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밑줄, 메모

D-29
[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동생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동생에게 그렇게 미안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동생은 너무 황당해서 화도 내지 못하다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 언니가 누구한테 해코지라도 당하고 온 줄 알았지 뭐야. 가방이야 나중에 다시 사면 되지.” ]
[ 며칠 뒤 우리는 비똥이에 대한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루이 비통 가방을 든 사람만 봐도 “비똥이, 비똥이”라고 속닥대며 키득거렸다. 서럽거나 속상한 일도 동생과 이야기하면 재미있는 농담거리처럼 느껴졌다. 함께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올 때마다 “공짜로 운동하고 좋네”라는 농담을 질리지도 않고 되풀이했던 것처럼. 회사에서 엉엉 울었던 일을 집에 돌아와 깔깔 웃으며 이야기했던 것처럼. ]
[ 그러나 동생에게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 끝내 농담이 되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다. 화장실 쓰레기통에 무참히 버려져 있던 지갑을 발견한 순간의 기분처럼. 훔쳐갈 가치조차 없는 낡은 싸구려 지갑은 루이 비통 핸드백으로 감출 수 없는 나의 현실이었다. 가방을 가져간 사람은 본의 아니게 나의 진짜 현실을 알게 된 셈이었다. ]
[ 우리가 사는 주택가에는 현실이 있었다. ]
[ 집주인 아주머니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이사 온 첫 겨울에 보일러가 멈춰버리자, 아주머니는 세입자의 부주의가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보일러 교체 비용을 우리에게 떠넘기려 했다. “이거 그냥 수명이 다 돼서 그런 거예요.” 수리 기사가 그렇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아쉬운 표정으로 돈을 지불했다. 다음 해 여름 에어컨 배관을 연결하기 위해 벽에 타공을 해도 되냐고 양해를 구했을 때에는, 유리창을 깨서 파이프를 밖으로 내보내고 이사 갈 때 창문 값을 물어내라고 했다. ]
[ “배관 구멍을 만들어두면 세입자가 유리창을 깨고 가는 일을 반복하지 않아도 돼요.” 내 말에 아주머니는 벌컥 화를 냈다. “만약에 다음 세입자가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으면 어떡할래? 그 사람이 구멍을 메워달라고 하면 어떡하고? 그럼 내 돈을 써야 하잖아.” ]
[ 아주머니는 자주 ‘만약에’라는 가정법으로 시작해 ‘내 돈을 써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몇 년 뒤 내가 그 집을 나오면서 에어컨을 두고 가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 돼.” “무료로 드리는 거예요. 이 집에 옵션이 생기는 거라고요.” “만약에 다음 세입자가 에어컨을 원하지 않으면 어떡할래? 그러면 철거하느라 내 돈을 써야 하잖아. 나중에 에어컨이 고장 나면 또 어쩌고? 그때도 수리하느라 내 돈을 써야 하잖아.” ]
[ 주택가 길목에서 매일 러닝셔츠 바람으로 담배를 피우는 50대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나와 동생이 지나갈 때마다 몇 초 동안 얼굴을 빤히 쳐다본 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히죽히죽 웃으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시선이 얼굴을 지나 목덜미, 가슴,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순으로 내려가면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기분이었다. 한여름에 소매가 없는 원피스나 다리가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을 때면 제발 그가 나와 있지 않기를 바랐다. ]
[ ‘가래침 테러리스트’인 택시기사도 있었다. 좁은 골목이 어지럽게 이어지는 주택가에는 주차 공간이 없었다. 그나마 주차가 가능한 곳은 큰길에서 주택가로 이어지는 초입이었는데 가장 목 좋은 자리에는 항상 개인택시가 주차되어 있었다. 허가되거나 지정된 주차 장소가 아니었지만 택시기사는 그곳을 전용 자리로 여겼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차를 대면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가래를 끌어올린 뒤 “캬악 퉤!” 하는 소리와 함께 누런 가래침을 앞 유리창에 뱉어놓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없는 차주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부었다. ]
[ 건너편 주택에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싸움을 하는 부부가 살았다. 남자와 여자의 욕설이 번갈아 들리고 나면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에는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고 가끔은 경찰이 출동했다. ]
[ 비닐봉지에 대충 쓰레기를 욱여넣어 남의 집 앞에 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틀린 맞춤법으로 쓴 경고문이 있었다(“이곳에 또 쓰래기를 버리면 고발하겠읍니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는 사람, 눈이 마주쳤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 건드리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 “위층에 사는 선생님이시지요?” 며칠 뒤 건물 입구에서 마주친 1층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나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새로 이사 오신 선생님이시네요. 반갑습니다.” ‘선생님’은 이 동네에서 주고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호칭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아저씨, 아줌마, 아가씨, 가끔은 어이, 형씨 등으로 불렀다.