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광기에 가득 차 소리치던 에이해브가 처음으로 스타벅에게 털어놓는 솔직한 '인간적 외로움'이죠. 복수의 가면 뒤에 숨겨진 노인의 쓸쓸한 독백이에요.
모비딕 마지막 항해
D-29

kontentree

서설
작년에 쓰던 낫이 반쯤 벤 풀밭에 던져진 채 녹스는 것처럼 초록빛 벌판에서 녹처럼 자는 거야. 스타벅!
『모비 딕 - 하』 132. 교향곡,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문장모음 보기

서설
"안데스 산비탈 아래 어딘가에서 건초를 만들고 풀을 베던 사람들은 갓 베어 낸 풀 들 사이에서 잠을 잘 거야, 스타벅. 잠을 잔다고? 그래,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결국에는 다들 벌판에서 자니까. 잠을 자? 그래 ... "
피비린내 나는 바다 한복판에서 에이해브가 꿈꾸는 평화로운 육지의 삶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푸른 벌판에 버려져 녹슬어가는 낫의 이미지는, 결국 파멸을 향해 가느라 평범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스러져갈 에이해브 자신의 운명을 서정적으로 은유하는거죠.

kontentree
132장, 괴물의 가면을 벗은 인간 에이해브의 눈물
바다는 마치 하늘과 연주를 하듯 감미롭고 웅장한 풍경을 자아내고, 이 기적 같은 날씨 속에서 에이해브 선장은 평생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사람다운 눈물을 떨구죠. 그리고 부선장 스타벅에게 자신의 고독을 고백해요.
그 는 고향에 두고 온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왜 이 차가운 바다에서 평범한 행복을 버린 채 낫처럼 녹슬어가야 하는지 회한에 잠깁니다.
하지만 스타벅이 "지금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하는 그 순간, 에이해브는 다시 눈을 번쩍 뜨며 거대한 운명의 벽을 체감합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실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지레가 나를 돌리고 있다는 깨달음. 에이해브는 결국 구원의 밧줄을 뻗는 스타벅의 눈을 외면하고, 다시 바다 너머 어두운 악마적 분신, 페달라의 눈을 응시합니다.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닫아버린 셈이에요.
지독한줄만 알았던 에이해브가 던지는 서글픈 인간적 고뇌와 "에이해브는 과연 에이해브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여섯모서리
에이해브는 자기가 모비딕을 쫓는 게 아니라, 우주가 창조되기 전부터 짜인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거잖아요. 하늘의 심부름꾼, 나무 지레 라고 여기선 표현했구요.
자신이 신에게 도전하는 거대하고 주체적인 영웅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운명의 부하'라고 스스로 말하는 부분이 기억나요.
우리 삶도 내 의지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거대한 흐름에 떠밀려 가는 건 아닐까 하는 무력감도 들고요.
잔해
좋은 말씀 들으니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게 되네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읽었어요. 에이해브가 정말 운명의 꼭두각시일까요? 아니면 운명이라는 핑계 뒤로 도망치는 것은 아닌지..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기기만, Bad faith 이 떠올랐습니다. 에이해브는 지금 스타벅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고, 고향의 아내와 아이에게 돌아갈 수 있는 '선택권, 자유의지가 분명히 자신에게 있다는 걸 직감한 거죠.
하지만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복수의 항해가 전부 틀린 선택이 되어버리잖아요. 그 무거운 책임감을 감당 할 수 없으니, 오히려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 10억 년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야. 그러니 난 멈출 수 없어"라며 자신의 선택을 운명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비겁한 인간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설
와 두 분 말씀 들으니 132장의 텍스트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요. @잔해 님의 '자기기만'이라는 해석을 들으니, 에이해브가 스타벅에게 말한 '초록빛 벌판에서 녹슬어가는 낫'의 비유가 다르게 다가오네요.
에이해브가 정말 영혼 없는 꼭두각시거나 완벽하게 미친 괴물이었다면, 굳이 육지의 평화로운 삶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었겠죠. 그는 자신이 무엇을 버리고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는 인간인 거예요.
따뜻한 인간성, 가족, 평화를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악마적 복수심을 선택해야만 하는 그 모순. 멜빌은 제목을 왜 하필 교향곡(Symphony)이라고 했을까요? 어울릴 수 없는 '인간 에이해브'와 '괴물 에이해브'의 두 마음이 한 몸에서 부딪치며 내는 비극적인 불협화음, 그 자체가 교향곡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