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마지막 항해

D-29
에이해브는 자기가 모비딕을 쫓는 게 아니라, 우주가 창조되기 전부터 짜인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거잖아요. 하늘의 심부름꾼, 나무 지레 라고 여기선 표현했구요. 자신이 신에게 도전하는 거대하고 주체적인 영웅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운명의 부하'라고 스스로 말하는 부분이 기억나요. 우리 삶도 내 의지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거대한 흐름에 떠밀려 가는 건 아닐까 하는 무력감도 들고요.
좋은 말씀 들으니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게 되네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읽었어요. 에이해브가 정말 운명의 꼭두각시일까요? 아니면 운명이라는 핑계 뒤로 도망치는 것은 아닌지..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기기만, Bad faith 이 떠올랐습니다. 에이해브는 지금 스타벅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고, 고향의 아내와 아이에게 돌아갈 수 있는 '선택권, 자유의지가 분명히 자신에게 있다는 걸 직감한 거죠. 하지만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복수의 항해가 전부 틀린 선택이 되어버리잖아요. 그 무거운 책임감을 감당할 수 없으니, 오히려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 10억 년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야. 그러니 난 멈출 수 없어"라며 자신의 선택을 운명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비겁한 인간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와 두 분 말씀 들으니 132장의 텍스트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요. @잔해 님의 '자기기만'이라는 해석을 들으니, 에이해브가 스타벅에게 말한 '초록빛 벌판에서 녹슬어가는 낫'의 비유가 다르게 다가오네요. 에이해브가 정말 영혼 없는 꼭두각시거나 완벽하게 미친 괴물이었다면, 굳이 육지의 평화로운 삶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었겠죠. 그는 자신이 무엇을 버리고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는 인간인 거예요. 따뜻한 인간성, 가족, 평화를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악마적 복수심을 선택해야만 하는 그 모순. 멜빌은 제목을 왜 하필 교향곡(Symphony)이라고 했을까요? 어울릴 수 없는 '인간 에이해브'와 '괴물 에이해브'의 두 마음이 한 몸에서 부딪치며 내는 비극적인 불협화음, 그 자체가 교향곡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서설 님 '불협화음의 교향곡'이라는 표현 소름 돋네요... @잔해 님 말씀대로 에이해브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운명을 핑계 댄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럼 에이해브가 던진 질문, "에이해브는 과연 에이해브인가?"라는 말은 결국 "나는 내 삶의 진짜 주인으로서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집착의 노예로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되네요. 소설 속 선장의 독백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추는 거울로 느껴져요
오 세 분의 대화를 들으니 더 깊이 이해가 되요. 에이해브의 눈물을 '자기기만'과 '불협화음의 교향곡'이란 해석 짱입니다! 에이해브가 '운명의 피해자'인지 아니면 '집착을 운명이라 믿는 선택자'인지요.
@잔해 님 의견 흥미롭습니다. ‘자기기만’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에이해브가 비겁하게 도망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가장 절정으로 느끼고 분노하는 영웅으로 보여요.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가 떠오르는데요.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리면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 짓을 반복해야 하는 부조리한 운명 말이죠. 에이해브는 지금 자신이 모비딕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이 싸움의 끝이 파멸, 바위가 떨어짐, 이라는 것을 132장의 눈물을 통해 완벽하게 깨달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부조리한 운명에 순응하여 육지로 돌아가는 대신, "그래, 내 결말이 파멸일지라도 나는 내 발로 끝까지 걸어가 저 거대한 고래와 부딪히겠다"며 정해진 운명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가장 뜨거운 '반항적 인간'의 선언으로 생각해 보고 싶어집니다.
@영혼의너그러움 님 말씀을 들으니 에이해브가 장엄해 보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의 영웅주의 뒤에 가려진 ‘폭력성과 고립’에 주목하게 됩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내 자아에서 벗어나 눈앞에 있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132장에서 스타벅은 에이해브에게 고향의 아내와 자식이라는 가장 순수한 '타인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췄어요. 에이해브도 순간 그 눈빛에 흔들리며 눈물을 흘렸죠. 하지만 에이해브는 결국 그 살아있는 얼굴을 외면하고, 자기 영혼의 어두운 닮은 꼴 '페달라, 배화교도'의 눈을 응시합니다. 진짜 비극은 신이나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거대한 복수심과 에고Ego를 지키기 위해 눈앞에 있는 타인의 고통과 사랑을 저버린 에이해브의 자기중심성에 있는 것 아닐까. 배에 탄 선원들을 사적인 복수극에 동반 자살로 이끄는 꼴이니까요.
네 분의 대화를 보니까 왜 멜빌이 이 장의 제목을 @서설 님 말씀대로 하필 교향곡(Symphony 이라고 했는지 완벽하게 이해가 가네요. 운명론, @잔해 님의 자기기만, @영혼의너그러움 님의 부조리한 반항, 그리고 @renee 님의 타자에 대한 책임감까지... 도저히 한 인물 안에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철학적 질문들이 에이해브라는 노인의 갈라진 내면에서 부딪치며 내는 '불협화음의 오케스트라' 자체네요. 우리 존재가 가진 모순적인 심연을 한 편의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멜빌은 이 장을 통해 연주해 낸 것 같아요.
