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3.저주받은 도시 - 스트루가츠키 형제(1부)

D-29
…넌, 늘 그렇듯 지도층의 심리는 눈꼽만큼도 모르는구나. 네 생각에는 지도층의 일이 뭔 것 같아?”
저주받은 도시 p.111,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원숭이들의 존재를 체계화하기. 혼돈과 말썽을 법의 틀에 욱여넣는, 그런 방식으로 원숭이들을 우리 선한 시장 특유의 견고한 질서의 일부로 만드는 거야! 동냥질을 하고 말썽을 피우는 무리와 패거리 대신에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모두 동물을 사랑하잖아! 빅토리아 여왕도 동물을 사랑했고 다윈도 동물을 사랑했어.
저주받은 도시 p.113,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 제기랄. 아니다. 내가 탈탈 털어 주겠다. 나한테 저놈들을 먹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원숭이 같은 자식들! 그때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안드레이는 음산하게 비죽비죽 웃으며 문을 열러 갔다. 지나는 길에 그는 셀마가 식탁 위에서 손바닥을 허벅지 아래에 깔고 앉아서는 두껍게 화장한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활짝 웃는 것을 봤다. 이런 개 같은 년. 개 같은 년. 셀마의 앞에 서서 원숭이 같은 앞발을 휘저으며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이쟈는 말끔함이라고는 이미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넥타이 매듭은 돌아가 오른쪽 귀 아래에 있었고, 머리카락은 쭈뼛쭈뼛 서 있었으며 소매는 때가 타 있었다
저주받은 도시 p.114,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 그동안 안드레이가 한 일이라곤 주머니에 있던 돈을 다른 주머니로 옮겨 넣고 초조히 발을 바꿔 몸무게를 지탱하며 그 우울한 인간에게 “그래…… 가게에 있을 거 같은데…… 어쨌든 이만 나가자……”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저주받은 도시 p.117,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ifrain님의 대화: ‘조직화된 무책임’ 이라는 구절에서는 무책임이 조직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공고해지는 거라는 인상을 받게 되네요. 개인적인 무책임에 비해서 면피가 되고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게 되겠죠.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단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가 평범하고 성실한 관료일 뿐이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죠.
얼마 전 서국도에 갔을 때 눈에 띄었던 책 중 하나가 있었는데요. 글항아리에서 나온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입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한나 아렌트의 책과 대조되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나죠. 저자 베티나 슈탕네트는 아이히만 본인이 남긴 다양한 글과 녹음 테잎 등을 분석하여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을 조사했습니다.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나치 독일의 광범위한 조직과 권위와 익명성에 어쩔 수 없이 올라탔던 인물이 아니라 타고난 체계적 살인자였다고 주장하는데요. 아렌트의 연구와 '악의 평범성'만으로는 악惡을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최근에 <파리대왕>을 읽었던지라 악은 내면에 타고나는 것인가 vs 환경이 조장하는 것인가로 생각이 많았는데 아렌트의 이론을 반박하는 내용이라고 하니 더 궁금하네요.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1906년 10월 14일, 한나 아렌트가 태어났다. 그보다 7개월 앞선 3월 19일, 아돌프 아이히만이 세상의 빛을 봤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유대인 학살을 둘러싼 피해자-가해자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주인공 삼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이 책은 아렌트 책 출간 이후 50년 만의 반박이다. 예루살렘 법원에 서기 전 아이히만의 생을 쫓는다.
향팔님의 대화: ㅎㅎ 이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가이거 프리츠의 배경과 성격 때문에 1부에서 무슨 큰 사건사고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실험]과 [도시]에 순응하고 잘 적응(?)해서 다행이었어요. 전쟁 시기의 소련인과 독일인이 한 공간에 있는 걸 보며 '인도자'들이 인류에게 관심이 있어서 일부러 이런 지구촌 조합을 넣은 건지, 아니면 오히려 관심이 없어서 고려를 안 한건지 그 의도는 알 수 없지만요.
"그래, 가이거를 봐. 가이거는 어쨌든 우리 계급의 적이지만 입장만큼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그러니까, 모든 계급에게 있어 지식인은 똥이야." 안드레이가 이를 악물었다. "난 그놈들이 싫어…… 힘없는 안경잡이들, 수다쟁이들, 그리고 무위도식하는 자들을 더는 참아 줄 수가 없어. 그놈들한텐 정신력도 없고 믿음도 없고 도덕성고 없고……"
저주받은 도시 p.143,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내 생각은 이러네." 유라 삼촌이 말했다. "인도자들은 진짜 인간이 아니야. 그들은, 뭐랄까, 다른 종족이라고나 할까…… 그들이 우리를 수족관에…… 아니면 동물원 같은 곳에 넣어 놓고는…… 어떻게 되는지 보고 있지."
저주받은 도시 p.144~145,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아니, 그 말이 아니야." 이쟈가 천천히 손을 휘저었다. "네 말처럼 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 그들은 인류를 파악하려는 거야. 알겠어? 파악하려 한다고! 그런데 우리가 당면한 제일 큰 문제가 뭔가 하면, 역시 같아. 인류를, 우리 자신을 파악하는 것. 어쩌면 그들은 직접 우리를 파악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악하는 걸 도울 수도 있으려나?"
