았다. 시신들의 발을 씻기고 수십 켤레 양말을 사다가 신긴 이도 황금동 여자였다. 시민군 가두방송을 하다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전옥주는 경찰서에서 만난 소위 술집 여자들을 기억했다. "아가씨 둘이 잡혀왔다. 술집에서 번 돈으로 도청에 가서 향을 사다가 피우고, 무명옷을 사서 시신에 입혔다. 그랬더니 간첩들한테 옷 사주고 협조했다고 잡혀 들어온 거다. 엄청 맞았다. 얌전하고 예쁜 그 아가씨들, 정말 서럽게 번 돈으로 좋은 일하고 와서 얻어맞고 한 달 이상 고생하고 나갔다. 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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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자치공동체는 증언할 기회를 갖지 못한 많은 사람의 힘으로 지탱되었다. 실제로 넝마주이, 구두닦이, 거지 등 연고가 뚜렷하지 않은 하층민들이 계엄군에 희생된 모습이 무수히 목격됐다. 그러나 희생자 집계에서 누락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도 행방을 추적할 가족이 없었다.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모습 역시 무수히 목격됐지만 그들의 직접 증언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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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절대공동체를 만나는 도보길 추천 전남대 정문(대학생들) - 무등경기장(택시운전사들) - 광천동 성당+시민아파트(들불야학 『투사회보』 제작자들) - 양동시장(주먹밥 만든 상인들) - 광주공원(시민군들) - 적십자병원(의료진과 헌혈하는 사람들) - 황금동(헌혈하는 사람들) - 5·18민주광장(시민들의 바다) 2시간 반~3시간 소요. 총 8km 중 광주천변 산책로 구간이 3.5km. 특히 5월 17일에 걸어서 도청 앞 5·18민주광장에 도착하면 5·18 전야제에 참여할 수 있다. 광주 원도심 풍속 탐사 코스로도 좋다. 광천동시민아파트 일대는 재개발이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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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님의 문장 수집: "1980년 절대공동체를 만나는 도보길 추천 전남대 정문(대학생들) - 무등경기장(택시운전사들) - 광천동 성당+시민아파트(들불야학 『투사회보』 제작자들) - 양동시장(주먹밥 만든 상인들) - 광주공원(시민군들) - 적십자병원(의료진과 헌혈하는 사람들) - 황금동(헌혈하는 사람들) - 5·18민주광장(시민들의 바다) 2시간 반~3시간 소요. 총 8km 중 광주천변 산책로 구간이 3.5km. 특히 5월 17일에 걸어서 도청 앞 5·18민주광장에 도착하면 5·18 전야제에 참여할 수 있다. 광주 원도심 풍속 탐사 코스로도 좋다. 광천동시민아파트 일대는 재개발이 예정돼 있다."
주남마을 인근 버스 총격 학살지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마을이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넘어가는 무등산 자락의 주남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주남마을 인근 산에 매복해 있다가 5월 23일, 화순 가던 버스에 총격을 가했다. 승객 18명 중 15명이 즉사하고 부상당한 남자 2명이 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암매장됐다. 유일한 생존자는 여고생 홍금숙이었다. 5·18 직후 주민들이 발굴한 두 시신은 DNA 감식 기술이 적용된 2002년 신원이 확인됐다. 마을 위쪽 암매장 발굴지에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마을 버스정류장에는 노란 미니버스 모양의 정류장이 단장돼 있다. 5·18 버스 학살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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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님의 문장 수집: "주남마을 인근 버스 총격 학살지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마을이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넘어가는 무등산 자락의 주남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주남마을 인근 산에 매복해 있다가 5월 23일, 화순 가던 버스에 총격을 가했다. 승객 18명 중 15명이 즉사하고 부상당한 남자 2명이 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암매장됐다. 유일한 생존자는 여고생 홍금숙이었다. 5·18 직후 주민들이 발굴한 두 시신은 DNA 감식 기술이 적용된 2002년 신원이 확인됐다. 마을 위쪽 암매장 발굴지에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마을 버스정류장에는 노란 미니버스 모양의 정류장이 단장돼 있다. 5·18 버스 학살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https://youtu.be/-6S7eadG02s?si=gz21sL3KKdBkQKS9 시청률 57%, 올림픽보다 관심 많았던 5·18 광주 청문회 | 크랩
옛 505보안부대 상무대가 '대외적인' 계엄분소이자 작전 지휘부였다면, 이곳은 어둠 속 은밀한 기획부대이자 사실상의 총 지휘부였다. 원래 국군 기밀 보안업무를 하는 곳이지만 5·18 전후 광주의 탄압과 분란을 치밀하게 기획·조작하고 주요 인사들을 감시, 연행, 고문, 취조했다. 2층에 대공과, 지하에 고문을 위한 밀실들을 갖춘 구조로 광주의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셈. 그들은 은어로 505보안부대를 '한지공사'라 부르고 근처 안기부 광주지부를 '세기상사'라 불렀다. 지금은 폐쇄된 채 낡아가고 있다. 광주시가 민주·인권 기념시설로 재단장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1980년 5월의 절대공동체, 이혜영 지음
