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마지막 항해

D-29
멜빌은 에이해브를 단순한 ‘비겁자’로 보지 않았고, 그렇다고 에이해브의 말대로 ‘우주는 10억 년 전에 다 짜인 각본’이라는 맹목적 결정론에 동조하지도 않았어요. 멜빌이 에이해브의 입을 빌려 던진 이 고백의 진짜 결론이자, 멜빌 본인의 확고한 우주론을 문학 플롯을 통해 위에서 말씀드렸죠.
가끔은 우리의 뇌가 차분한 나머지, 내용물이 얼어 버린 유리잔처럼 낡은 두개골이 쩍 갈라져 뇌를 흔들어 댄다고 생각했지. 그런데도 머리카락은 자란단 말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자라는 걸 보면 열기가 머리카락을 자라게 만드는 모양이야. 이건 그린란드 얼음 틈새나 베수비오 화산의 용암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자라는 흔한 풀 같은 거잖아.
모비 딕 - 하 134. 추격 - 셋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얼어붙은 뇌 - 이성의 마비 - 와 그럼에도 화산재 사이에서 자라나는 풀 같은 머리카락 - 멈추지 않는 증오의 생명력 - 의 대비. 이성이 마비되어 뇌가 얼어붙고 깨질지언정,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집착과 증오의 생명력, 머리카락만큼은 화산 용암 틈새를 뚫고 나오는 잡초처럼 맹목적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묘사입니다. 바람이 감옥과 병동의 고통을 외면한 채 순결한 척 불어오는 것에 분노하며,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동굴에 숨겠다고 말하는 에이해브를 보세요. 그는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한 대자연, 신의 태도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이네요. 악마처럼 보였던 에이해브가 오히려 바람보다 인간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결정적 지점인가요.
생각은 냉철하고 침착한 행동이며, 그래야 해. 그런데 우리의 못난 가슴이 두근거리고, 못난 두뇌는 지나치게 고동치거든. 가끔은 우리의 뇌가 너무 차분한 것 같아. 얼어붙은 것처럼
모비 딕 - 하 134. 추격 - 셋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이성(Thinking)에서 충동(Feeling)으로의 전회 에이해브는 근대 철학의 기초인 데카르트적 이성,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을 과감히 버립니다. 그에게 사유(思惟)는 인간의 두개골을 쩍 갈라지게 만드는 '냉철하고 얼어붙은 감옥'일 뿐입니다. 그는 오직 '느낌, 순수한 디오니소스적 충동'만을 선택하며, 이를 통해 신이 짜놓은 도덕적 질서를 초월하려 합니다.
사나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젓는구나. 양털처럼 순결한 척 불어오다니, 더러운 바람. 부정하고 비참한 세계로는 가지 않고 동굴 같은 곳으로나 기어 들어가 살금살금 돌아다닐 텐데.
모비 딕 - 하 134. 추결 - 셋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형체도 없으면서 인간을 때리고 조롱하는 비겁한 운명, 바람에 비하면, 비록 미쳤을지언정 온몸을 부딪쳐 싸우는 '인간 에이해브'가 훨씬 더 고결하고 용감하다는 오만이죠. 단순히 미치광이의 헛소리인 줄 알았던 이 독백 속에, 자연의 위선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거인의 환멸이 숨어 있었다는 게 의외입니다.
에이해브라는 인물의 내면을 지배하는 반이성주의적 광기와 비물질적 운명에 대한 실존적 공포, 그리고 마침내 그 운명과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비극적 동화가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고백이 앞으로 절절해요.
비물질적 작인(Immaterial Agent)에 대한 분노 에이해브를 진정으로 미치게 만드는 것은 눈앞의 고래가 아닙니다. 타격할 수도, 반격할 수도 없으면서 인간을 채찍질하고 사지로 몰고 가는 '형체 없는 우주의 법칙 - 바람, 운명, 악의'입니다. 그는 물질적 육체가 없으면서도 실제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이 거대한 부조리에 치를 떱니다.
아이러니한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애) 가장 소름 끼치는 지점은 독백의 결말입니다. 에이해브는 자신을 때리고도 도망치는 비겁한 바람을 저주하다가, 막판에 "바람을 위해 건배!"를 외칩니다. 목표를 향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장 불어가는 무역풍의 그 잔인하고 강력한 속성이, 바로 자신의 영혼을 지배하는 맹목적 광기(Monomania)와 정확히 일치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증오하던 운명 그 자체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에요.
