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rain님의 대화: 시어머니는 차라리 병원을 나가서 죽게 되더라도 지금 이렇게 병실에서 겪는 괴로움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하셨는지 모릅니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살아 있다’는 감각의 단절에 고통스러워하신 것 같아요. 시어머니는 평소에 자신의 주관대로 행동하고 실행하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열이 남아 있고 병의 원인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퇴원을 결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과 달리 70대 후반의 노인이 소변줄을 유지하고 있으면 방광 기능과 하체 근력이 급속도로 쇠퇴합니다. 이미 원인을 알 수 없는 염증에 대처하기 위한 각종 항생제의 처방으로 부작용이 온몸에 나타나고 있었고요. 시어머니께서 주어진 환경에 맞춰 순응하는 성격이거나 병원을 벗어났을 때의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면 병실을 박차고 나올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병실에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실 때도 있었기 때문에 시어머니의 결정을 신뢰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시어머니께서 병원을 뛰쳐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머니 없는 고아들이 되어 마음에 파인 커다란 구멍을 쓸어내리며 깜깜한 밤을 견뎌 왔을지도 모릅니다.
시어머니의 상태가 집으로 돌아온 후 더 나빠질지라도 퇴원하고자 하는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해 드리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걸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뜻을 강요하지 않고 어머니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나와 남편이 자식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을 도와드리는 것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놓고 보니 자식을 키울 때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자녀로서 부모가 시키는 대로 정해진 길이 아닌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하는 길을 갈 때 부모와 마찰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그 길로 가면 잘못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면서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다.’ 라며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무의식중에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도 잘못 판단할 수 있는데 말이죠. 이때 자녀가 선택한 길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부모가 자신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식을 응원하고 도와준다면 자식을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실패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모습까지 대견하게 바라봐 주고 응원해주는 것도 부모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죠.
죽음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도 살아온 모습의 일부일 뿐이죠. 우리는 살아오는 내내 죽음의 모습을 조각해 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처 다듬지 못한 부분이나 완성하지 못한 부분은 마지막 순간에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예의 바르고 세련된 형태가 아니라 우리에게 고통을 주며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생生의 마무리를 위해 남겨두었던 부분이 아닐까요? 삶이 혼자 힘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죽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마지막 문단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제가 지금 어떤 모습을 조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고통이 너무 크지 않기를, 도와주는 힘이 곁에 가까이 있기를 빌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