국군광주병원 505보안부대, 안기부 광주지부와 근거리에 있었다. 당시 광주 외곽 신흥 주택가 속에 군대와 보안시설들이 자리해 있었던 셈. 부상 당한 군인, 연행한 시민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죽은 시민들을 검시했다. 이곳에서의 시민 불법 화장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1980년 5월의 절대공동체,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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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님의 문장 수집: "국군광주병원 505보안부대, 안기부 광주지부와 근거리에 있었다. 당시 광주 외곽 신흥 주택가 속에 군대와 보안시설들이 자리해 있었던 셈. 부상 당한 군인, 연행한 시민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죽은 시민들을 검시했다. 이곳에서의 시민 불법 화장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어쩌면 가장 많은 사상자가 머문 곳은 전남대병원이 아니라 화정동 국군광주병원일지 모른다. 계엄군이 실어간 부상자가 많았다. 신군부는 군병원의 현황을 절대 공개하지 않아 '군기밀'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 화정동은 시내와 멀었다. 도심과 상무대의 중간지점쯤 1~2층짜리 주택들이 지어지고 있는 신흥택지지구였다. 그 한적한 주택가 사이에 국군광주병원이 있었다. 상무대나 505보안부대로 끌려갔다가 계엄군의 폭행과 고문에 심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국군광주병원으로 옮겨졌다. 국군 관할의 병원이었으니 치료와 취조가 병행됐다. 그럼에도 시민들에게는 오로지 무자비함밖에 없는 상무대나 505보안부대보다는 병원이 더 나았다. '국군광주병원은 천국, 보안부대는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곳에서도 투쟁들이 조용히 벌어졌다. 의료진이었다. 주로 전남대와 조선대 의대 출신이었던 공보의들은 환자가 아직 낫지 않았다며 치료를 계속하곤 했다. 치료가 완료됐다고 사실대로 계엄군에 보고하면 그 시민은 다시 상무대로 이송돼 조사와 고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 병원들은 서로살림의 최전선이었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1980년 5월의 절대공동체, 이혜영 지음
‘나는 들불에 와서 슬픔을 알았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들불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불이 꺼진 것은 시들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들불의 활동 기간은 1978년 7월부터 1981년 7월까지다. 그 사이를 5·18이 관통한다. 5·18을 전후로 7명의 강학이 세상을 떠났다. 들불야학 근거지는 혹독한 탄압에 시달렸다. 남은 강학과 학강들은 광주천변 제방에서 수업을 재개했지만 예전의 웃음소리는 사라졌다. 결국 들불은 1981년 7월 하순 4기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노동야학으로 전국에 번지자'는 소망을 담아 들불이라고 이름 지었다.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들불은 한국민주화 역사에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큰 불로 번졌다. 일찍 하늘의 별이 된 들불 강학들을 후대 사람들은 '들불 7열사'라고 부른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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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한 강학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유인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하듯 물었다. 윤상원은 다그쳤다. "계엄군 저놈들은 지금, 총을 든 시민 한 명보다, 천 명의 시민을 움직이게 만드는 한 장의 유인물을 더 무서워한단 말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들불팀의 유인물은 광주시민들이 피해상황을 파악하는 언론도 됐고 항쟁의지를 다지는 결의문도 됐다. 며칠 후 들불팀은 시내 도청 옆 YWCA로 옮겨가 본격 유인물을 만들었다. 시민들의 제보도 점점 쏟아졌다. 들불팀의 유인물은 훗날 5·18의 대표 기록물 중 하나가 됐다. 『투사회보』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윤상원은 항쟁지도부 대변인 자격으로 도청 본관에서 외신 기자 회견을 열었다. 그는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국내 언론이 통제된 채 유일한 '외부'였던 외신기자들을 향해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광주항쟁의 의미를 밝혔다. 그는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입니다"라고 회견을 매듭지었다. 죽음을 자청하고서 이토록 차분하고 단호한 브리핑을 하는 시민군 대표를 외신기자들은 잊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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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님의 문장 수집: "윤상원은 항쟁지도부 대변인 자격으로 도청 본관에서 외신 기자 회견을 열었다. 