짜증 나고 분노하게 하는 것들은 전부 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물질로서는 몸이 없어도 작인으로서는 실체가 있다. 거기에 가장 특별하고, 교활하며, 사악한 차이가 있으니!
모비 딕 - 하 134 추격 - 셋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이 문장은 전체를 관통하는 형이상학적 핵심. 에이해브가 왜 흰 고래에게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철학적 이유를 해명해요 인간을 파멸시키는 진짜 악, 인간의 유한함, 죽음, 신의 냉혹함은 형체가 없습니다. 바람처럼 실체가 없기에 창을 겨누어도 그냥 통과할 뿐이며 반격할 수도 없습니다. 에이해브는 이 '비물질적인 작인,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지배자'을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몸뚱이가 없기에, 그 사악한 대리인(Agent)으로서 눈앞에 존재하는 거대한 물질인 '흰 고래, 모비 딕'를 표적 삼아 들이받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의 미학으로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우주적 '숭고(Sublime)' 앞에서 인간의 자아가 붕괴하기 직전 내지르는 단명(短鳴)이라고 하네요.
에이해브는 절대 생각을 하지 않아. 오로지 느끼고, 느끼고, 느낄 뿐. 생각하는 건 주제넘어. 그런 권리와 특혜를 누리는 건 신뿐이야.
모비 딕 - 하 134. 추격 - 셋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이성의 거부와 광기의 정당화. 에이해브가 근대적 합리성을 완전히 초월했음을 보여줘요. 이성은 타협하고 계산하게 만들지만, '느낌, 열정'은 인간을 폭주하게 만듭니다. 에이해브는 사유하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고통과 분노를 온몸으로 감각하는 '괴물적 실존'을 선택합니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비극관을 잘 표현한 문장이라 생각해요.
싸움에서 마지막에 통렬한 공격을 날리는 것은 바람이니, 창을 겨누고 달려가 봐야 통과할 뿐이다. 하! 비겁한 바람은 벌거벗은 사람을 때리면서도 반격은 한 대도 맞지 않는다.
모비 딕 - 하 134. 추격 - 셋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 Absurde'의 시각적 형상화. 인간은 우주를 향해 실존적 투쟁의 창을 겨누지만, 우주는 허공처럼 인간의 공격을 무시하고 지나치며 오히려 인간에게 통렬한 종말을 고합니다. 반격할 대상조차 없는 절대적 고독과 허무를 말하는 최고의 문장이네요.
저 영원한 양극에 걸고 말하나니! 바로 이 무역풍,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힘, 이처럼 변함없고 강력한 무언가가 내 영혼의 배를 밀어 간다! 바람을 위해 건배!
모비 딕 - 하 134. 추격 - 셋째 날,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이 독백의 반전이자 클라이맥스. 방금 전까지 바람을 '더럽고 비겁하고 사악한 것'이라며 썩 꺼지라고 저주하던 에이해브가, 그 바람에게 건배를 제의해요. 흔들리지 않고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무역풍의 맹목성이 자신의 영혼의 궤적과 같음을 인정하는 순간이죠.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는 '가해자와의 호전적 동화'이며, 자신의 파멸 항해를 우주적 섭리로 격상시키는 광기에 다름아니네요.
결국 에이해브의 이 장황한 독백은 생각하기를 거부한 독재자의 퇴행이란 생각이 드네요. 사유를 하면 선원들의 목숨과 윤리적 책임이 눈에 보이니까, 나는 오직 느끼고 느낄 뿐이며 이 무역풍이 내 영혼을 밀고 가니 어쩔 수 없다며 자기 광기를 우주적 현상으로 신비화하는 무책임으로도 보여지는게 어쩔 수 없네요. 바람을 위해 건배 하는 모습은 심히 이기적인 자아도취로 밖에...
잔해님은 에이해브의 그 거대한 고독을 인정 안하시네요 😅 에이해브가 분노하는 대상은 고작 고래가 아니라 몸뚱이도 없으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사악한 실체, 운명과 신 입니다. 반격할 수도 없는 그 거대한 허공, 바람을 향해 창을 겨누는 프로메테우스적 절망을 보라고 하는대요. 다들 철학자들이요. 마지막에 바람에게 건배하는 것은 핑계가 아니라, 자신의 비극적 파멸을 기꺼이 왕관처럼 머리에 쓰는 '초인(Übermensch)'의 당당한 태도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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