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해브가 흔들리다가 결국 마음을 닫아걸게 된 결정적 계기가 이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잔인함에 책임을 묻던 그가, 결국 134장에 이르러 '10억 년 전 예행연습'이라는 운명론 뒤로 숨어버리는 순간이죠.
모비딕 마지막 항해
D-29

kontentree
영혼의너그러움
에이해브는 광막한 바다나 하늘, 심지어 저 차가운 '신'보다 내 곁에 있는 동료 스타벅의 눈을 바라보는 게 낫다고.. 눈 속에서 '고향, 구원'을 보아서죠. 하지만 다랑어가 날치를 사냥하는 비정함에, 잔인한 세상을 만든 게 누군가. 내가 고래를 심판하려는 재판관인데, 미쳐버린 나를 심판할 재판관은 어디 있는가? 라며 회의하죠. 그래서 또 급발진..
잔해
“ 흰 고래의 등에는 대형 상선의 선체 위로 우뚝 솟은 울긋불긋한 깃대마냥 최근에 꽂힌 긴 창이 부러진 채 꽂혀 있었으며,
고래 위를 차양처럼 덮고 앞뒤로 날던,
발톱이 부드러운 새 떼 가운데 한 마리가 이따금 이 장대에 가만히 내려앉아 꼬리의 긴 깃털을 삼각기처럼 펄럭였다.
”
『모비 딕 - 하』 133. 추격 - 첫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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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울긋불긋한 깃대와 마지막 삼각기의 시각적 대비,
발톱이 부드러운 새라는 디테일.
수많은 작살이 꽂힌 채 피흘리는 고래의 등과 그 위로 내려앉은 부드러운 새 발톱.
잔혹한 사투의 현장을 이토록 아련하게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인간의 선악을 초월한 존재에 가깝다는 게 느껴져요.
여섯모서리
“ 에우로페를 납치해서 우아한 뿔에 매달고 헤엄치는, 흰 황소로 변한 제우스라도, 곁눈질로 그녀에게 뜨거운 추파를 보내며 크레타 섬에 마련한 사랑의 보금자리를 향해 황홀한 속도로 달려가는 최고의 신 제우스라도!
저토록 거룩하게 헤엄치는 찬란한 흰 고래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
『모비 딕 - 하』 133. 추격 - 첫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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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모서리
흰 황소로 변한 제우스와 에우로페 신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Europe)'를 유혹하기 위해 눈부시게 하얗고 아름다운 황소로 변신했다 해요. 에우로페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황소의 뿔에 올라타자, 제우스는 그녀를 태우고 바다를 가로질러 크레타 섬으로 납치해 갔다고 해요.
- 이 에우로페의 이름에서 '유럽'이라는 지명이 유래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매혹적인 신의 변신마저도 찬란한 흰 고래를 능가하지는 못했다라며 모비딕을 신화적 존재 이상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신성으로 격상시킵니다. 처음 등장한 모비딕은 괴물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자연으로 묘사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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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매혹적일 정도로 평온한, 오, 고래여! 지금껏 그런 식으로 무수한 사람을 현혹하여 파멸시켰으면서도 여전히 너를 처음 보는 이들의 눈앞에서 미끄러지듯 수면을 가르는 고래여.
『모비 딕 - 하』 133. 추격 - 첫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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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쿼드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모비딕과 첫 대면을 했죠. 처음 모습은 그리스 신화 속 매혹적인 장면을 압도하며 등장합니다. 하지만 곧 본색을 드러낸 폭력적인 모습을 암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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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보트 밑에서 문이 열린 대리석 무덤처럼 번득이는 아가리를 쩍 벌렸다.
흰 고래는 그런 식으로 잔인한 고양이가 생쥐를 다루듯 삼나무로 만든 가벼운 보트를 흔들어 댔다.
『모비 딕 - 하』 133. 추격 - 첫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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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tentree
자연의 '매혹적인 이중성'을 보여주는 문장
경이로움 ➡️ 공포
모비딕은 처음에 '터키 양탄자'나 '한낮의 초원' 같은 눈부신 평화로움으로 등장하지만, 순식간에 보트를 부수며 '대리석 무덤'과 '잔인한 고양이'로 돌변합니다. 자연이 가진 매혹적이면서도 냉혹한 이중성을 가장 문학적으로 보여주죠.
매혹적이기에 더 잔인한 파멸의 덫 같습니다.
그 아가리( 죄송합니다. 본문을 살릴 수 밖에 없네요^^) 속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에이해브는 자신을 걱정하는 선원들을 밀쳐내며 이렇게 말해요.
" 에이해브는 지구에 사는 몇백만 명 속에 홀로 서 있다. 그의 주변에는 신도 인간도 없어! 추워, 춥구나. 몸이 덜덜 떨린다."