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상대를 선생님이라고 존칭하는 사람은 내가 만난 동네 주민 가운데 그가 유일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 바깥이 소란스러웠던 어느 저녁, 창밖을 내다보니 두 남자가 집 앞에서 다투고 있었다. 주차든 쓰레기든 자주 싸움이 일어나는 동네라 웬만한 일에는 심드렁했지만 그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둘 중 한 사람이 ‘1층 선생님’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붓는 상대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라거나 “조금만 진정하시죠” 같은 말을 했다. 무엇보다 그 와중에도 상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남자가 누구 하나 후려칠 기세로 날뛰기 시작하자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선생님 제발, 선생님 제발”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 잠시 후 남자는 싸움을 말리러 나온 1층 선생님의 부인과 딸을 향해, 차마 옮겨 쓸 수 없는 성적 모욕의 뉘앙스가 강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 순간 1층 선생님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더 이상 상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그만하라고, 이 새끼야!” 욕설이라기보다는 울부짖음처럼 느껴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고 싶어졌다. ]
[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동네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나는 매사에 ‘내 돈을 써야 하는 일인가’만 생각하는 사람, 폭력적인 시선으로 남을 쳐다보는 사람, 남의 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는 사람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 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끝내 화만 남은 이들에게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웃들을 좋아할 수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 ]
[ 등단한 뒤 열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소설의 원고료는 매당 만 원이 안 되었고 책은 1쇄도 다 팔리지 않았다. 창작지원금을 합쳐 3천만 원 남짓한 돈이 내가 5년 동안 소설로 벌어들인 수입의 전부였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글을 쓰면 쓸수록 가난해졌다. 애초에 직업이 될 수 없는 일을 직업으로 여겼는지도 몰랐다. 월세부터 생활비까지 거의 모든 돈을 동생에게 의존했다. 나의 글은 가족을 착취한 결과였다. ]
[ 언제부터인가 동생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의 집이나 상황을 농담거리로 삼지도 않았다. 밤늦게 퇴근하면 동생은 피곤한 얼굴로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물으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일 안 좋지, 뭐.” 한밤중에 주방이나 화장실에 가다가 방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곤 했다. 나는 대부분 그 소리를 못 들은 체했지만 가끔은 머뭇거리다 문을 열고 물었다. “괜찮아?” 동생의 모습 대신 침대 위에 동굴처럼 솟아 있는 이불이 보였다. 이불 속에서 동생이 베개로 얼굴을 틀어막은 채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불을 켜거나 이불을 젖히지 못했다. ]
[ 동생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내가 전등도 켜지 않은 방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밤중에 주방이나 화장실에 갈 때면 불 꺼진 내 방에선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빛이 새어 나왔고, 나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모니터 속의 백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게 자신이 기억하는 그 집에서의 언니 모습이라고. ]
[ “따로 살자.” 어느 날 동생이 말했다. “왜?” “이제 나도 서른이니까.” ]
[ 동생의 책상 위에는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이 놓여 있었다. 나는 동생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는 구절을 읽고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왜 그런지 동생의 회사에 찾아간 날이 떠올랐다. 나는 로비에서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의 인테리어도,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근사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쪽으로 걸어오는 동생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슬립 드레스에 디자이너 브랜드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동생이 그 장소에 잘 어울려 보이는 데 안도하면서도 그 아이가 매일 느낄 괴리감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한 사람들로 가득한 건물을 빠져나와, 만원 전철을 타고, 어둡고 가파른 골목을 걸어올 때의 기분을. 그동안 동생은 누구에게도 우리의 남루함을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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