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팔님의 문장 수집: "김영철은 따뜻한 공동체를 꿈꿨다. 가난한 이들이 차별 없이 행복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일구고 싶었다. 그는 광천시민아파트를 무대로 그 꿈을 실현해가던 주민운동가였다. […]
1977년 가을, 김영철과 김순자 부부는 광천시민아파트 A동으로 이사를 왔다. 결혼 2년차,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김영철은 주민운동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에서 지도자 교육을 받고 YWCA전남협동개발단 간사가 되었다. 그가 파견된 광천시민아파트는 이름만 아파트지 빈민가였다. 여러 세대가 함께 쓰는 화장실은 심지어 재래식이었다. 수용소처럼 양쪽으로 쪽방이 줄지은 복도는 어둡고 언제나 악취로 찌들어 있었다. 시민아파트 주민 180여 세대의 75%가 생활보호대상자였다.
'A동 반장' 김영철의 헌신으로 광천시민아파트는 활기를 띠어갔다. 청년회를 꾸리고, 어린이 주말학교를 운영하고, 아침마다 아이들과 함께 아파트를 구석구석 청소하고, 동네 신용협동조합을 인수해 수익모델을 만들고, 아이들과 주민들이 통장을 개설해 미래를 설계하게 하고…. 주민들은 김영철을 무척 신뢰하고 좋아했다. 시민아파트의 든든한 주민대표였다. 김영철이 아파트 안에 야학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을 무렵, 이웃한 광천동성당에 들불야학이 생겼다. 귀가 번쩍 뜨이는 희소식이었다. 김영철은 자연스럽게 들불의 식구가 됐다. 시민아파트와 들불이 합친 광천동 공동체는 더욱 훈훈해졌다."
“ 윤상원과 김영철과 박용준은 모두 5·18 항쟁지도부의 시민군이었다. 세 사람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5월 27일 새벽의 광주를 지켰다. 김영철은 두 아우를 모두 잃었다. 윤상원은 도청 민원실 자신의 곁에서, 박용준은 도청 건너 YWCA 건물에서. 그는 살아서 숨 쉬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 상무대 영창에서 죽음을 자청했지만 원한다고 와주지 않았다. 이후 18년 동안 그는 버티기 위해 환상의 시간을 창조해야 했다. 그 시간 속에서는 모두가 살아 있었다. 생전의 그는 "아니야, 상원이 살아 있어. 용준이 살아 있어. 저기 있어" 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 세계 속에서는 동생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장난치며 결코 저물지 않는 봄날 야유회를 즐기고 있기를. 파란 '추리닝' 차림의 영원한 오락반장으로 누비고 있기를.
현실의 시간은 예외 없이 가혹했다. 5·18을 진압한 신군부의 공안당국은 광천시민아파트를 불순분자들의 소굴로 낙인찍었다. 주민들도 살아가자니 당국에 협조해야 했고, 김영철 가족을 멀리해야 했다. 김영철·김순자 부부는 '간첩부부' 소리를 듣고 공동체운동의 꿈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광천시민아파트를 꿋꿋이 지켰다. ”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들불야학 사람들, 이혜영 지음
문장모음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