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지층을 걷는 시간, W.G. 제발트의 『캄포 산토』 함께 읽기

D-29
그 여정에 차를 운전하시던 아버지는 이제 작은 유골함에 담겨, 차가운 납골당 유리벽 뒤에 있습니다. 때로는 죽은 이들을 산 자들의 생활공간에서 내모는 현대 사회의 매정함이 얄밉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저는 학교 뒷산에 산책을 나갔는데, 그 산 중턱에는 죽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있었습니다. 죽은 나무들은 여전히 숲에 일원으로 그 자리에 존재하며 조용히 조용히 자신을 분쇄해 나가는 것이 었습니다. 그게 묘한 위안이 되었습니다. 반면 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공간에서 쉽게 빨리 제거해 버리는지 야속했습니다. 죽은 나무들은 검었고, 그 숲은 음기가 가득했다는 기억이 불현듯 납니다.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유롭게 삶을 놓아버리는 것은 해탈한 이들이 남겨진 이들에게 바라는 최상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이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그것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며, 글을 통해 기억이 어떻게 살아있는 자들의 경험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지 탐구하고 그 경험을 온전히 향유합니다. 제발트의 글이 현대인의 마음에 왜 이렇게 오롯이 자리잡는지 저도 매번 고민하게 됩니다.
모든 기호에는 전달 가능성의 저주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언어의 소리는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인 사건을, '외부'의 세계만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 또한 어떤 식으로든 '표출'하고자 한다
캄포 산토 P.78, 생소, 통합, 위기,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문학이 이러한 딜레마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비사회적이고 추방된 언어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만, 반란이 좌절된 불투명한 이미지들을 소통수단으로 투입하는 법을 배울 때만 가능하리라.
캄포 산토 P.79 생소, 통합, 위기,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제발트는 일견 소통불가능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명백히 '에세이' 라고 쓰여진 챕터의 이 글은 카스파르와 빨간 피터를 빌어 그의 산문이 사실은 내면을 표출하여 소통하고자 하는 언어적 몸부림임을 고백하는 듯 하다.
이런 보복 과정은 파시스트 정권의 책임을 짊어진 한 민족에게 닥친 시련이기도 했지만 개개인의 속죄 욕망이기도 했으며, 특히 여기서는 도시의 파괴를 오래전부터 갈망해왔던 작가의 속죄 욕망이기도 하다. "공습이 있을 때마다 나는 분명한 소원을 빌었다. 아주 제대로 파괴해주세요!"
캄포 산토 P.92 역사와 자연사 사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이 감정은 마치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 국가 대표팀이 32강에 나가지 못하고 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을지도 (하찮은 비유지만...)
재앙 이후 독일 민족이 갖게 된 심리적 기질에 관해 상술했던, 국민 전체가 실패한 집단 애도에 대한 은유다.
캄포 산토 P.93 역사와 자연사 사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기억이 위험한 이유는 기억을 고집하며 사는 사람은 망각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기 때문이다.
캄포 산토 P.100 역사와 자연사 사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미군 제8공격군 폭격수였던 프레더릭 L. 앤더슨은 성 마르티니 교회 탑에 침대보 여섯 벌로 만든 백기를 제때 게양하기만 했어도 도시에 가해질 공격을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군사 전문가의 관점에서 볼 때 순진하게 짝이 없는 질문에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해 답해준다. ... ... 그는 자신들이 싣고 간 폭탄이 결국은 "값비싼 재화"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조국에서 그렇게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 폭탄을 생산했는데, 그걸 산이나 벌판에 던져버리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노릇이었습니다."
캄포 산토 P.111 역사와 자연사 사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클루게가 ... 이야기하려는 욕망을 타고난 것이 분명한데도 도시의 초토화된 구역 크기만큼 기억하는 심리적 힘을 상실해버린 동시대인들의 집단적 기억을 재생하고자 노력하는 작가임을 증명한다..
캄포 산토 p.115 역사와 자연사 사이,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제발트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독일 민족이 연합국의 설명할 수 없이 무자비한 폭격을 어떻게 기억해야하는지 묻는다. 이러한 주장이 서유럽 사회에 가져온 불편함은 우리가 태평양 전쟁 막바지 일본 도시들에 가해진 폭격과 2번의 핵폭탄 사용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생각한다면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억이 가진 재생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듯 하다. 그 기록이 진실되기만 한다면 소통하고 애도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올바른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도록 이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추상적인 기억으로는 기억의 감퇴라는 유혹에 맞서지 못한다. ... 추상적인 기억은 고통의 구체적 시간을 탐구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에서도 단순한 연민 이상으로 고통의 연대를 보여주지 못한다. ... 추모를 맹세한 예술가 주체는 이런 식의 재구성 작업 과정에서 결국 자기 가진에 대해서도 메스를 대야 한다.
캄포 산토 p.151 통회,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니체도 <도덕의 계보학>에서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의 기억술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것은 없을 것이다. ... 잊지 않기 위해 달군 쇳덩이로 낙인을 찍는다. 고통이 계속되어야 기억에 남는다. ... 법적 주체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로 언제나 존재했던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캄포 산토 p.162-163 통회,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결국 읽기도 재구성의 과정이다. 기억과 부채의식에 대해 탐구하는 제발트의 글을 독해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가 자신에게 가하는 엄중한 잣대의 비판을 독자 스스로도 자신에게 부과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전해지는 고통의 경험을 독자들도 오롯이 받아내어야 한다. 이와 유사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 한강 소설가가 떠오른다.
피해자들은 만행을 저질렀던 요원들과는 정반대로 억압이라는 신뢰할 만한 심리기제에 의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이들 내면에서는 망각이라는 섬들이 점차 커지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망각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캄포 산토 p.176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그런데 박해받은 피해자의 경우에는 시간의 통시적 끈이 끊어져버린다. 배경과 전경이 마구 뒤섞이고 실존을 보증하는 논리적인 안전장치가 중단된다. 공포 경험은 인간의 가장 추상적인 고향인 시간에도 전치를 일으킨다. 유일한 고정점은 선명한 고통의 기억과 이미지로 되풀이되는 트라우마적 장면뿐이다.
캄포 산토 p.176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아메리는 연민과 자기연민 둘 다를 억제하는 '절제'라는 일반적인 전략을 활용한다.
캄포 산토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자의적으로 규정한 적을 박해하고 고문하고 절멸하는 실제 과정에서 아메리가 발견한 것은 전체주의 통치의 안타까운 우연성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말해 전체주의 통치의 본질적인 표출이다. 그는 '살인을 통한 자아 실현 과정에 모여든 얼굴들'을 기억하다. "그들은 온 영혼을 걸고 자기 일에 임하고 있다. 그 일이란 말하자면 권력, 정신과 육체에 대한 지배, 방종적 자아의 거침없는 팽창이었다." 아메리에게 독일 파시즘이 상상하고 실현한 세계는 고문의 세계였다. 그것은 인간이 오직 "자기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데서" 존재 근거를 구하는 세계다.
캄포 산토 p.180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역사의 객관적인 광기 앞에 인간이 철저히 무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것이 역사다. 인간은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렸고, 형리가 가까이 왔을 때 모자는 벗겨졌다."
캄포 산토 p.181 밤새의 눈으로,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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