와 뜨거운 사유가 펼쳐졌네요. 다섯 분의 대화를 보며 제 마음이 가만있질 않네요. 에이해브의 눈물을 운명과 자기기만, 부조리한 반항, 그리고 타인의 얼굴이라는 철학적 화두로 풀어내 주셔서요. 에이해브는 어쩌면 이 모든 모순을 온몸으로 안은 채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인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불꽃 튀는 철학적 대비 속에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가장 와닿은 에이해브의 모습은 어느 쪽이었는지 두고 두고 생각해 보자구요. 😊
생각에 잠긴 하늘은 여인의 모습, 억센 사내 같은 바다는 잠든 삼손의 가슴... 태양이 마치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듯 바다에게 온화한 대기를 넘겨주는 것 같다.
모비 딕 - 하 132. 교향곡,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 새들은 여성적인 하늘의 온화한 상념, 고래와 황새치와 상어들은 남성적인 바다의 강하고 거칠고 잔인한 생각들. 내면은 대조적, ... 겉모습은 음영과 명암.... 둘은 하나,... 둘을 구분하는 것은 성별 뿐. " 132장의 초반부 멜빌의 문장들을 그냥 보내긴 아쉽죠. 하늘과 바다를 묘사한 이 대목을 보세요. 온 우주가 결혼식을 올리듯 평화로운데, 에이해브의 내면만 지옥인 대조를 보여줘요.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서라고. 내가 인간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바다나 하늘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신을 올려다보는 것보다 그게 낫겠어. 그 눈에서 먼 고향 집이 보이는데..
모비 딕 - 하 132. 교향곡,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 이건 마법의 거울이군. 자네의 눈 속에 내 아내와 아이가 보여.... 낙인찍힌 에이해브가 모비 딕을 추격할 때에도 자네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 안 돼." 말씀대로 에이해브는 순간 스타벅에게서 구원의 기회를 보았던 것 같아요. 그의 이 절규가 그 증거 아닐까요. 신을 올려다보는 것보다 동료 인간의 눈을 보는 게 낫다고 했던 그가, 왜 그 눈을 외면하고 다시 복수로 돌아섰을까요?
40년간의 황량한 고독... 40년 동안 어떻게 바싹 마르고 소금에 절인 음식만 먹었는지. 이런 잿빛 머리카락은 재에서만 자라지! 백발은 쓰디쓰고 통렬한 조롱이야!
모비 딕 - 하 132. 교향곡,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 고독한 지휘관은 해안의 노예 맹렬히 물보라를 일으키며 먹잇감을 쫓았네, 사람이라기보다 차라리 악마처럼! 내가 백발을 뒤집어쓸 만큼 충분한 즐거움을 누렸던가. " 에이해브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비극적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저 다랑어가 날치를 쫓아가 물어뜯게 하는 건 누군가? 재판관이 법정에 끌려 나온다면 판결은 누가 내리는가?
모비 딕 - 하 132. 교향곡,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에이해브가 흔들리다가 결국 마음을 닫아걸게 된 결정적 계기가 이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잔인함에 책임을 묻던 그가, 결국 134장에 이르러 '10억 년 전 예행연습'이라는 운명론 뒤로 숨어버리는 순간이죠.
에이해브는 광막한 바다나 하늘, 심지어 저 차가운 '신'보다 내 곁에 있는 동료 스타벅의 눈을 바라보는 게 낫다고.. 눈 속에서 '고향, 구원'을 보아서죠. 하지만 다랑어가 날치를 사냥하는 비정함에, 잔인한 세상을 만든 게 누군가. 내가 고래를 심판하려는 재판관인데, 미쳐버린 나를 심판할 재판관은 어디 있는가? 라며 회의하죠. 그래서 또 급발진..
흰 고래의 등에는 대형 상선의 선체 위로 우뚝 솟은 울긋불긋한 깃대마냥 최근에 꽂힌 긴 창이 부러진 채 꽂혀 있었으며, 고래 위를 차양처럼 덮고 앞뒤로 날던, 발톱이 부드러운 새 떼 가운데 한 마리가 이따금 이 장대에 가만히 내려앉아 꼬리의 긴 깃털을 삼각기처럼 펄럭였다.
모비 딕 - 하 133. 추격 - 첫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울긋불긋한 깃대와 마지막 삼각기의 시각적 대비, 발톱이 부드러운 새라는 디테일. 수많은 작살이 꽂힌 채 피흘리는 고래의 등과 그 위로 내려앉은 부드러운 새 발톱. 잔혹한 사투의 현장을 이토록 아련하게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인간의 선악을 초월한 존재에 가깝다는 게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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