그는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국내 언론이 통제된 채 유일한 '외부'였던 외신기자들을 향해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광주항쟁의 의미를 밝혔다. 그는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입니다"라고 회견을 매듭지었다. 죽음을 자청하고서 이토록 차분하고 단호한 브리핑을 하는 시민군 대표를 외신기자들은 잊지 못했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 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 그는 한국인에게 흔치 않은 곱슬머리였다. 그의 행동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무장한 동료들의 허둥거림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침착함이 있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1980년 5월 27일 | 광주 시민군 지휘자 윤상원 사망, 김형민 지음
계엄군의 진압이 예고된 5월 26일 밤 그는 어린 시민군들과 여자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며 부탁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총을 내려놓고 울먹이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소멸이 다가오는데도 윤상원은 후대의 길을 조직했다. 오월광주의 한복판에서 그는 당대의 사건을 넘어선 '역사'를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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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님의 문장 수집: "계엄군의 진압이 예고된 5월 26일 밤 그는 어린 시민군들과 여자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며 부탁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총을 내려놓고 울먹이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소멸이 다가오는데도 윤상원은 후대의 길을 조직했다. 오월광주의 한복판에서 그는 당대의 사건을 넘어선 '역사'를 전망했다."
달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여 내보낼 사람들을 내보낸 뒤 남은 사람들은 카빈총을 쥐고 예정된 최후를 기다린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도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했던 예수와 같이.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고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며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는 여성의 방송 말미에 드르륵 드르륵 M16 소총 소리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광주 도청 진입 작전이 전개됐고 끝까지 총을 놓지 않고 싸우던 윤상원은 계엄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목숨을 잃는다. 그의 바지에는 전날 만났던 외신 기자들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보안사 요원이 찍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는 두 팔을 벌린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누워 있다. 사망한 뒤 누였던 매트 위로 불 붙은 커튼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의 시신은 불에 그을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광주가 이 나라의 십자가였다면 그는 그 위에서 못 박히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며 죽어 간 목수의 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역사에는 예수를 닮은 이들이 많다. 육신으로는 부활하지 못하였으되 수많은 청춘들의 결단과 노래 속에 부활한. 윤상원, 그도 그랬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1980년 5월 27일 | 광주 시민군 지휘자 윤상원 사망, 김형민 지음
사람들은 이제 5월 광주를 서서히 지워간다.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광주의 '구체적 실감'이 사라진 사람들의 가슴속엔 민주, 열사, 항쟁, 성지, 기념식 같은 '역사적 추상' 만 남았다.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오월 | 1999년_5월, 김규항 지음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출판인이자 칼럼니스트인 김규항씨의 칼럼집. 지난 1998년부터 『씨네 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등에 연재했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김규항의 글은 간결하고 평이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듯한 힘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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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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