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과 선택으로 종교를 깊이 멸시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표현은 앞으로도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 습니다. 사실 모든 교회에 그러한 실천적 무신론자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으로, '맛 잃은 소금'이라는 표현으로 종종 언급되던 사람들이랄까요. 그런데 솔직한 마음으로 사역하면서 답답한 부분은 우리 교회가 그러한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라 하더라도, 가정교회만 꾸준히 잘 나와주고 있다면, 충분히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요? 너무 많은 에너지가 가정교회 유지에 쏟아지고 있어서, 역으로 그것만 잘 한다면 다른 '그리스도인 다움'에 대한 다양한 요소들을 일절 못하고 있어도, 무한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지는 경험을 일절 못하고 있어도, 그냥 꽤 괜찮은 가족으로 대우받는 것은 아닐까요? 과거 기성교회에서는 그것이 '직분'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집사, 권사, 장로가 되는게 문제다!"라는 비판지점으로 기능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직분은 사라졌으나 그 요인이 '공동체 유지'로 전이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꿈꾸는 사역자, 현대신학 정복하기!
D-29
백령이
여자목사
공동체와 연관해서 볼 때 (고대에 만들어진)실정종교는 곧 공동체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이며 더 나아가 이 종교를 처음으로 세운 사람과 공동체가 맺는 관계이다." p42.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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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 신 개념은 우리 의식이 구성했는가 아니면 우리에게 주어졌는가의 택일 문제는 칸트 이후 무의미해진 만큼, 이제 카우프만에게 중요한 것은 현대 사회의 위기와 도전 앞에서 '어떤' 신 개념과 세계 개념을 구성할 것인가라는 실용주의적 문제이다. (중략)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서구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언어에 자리 잡은 유일신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분석한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74p, 카우프만,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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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카우프만은 유일신론의 문법에 따라 모든 것을 상대화하면서도 역사를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초월적인 신 개념을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82p, 카우프만,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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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교리는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라기보다 따라야 하는 것이므로, 신학자의 과제는 교리가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적용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89p, 린드벡,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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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목사
맞습니다 신학함은 고정된 교리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풀어지는지를 배워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저도 종종 '이 교리를 배우려고 이 씨름을 한거였어?'라고 생각합니다.
백령이
“ 철저하게 공동체의 '삶의 형식'으로 파악하려 한다. 종교 전통은 복잡다단한 상징과 기호체계와 문법을 가지는데, 이는 공동체의 '권위 있는 문서'를 매개로 구성원들에게 전달된다. 즉, 종교적 의미란 텍스트 외부의 실재로부터 전달되거나 개인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 주어지는 특정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얻어진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91-92p, 린드벡,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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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헬머는 교리를 "신적 실재가 주는 선물을 언어와 역사로 담아내는 신학 장르"라고 정의한다.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94p, 헬머,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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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헬머가 강조하기를, 이러한 변증법적 역동성이 신학에 있어야 "교리에 매이지 않고 때로는 교리와 상반되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96p, 헬머,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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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 헬머가 슐라이어마허에게서 배운 것은, "성서에 이야기된 나자렛 예수와의 만남에는 2천 년 동안의 설교자들이 복음의 텍스트를 탐구해 왔음에도 아직도 고갈되지 않은 과잉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97p, 헬머,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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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목사
“ 현실 세계 너머 초월적인 분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세계의 운명에 마주하고 참여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려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하신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p52.,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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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 판넨베르크가 종말론적 역사관을 사유의 핵심 범주로 삼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종말 이전 역사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잠정적이고 부분적이라는 바울의 말(1고린 13:12)을 신학적 체계에 녹여냈다. 모든 지식이 잠정적 성격을 가진다면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는 조직신학이라 하더라도 시공간과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타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 오히려 조직신학은 성서를 통해 인류에게 전해졌고, 교회의 전통을 통해 전달되어 온 진리를 변화된 언어와 형태로 '매번 새롭게' 서술해야 한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114p, 판넨베르크,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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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솔직히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계속해서 "그래서 도대체 판넨베르크가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진리라는게 어떻게 만들어지는걸까" 의문이 깊어졌다. 사실 집에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1권이 있는데, 뭔가 논리전개 속도가 너무 느려서 안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뭔가 확실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고 선언한 바르트의 뒤를 이어서 인간의 모든 지식이 결국엔 유한하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정하는 것. 그리고 그 설정한 바 안에서는 현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설명을, 최선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애쓰는 발버둥을 보여주는 것, 그런데도 마지막에는 그 결과물이 여전히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학이 판 넨베르크의 시도가 아닐까?
