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남부두는 지옥이었어. 세상이 또 한 번 뒤집히려고 하지 않겠니. 한 번 뒤집혔을 때 살판났던 사람들은 그대로 죽을 판이 된 거지.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울고불고 악을 쓰고 헌병들은 배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심지어는 총도 쐈다. 배는 한정되어 있고 타려는 사람은 정원의 열 배는 되었을 테니까. 아니 백 배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반공 유격대의 '수괴'였잖냐. 그래서 직계 가족들은 태울 수 있도록 조치를 받았나 봐. 그런데 지금도 황망한 것이 글쎄, 할아버지가 우리를 태우지 않고설랑 "여기 있으면 반드시 죽을" 교회 동료들을 태우겠다는 거야. 장손인 큰형, 그러니까 네 큰아버지만 같이 가는 걸로 하고 말이다. 여자하고 애들이니 죽이지는 않을 것이고 다시 유엔군이 북진하면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심산이었지. 이건 육지에 서 있어도 바다에 빠지는 느낌이라. 내가 살면서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네 고모 둘하고 둘째 큰아버지하고 나하고 할머니하고 다섯 명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어.
그렇게 넋을 잃고 다섯 명이 울고 있는데 우리 집에 머물던 장교 하나가 우릴 알아봤어. 왜 울고 있느냐고 묻기에 사정을 설명했더니 험악한 욕지거리를 내뱉는 거야. "아무리 목사라지만 동료 구하자고 지 새끼 내버리는 인간이 어디 있어!" 그 장교가 우리를 데리고 가서는 헌병 장교한테 목사 가족이고 여기 있다간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니 배를 태워 주시오 부탁을 했고 용케 자리가 났어. 배에 오르는데 성경 학교 때 배운 노아의 방주라. 부둣가에 새까맣게 몰려들어 울부짖는 사람들 얼굴 하나하나가 지금도 기억난다. 울기도 지쳐서 꺽꺽거리던 여자들, 아이들, 두 손 들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던 아저씨들……. ”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1950년 12월 14일 | 흥남 철수, 김형민 지음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1년 365일의 날짜를 이정표 삼아, 우리의 마음에 '오늘'처럼 남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동시대를 위로하고 인간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보여 준 이들, 관습과 편견을 뒤집은 전설 같은 일들, 언젠가 또 세상을 시끄럽게 할 사건들. 그렇게 웃고 울고, 기뻐하고 아파하고, 선택하고… 그러다 시대를 바꾸기도 했던 365일 '오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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