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지층을 걷는 시간, W.G. 제발트의 『캄포 산토』 함께 읽기

D-29
죽은 이들에 대한 추상적인 기억으로는 기억의 감퇴라는 유혹에 맞서지 못한다. ... 추상적인 기억은 고통의 구체적 시간을 탐구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에서도 단순한 연민 이상으로 고통의 연대를 보여주지 못한다. ... 추모를 맹세한 예술가 주체는 이런 식의 재구성 작업 과정에서 결국 자기 가진에 대해서도 메스를 대야 한다.
캄포 산토 p.151 통회,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니체도 <도덕의 계보학>에서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의 기억술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것은 없을 것이다. ... 잊지 않기 위해 달군 쇳덩이로 낙인을 찍는다. 고통이 계속되어야 기억에 남는다. ... 법적 주체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로 언제나 존재했던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캄포 산토 p.162-163 통회,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결국 읽기도 재구성의 과정이다. 기억과 부채의식에 대해 탐구하는 제발트의 글을 독해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가 자신에게 가하는 엄중한 잣대의 비판을 독자 스스로도 자신에게 부과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전해지는 고통의 경험을 독자들도 오롯이 받아내어야 한다. 이와 유사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 한강 소설가가 떠오른다.
피해자들은 만행을 저질렀던 요원들과는 정반대로 억압이라는 신뢰할 만한 심리기제에 의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이들 내면에서는 망각이라는 섬들이 점차 커지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망각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캄포 산토 p.176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그런데 박해받은 피해자의 경우에는 시간의 통시적 끈이 끊어져버린다. 배경과 전경이 마구 뒤섞이고 실존을 보증하는 논리적인 안전장치가 중단된다. 공포 경험은 인간의 가장 추상적인 고향인 시간에도 전치를 일으킨다. 유일한 고정점은 선명한 고통의 기억과 이미지로 되풀이되는 트라우마적 장면뿐이다.
캄포 산토 p.176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아메리는 연민과 자기연민 둘 다를 억제하는 '절제'라는 일반적인 전략을 활용한다.
캄포 산토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자의적으로 규정한 적을 박해하고 고문하고 절멸하는 실제 과정에서 아메리가 발견한 것은 전체주의 통치의 안타까운 우연성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말해 전체주의 통치의 본질적인 표출이다. 그는 '살인을 통한 자아 실현 과정에 모여든 얼굴들'을 기억하다. "그들은 온 영혼을 걸고 자기 일에 임하고 있다. 그 일이란 말하자면 권력, 정신과 육체에 대한 지배, 방종적 자아의 거침없는 팽창이었다." 아메리에게 독일 파시즘이 상상하고 실현한 세계는 고문의 세계였다. 그것은 인간이 오직 "자기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데서" 존재 근거를 구하는 세계다.
캄포 산토 p.180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역사의 객관적인 광기 앞에 인간이 철저히 무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것이 역사다. 인간은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렸고, 형리가 가까이 왔을 때 모자는 벗겨졌다."
캄포 산토 p.181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실제로 정신적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권력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습관대로 권력을 정신적으로 회의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지만, 그와 같은 지적인 작업을 통해 결국 그 권력에 굴복한다.
캄포 산토 p.182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글쓰기는 미심쩍은 사업이요. 손쉬운 먹잇감이다. 하지만 저 바깥에 실재하는 세계의 압도적인 힘을 생각하면, 글쓰기를 중단하는 것보다는 무의미를 향해가더라도 계속하는 것이 낫다.
캄포 산토 p.182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 것은 철학적 명제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심쩍은 이 사업을 계속해야만 하는 갈림길에서, 매번 망설이게 된다.
작가 초상을 그 작가의 당대속에서 재구성하는 데 일조한 연구자들이 ... 지나치게 무례할 정도로 텍스트를 파헤치는 해석자들보다 텍스트 해명에 훨씬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캄포 산토 p.225 영화관에 간 카프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카프카는 모든 유토피아를 불신했다. ... 그는 가나안에서 추방되어 사십 년간 내쫓겨 있었으며, 이따금 자신을 원했던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수상쩍었고, 자신은 그저 물이 바다로 가는 것 처럼 고독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치 않았노라고. 실제로 말년의 사진 속 카프카처럼 그토록 혼자로 보이는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캄포 산토 p.239 영화관에 간 카프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카프카의 문장들은 긴장감을 주고 다음을 기다리게 하다가도 갑자기 맥락을 잃어버리며 아득한 몰이해의 벼랑으로 떨어져버리는 듯 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그의 문체가 초기 영화 문법의 널뛰는 이미지 사용과 유사하다는 생각은 흥미롭다.
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지, 그 실들은 대체 어디로 나아가는지 줄기차게 묻고 있다.
캄포 산토 p.282 재건시도,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
캄포 산토 p.287 재건 시도,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이야기 장르의 예술은 인간이 언어를 진화시키고 사용해온 이래로 많은 시도를 통해 발전해왔다. 어설프게 생각해보건데 이야기는 구전 신화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신화는 생존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감당할 수 없는 자연현상의 막대한 힘을 체화시키는 용도로 기억을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실어 날랐을 것이다. 입으로 전해지던 신화적 이야기가 문자의 발명과 함께 물리적 실체에 기록되기 시작하고 책과 같은 형태의 매개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는 이야기 장르와 인간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의 공진화가 시작됐다. 다양한 시점과 서술방식들이 시도되면서 기억이 전달되어 타인의 기억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이 복잡해졌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근대 소설이라는 양식은 이야기 장르의 가장 넓고 깊은 심연을 탐구했다. 20세기 후반에서 지금까지 이르기까지는 작게는 좁고 다양한 시도는 있었겠지만, 이야기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혁신은 글보다는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로 그 턴이 넘어간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은 영화와 같은 영상예술들을 탄생시키는 모성의 예술로서 그 중요성은 여전한데, 이 시점에서 제발트의 글쓰기는 특별한 점이 있다.
내가 느끼기에 제발트의 글은 영상 예술의 이야기 방식을 가져와서 문학적으로 구현하는 시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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