서설
그 금화는 내 거야. 애초부터 내 것이 될 운명이었어. 나뿐이야. 너희들은 아무도 저 흰 고래를 제일 먼저 발견할 수 없었을 거야
『모비 딕 - 하』 133. 추격 - 첫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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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자기기만' 토론을 확증하죠
에이해브가 고래를 최초로 목격하고 박수치며 금화를 챙기는 장면입니다. 앞서 우리가 토론한 운명이라는 핑계 뒤로 도망치는 심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기가 기어코 먼저 찾아내 투사하려 했으면서, 그것을 애초에 내 운명이었다고 외치는 집착과 확증 편향을 보여주네요.
renee
자기 암시와 추동력, 비슷한 말인것은 같아요.
에이해브는 지금 미쳐버릴 것 같은 고독과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바로 앞, 132장 교향곡에서 스타벅스의 눈을 보며 고향과 가족을 떠올리고 내가 왜 이 잿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이런 고생을 하나 하며 흔들렸던 노인입니다.
그런 그가 다시 복수극으로 뛰어들기 위해서는 이건 내가 선택한 미친 짓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운명이다라는 자기 암시가 필요했을거고 도망치기 위한 핑계라기보다 무너져가는 의지를 세워 사투로 나아가게 만드는 추동력이요.
영혼의너그러움
선원들을 무시하는 오만보다 이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뿐이라는 독단적 책임감. 에이해브는 자신이 "지구에 사는 몇백만 명 속에 홀로 서 있다"고 느낍니다. 10억 년 전부터 짜인 각본, 운명 속에서, 다른 선원들은 그저 휩쓸려 온 조연일 뿐이고 모비 딕과 맞설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자신 하나뿐이라는 자의식의 표현인데 요즘은 자의식이 비대하다며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긴 하네요.

서설
아 저는 작게 본 것이구요. 사실 허먼 멜빌이 그린 '비극적 영웅'의 특성이 있는 것 같아요. 크게 보면요.
'여섯모서리'님이 남기신 것처럼, 에이해브는 자신이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비극적 인간입니다.
그가 정말 비겁하게 운명 뒤로 숨는 인간이었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파멸의 장엄함을 느끼지 못했을 거에요. 오히려 "이것이 파멸로 가는 길, 운명임을 알면서도, 내 손으로 그 금화를 쟁취해 기어코 끝을 보겠다고 선언하는 인간의 처절한 반항으로 해석할 때 에이해브라는 캐릭터는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kontentree
운명 편향에 빠진 집착으로 볼 수도 있지만, 뒤집어 보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파멸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 운명으로 들어가는 순간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여섯모서리
근데 왜 굳이 이 운명으로 꼭 걸어 들어가야만 하나요? 잃어버린것의 가치도 알면서...

kontentree
에이해브가 그 비극적 운명으로 기어코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미련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기 때문이에요.
이 답답함과 의문이야말로 모비 딕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독자들을 잠 못 들게 만든 핵심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하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잔해
무릎 꿇고 살 바에는 서서 죽겠다는 오만과 존엄이요.
에이해브에게 모비 딕은 단순히 다리를 잘라간게 아니라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냉혹한 자연의 거대함, 혹은 인간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는 불합리한 신의 운명 그 자체입니다.
만약 여기서 에이해브가 스타벅스의 말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남은 평생을 신이 정해준 한계에 순응하고 무릎 꿇은 패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에게는 운명에 순응하며 비겁하게 연명하는 삶이 고래에게 죽는 것보다 훨씬 더한 지옥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파멸 을 선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와 존엄을 증명하려 한 것이 아닌지.. 이렇게 크게 봐야만 설득이 되죠. 이런 분도 있으셔야 하는게 맞는 것 같아요.ㅋㅋㅋㅋ

kontentree
에이해브는 40년 동안 바다에서 외롭게 지휘관으로 살며 자의식을 키워왔어요. 그런 그에게 모비 딕이라는 존재는 그의 인생 전체를 집어삼킨 거대한 벽이 되었어요.
고래를 잡느냐, 내가 죽느냐는 극단적인 이분법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요. 고향의 아내와 아이, 선원들의 목숨조차도 이 사투 앞에서는 빛을 잃을 만큼 에이해브의 정신은 모비 딕과 동기화되어 있어요. 그 벽을 부수지 못하면 어차피 살아도 산 것이 아니기에, 그는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비딕에게 영혼이 먹혀버린 거죠. 우리 현실에서도 영혼이 먹힌 사람들 뉴스에서 종종 보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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