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7707님의 대화: 저도 올해로 암환자를 진료한 경력만 해도 15년, 내과의사로 일한 것은 22년차이지만, 여전히 암이 진행하여 임종이 머지 않았음을 고지하는 것은 매 환자마다 다르고 저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는 특히 항상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번에 이 책을 읽고 @cjlove52 님이 수집해주신 이 문장이 저도 기억에 남았고, 오늘 낮 외래 시간에 이 표현을 써보았습니다. 최근까지 했던 항암에 반응이 없고 암이 더 나빠지기만 하는 상황이었고 다른 약을 바꿔서 할 지 그냥 그만 항암을 관둬도 그게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는 몸 상태의 환자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써볼 수 있는 약(일반적으로 항암제는 제일 먼저 쓰는 약이 제일 좋은 약이고 후순위로 갈수록 치료 반응율이 높지 않고, 사실 거의 이 정도 우선순위의 약을 쓸만큼 환자분들이 견디기도, 생존하기도 쉽지 않은데) 한 가지가 더 남아는 있는 상태여서 쓸려면 쓸 수는 있지만 사실상 약효과가 유의미하게 있으리라 보기는 통계적으로 어려운 경우였습니다. 아마 책 어딘가, 그리고 여기서 문장수집을 누군가 해주신 것 중에 의사의 40%가 효과가 없으리라 여겨지는 처방을 한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아마 이게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 일부러 빌런처럼 약을 줬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오늘 제 환자 사례 같은 경우에 해당할 겁니다. 아마도.
어차피 유감입니다, 이런 말은 외교나 정치인들이나 하는 말이지 실제 구어에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고, 이런식으로 말해보았습니다.
"일단 제일 먼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두분(환자와 배우자 보호자)께서는 뭐가 제일 중요한 것 같으세요? 예를 들어 어떻게든 치료를 지속한다 할 수도 있고, 계속되는 항암치료가 사실 더 효과가 없고 이제 아까 설명드린 새 약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면 차라리 이제 그만 항암하고 좀 편하게 쉬는 것도 한 방법일 수도 있구요."
아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죠. 약이 있는데 안할 수가 있나요. 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겁니다. 항암치료 계속 해야죠.
이 답변이 꼭 틀렸다고는 절대 할 수 없지요. 개인적인 판단은 할 수야 있지만, 환자/가족 입장에서 어떤 의견이나 입장이 맞다 틀렸다는 식으로 논하는 것은 성립되기 어려운 논의입니다. 어느 누가, 별것 아니라는 듯 다 내려놓고 이제 편하게 숨쉬다 갈래요,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다만 한편으로 책과 현실은 또 다르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냥 설명을 죽 제시하고 다음에 보자고 말하는 대신 뭘 원하고 제일 중요하게 여기느냐는 (개방형의) 질문을 하는 바람에 면담과 설명이 35분을 넘어가고, 그분은 결국 끝까지 결사항전 태세로 항암제를 다시 받아갔습니다.
덕분에 2시 5분에 예약된 바로 그 다음 환자는 2시 45분이 넘어서야 차례가 돌아왔고 부산에서 올라온 그는 기차 시간을 놓쳐서 취소했다며 밖에 애먼 간호사에게 컴플레인을 하고 뒤이어 진료지연이 50분 가까이 되면서 저도 식은땀 흘려가며 조바심 내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분명한건 정답은 없다는 점입니다. 이 책을 읽고나면 마치 부질없는 항암치료는 멋지게 관두고 짧은 여생을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러 어디론가 떠나든지 아니면 집에서 안락하게 지내야 맞는 것 같지만, 현실의 환자들이 원하는건 또 많이 다릅니다. 반복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한참 잘못 생각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구요. 제가 이런 저런 쪽으로 유도해도 주관이 확고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체중이 20 kg 씩 빠지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내 피곤해서 누워지내는 상태에도 꿋꿋하게 항암치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라도 정말 임종직전 상태가 된다면 자의든 타의든 포기할 수 밖에 없지만, 아직 일상생활이 그나마 유지되는 때에 크게 도움이 안될 것 같은 확률이 높은 치료를 관두고 집에서 편히 지내시라는 권고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분도 강릉에서 서울로 왔다 갔다 하시는 분이거든요. 지금까지도 비급여 고가 항암치료를 해오시던 상황이었고.
어쩌면 너무 임종에 임박하기까지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학적 충동을 자제하려는 인식확산이 의료진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국민 캠페인을 벌여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지난 4~5월에 종합병원 외래에 자주 갈 일이 있었는데, 진료실 앞 복도에 빽빽하게 앉아있던 환자들이 떠오르는 글입니다. 오래 기다려 의사선생님을 만나도, 뒤에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제 마음이 다 급해지더랬습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환자에게 엠마누엘 박사(들)이 얘기한 ‘해석적 관계‘를 요구하기엔 확실히 무리일 것 같네요. 그렇다면 대안으로, 이 책에서 소개된 수전 블록의 질문들(환자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상태가 더 나빠졌을때의 목표가 무엇인가-환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해 기꺼이 맞바꿀수 있는 것과 맞바꿀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대답을 하는데 의사의 도움을 얻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경험을 나누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