이 시도는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 같다. 어느 수준이 되면 더 이상 사유하기를 멈추고, 적당히 "나만의 신학적 틀"을 만들어놓고, 그 틀을 기준으로 세상을 쉽게 평가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에게 무거운 도전을 주는 것 같다. 너무 쉽게 답을 내리지 말아야겠다. 동시에 너무 쉽게 답을 내리는 누군가에게 확실하게 반기를 들어야겠다.
백령이
“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사도 4:12)라는 사도의 고백은 그리스도교인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주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본문은 "그리스도교 포괄주의의 핵심, 달리 말하면 온 인류를 향해 교회가 지닌 사명의 원천"을 알려준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116-117p, 판넨베르크,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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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이런 포인트들이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현대신학을 싫어하는 포인트인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이 역시 판넨베르크가 종말론적인 역사관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합리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추구해낸 결과물이 아닌가? 나의 언어로 정리해보면, 판넨베르크의 시도는 다음과 같다.
: 그는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으니 모두들 예수 믿으러 안으로 들어오시오!"라고 외치는 신학이 가지는 한계들을 지적한다. 결국 그 주장은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전히 반대로 사유한다. 모든 종류의 구원이 예수에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라면, 현실 속에 나타나는 소위 '구원받은 것 같은 존재들'이 사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아닐 수도 있다. 결국 최종적인 종말의 순간이 됐을 때, 하나님께서 근본주의적인 믿음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만 구원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최종적인 종말의 순간이 됐더니, 사실 '예수 밖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선포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많은 고민이 드는 대목이다.
백령이
“ 아름다움을 하느님에게 돌리는 것은 ...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력한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용어는 그러한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압도하는 매력과 유인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128p, 셰리,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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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를 그리스도인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직접적으로 신비한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거나.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매마른 진리처럼 느껴진다면, 아무리 '참'이라 한들 매력적이지 않다. 또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과도한 희생을 요청하는 무거운 도덕처럼 느껴진다면, 아무리 '선'이라 한들 매력적이지 않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참과 선이 아니라, 오히려 '미'가 아닐까?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아름답게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너무 편협하게 생각해왔던 것은 아닐까.
뒷부분에 나오는 "아름다움이 없는 세계는 얼마나 초라할까"라는 옮긴이의 표현이 떠오른다. 손호현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마다, 항상 저 이야기를 반복하셨던게 기억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내 삶을 아름답게 살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그 beautiful과 beautify의 관점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다. 특히나 사역에 뭔가 막힘이 느껴지는 이 시기에,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게 우선이 아닐까? 그게 없어서그런지, 삶이 참 초라하다.
백령이
“ 근대 정신이 자연을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는 독립적 실체로 파악하려 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연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봄으로써 신론과 창조론을 긴밀히 결합한다. 자연이 자율적이거나 가치 중립적이라는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다. (중략) 신학자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언어의 가능성을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서 찾지 않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혜를 통한 '피조적 지성의 성화'라는 맥락에서 발견해야 한다. 한 마디로 신학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한 생각을 질서 잡음으로써 교회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쁨이 넘치는 행위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141p, 웹스터,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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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 20세기 말~21세기 초 일련의 신학자들은 근대성이 신학에 주입한 '거짓 겸손'에 주눅 들지 말고, 그리스도교인은 자신이 속한 전통이 가진 지적 자원을 자랑스러워하고 이로부터 당당히 자기주장을 펼칠 것을 주문했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147p, 웹스터,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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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이
“ "천상적 참여는 지상의 삶이 천상적 차원을 지님"을, 달리 말하면 땅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임재하고 활동하시는 장소임을 보여줄 신학적 논의를 풍성히 차려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핵심에는 플라톤 철학만으로는 발견하지 못할 신비인 하느님 아들의 성육신이 있었다. ”
『신학의 영토들 -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159p, 부어스마, 김진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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