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지층을 걷는 시간, W.G. 제발트의 『캄포 산토』 함께 읽기

D-29
실제로 정신적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권력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습관대로 권력을 정신적으로 회의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지만, 그와 같은 지적인 작업을 통해 결국 그 권력에 굴복한다.
캄포 산토 p.182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글쓰기는 미심쩍은 사업이요. 손쉬운 먹잇감이다. 하지만 저 바깥에 실재하는 세계의 압도적인 힘을 생각하면, 글쓰기를 중단하는 것보다는 무의미를 향해가더라도 계속하는 것이 낫다.
캄포 산토 p.182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 것은 철학적 명제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심쩍은 이 사업을 계속해야만 하는 갈림길에서, 매번 망설이게 된다.
작가 초상을 그 작가의 당대속에서 재구성하는 데 일조한 연구자들이 ... 지나치게 무례할 정도로 텍스트를 파헤치는 해석자들보다 텍스트 해명에 훨씬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캄포 산토 p.225 영화관에 간 카프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카프카는 모든 유토피아를 불신했다. ... 그는 가나안에서 추방되어 사십 년간 내쫓겨 있었으며, 이따금 자신을 원했던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수상쩍었고, 자신은 그저 물이 바다로 가는 것 처럼 고독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치 않았노라고. 실제로 말년의 사진 속 카프카처럼 그토록 혼자로 보이는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캄포 산토 p.239 영화관에 간 카프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카프카의 문장들은 긴장감을 주고 다음을 기다리게 하다가도 갑자기 맥락을 잃어버리며 아득한 몰이해의 벼랑으로 떨어져버리는 듯 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그의 문체가 초기 영화 문법의 널뛰는 이미지 사용과 유사하다는 생각은 흥미롭다.
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지, 그 실들은 대체 어디로 나아가는지 줄기차게 묻고 있다.
캄포 산토 p.282 재건시도,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
캄포 산토 p.287 재건 시도,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이야기 장르의 예술은 인간이 언어를 진화시키고 사용해온 이래로 많은 시도를 통해 발전해왔다. 어설프게 생각해보건데 이야기는 구전 신화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신화는 생존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감당할 수 없는 자연현상의 막대한 힘을 체화시키는 용도로 기억을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실어 날랐을 것이다. 입으로 전해지던 신화적 이야기가 문자의 발명과 함께 물리적 실체에 기록되기 시작하고 책과 같은 형태의 매개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는 이야기 장르와 인간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의 공진화가 시작됐다. 다양한 시점과 서술방식들이 시도되면서 기억이 전달되어 타인의 기억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이 복잡해졌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근대 소설이라는 양식은 이야기 장르의 가장 넓고 깊은 심연을 탐구했다. 20세기 후반에서 지금까지 이르기까지는 작게는 좁고 다양한 시도는 있었겠지만, 이야기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혁신은 글보다는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로 그 턴이 넘어간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은 영화와 같은 영상예술들을 탄생시키는 모성의 예술로서 그 중요성은 여전한데, 이 시점에서 제발트의 글쓰기는 특별한 점이 있다.
내가 느끼기에 제발트의 글은 영상 예술의 이야기 방식을 가져와서 문학적으로 구현하는 시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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