저주받은 도시 p.146,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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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님의 문장 수집: ""아니, 그 말이 아니야." 이쟈가 천천히 손을 휘저었다. "네 말처럼 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 그들은 인류를 파악하려는 거야. 알겠어? 파악하려 한다고! 그런데 우리가 당면한 제일 큰 문제가 뭔가 하면, 역시 같아. 인류를, 우리 자신을 파악하는 것. 어쩌면 그들은 직접 우리를 파악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악하는 걸 도울 수도 있으려나?""
"그들은 체계적으로 우리를 어떤 가혹한 세계로, 우리가 앞으로 언제나 영원히 살아야 할 세계로 밀어 넣고 있는 것만 같아. 오키나와처럼…… 어렸을 때였고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 오키나와 학교에서는 방언으로 말하는 게 금지되었지. 오로지 표준 일본어로만 말하게 했어. 그러다 언젠가 한 소년이 방언을 쓰다 걸렸는데, 목에 '나는 제대로 말하는 법을 모릅니다'라고 쓰인 팻말을 걸고 있게 했어. 그래서 애는 팻말을 걸고 다녔고."
저주받은 도시 p.147,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은화님의 문장 수집: ""그들은 체계적으로 우리를 어떤 가혹한 세계로, 우리가 앞으로 언제나 영원히 살아야 할 세계로 밀어 넣고 있는 것만 같아. 오키나와처럼…… 어렸을 때였고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 오키나와 학교에서는 방언으로 말하는 게 금지되었지. 오로지 표준 일본어로만 말하게 했어. 그러다 언젠가 한 소년이 방언을 쓰다 걸렸는데, 목에 '나는 제대로 말하는 법을 모릅니다'라고 쓰인 팻말을 걸고 있게 했어. 그래서 애는 팻말을 걸고 다녔고.""
"난 이해할 수 없어!" 안드레이가 선언했다. "전부 곡해하는 것 같아…… 실험은 실험이라고. 물론,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하지만 우리가 이해해서는 안되잖아! 그게 기본 조건이라고! 왜 원숭이들이 왔는지, 왜 직업을 바꿔야 하는지, 그걸 우리가 이해하는 날에는…… 그 이해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테고 실험은 그 순수성을 잃고 망할 거야. 자명한 일이잖아!"
저주받은 도시 p.147~148,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은화님의 문장 수집: ""난 이해할 수 없어!" 안드레이가 선언했다. "전부 곡해하는 것 같아…… 실험은 실험이라고. 물론,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하지만 우리가 이해해서는 안되잖아! 그게 기본 조건이라고! 왜 원숭이들이 왔는지, 왜 직업을 바꿔야 하는지, 그걸 우리가 이해하는 날에는…… 그 이해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테고 실험은 그 순수성을 잃고 망할 거야. 자명한 일이잖아!""
"너희 중 누군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실험의 모든 과제가 가장 에너지 넘치고 가장 일을 열심히 하고 가장 단단한 사람들을 걸러 내는 일이라고 말했었지…… 입만 나불대지 않고,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져 있지 않고, 철학을 하지 않는, 믿음이 확고한…… 그런 사람들을 걸러 내는 일이라고. 나 같은 사람, 혹은 안드레이 너 같은 사람들 말이지. 그리고 그렇게 걸러 낸 자들은 지구로 다시 던져 버릴 거야. 이곳에서 흔들리지 않았다면 저곳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저주받은 도시 p.148,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은화님의 문장 수집: ""너희 중 누군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실험의 모든 과제가 가장 에너지 넘치고 가장 일을 열심히 하고 가장 단단한 사람들을 걸러 내는 일이라고 말했었지…… 입만 나불대지 않고,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져 있지 않고, 철학을 하지 않는, 믿음이 확고한…… 그런 사람들을 걸러 내는 일이라고. 나 같은 사람, 혹은 안드레이 너 같은 사람들 말이지. 그리고 그렇게 걸러 낸 자들은 지구로 다시 던져 버릴 거야. 이곳에서 흔들리지 않았다면 저곳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1부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저는 이 부분이었습니다. 성별/직업/인종/국적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인물들이 한 집에 모여 서로 먹고 떠들고 마시고 하고 있죠. 고상한 의미의 지구촌이나 인류화합보다는, 어디 가까운데서 볼 법한 왁자지껄하고 조금 지저분하며 난장판인 파티의 형태로 서로 취해서 뒤엉킨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뒷부분에서 '유라 삼촌'이 결국 인간은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게 '술이 들어가면 다 거기서 거기야' 같아서 정겹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이 인물들이 마냥 소시민적이고 당장 오늘내일의 잇속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음을 보여줍니다. 인도자들의 [실험]의 의도와 목적을 추측하며 토론하는 장면이 그렇죠. 이쟈, 겐시, 안드레이, 프리츠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와 배경 그리고 자신들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현실을 분석합니다. 마치 어릴 적에 명절이나 가족 모임 때면 식후 다들 둘러앉아 좀 진지하게 미래나 정치 얘기를 하던 옛날 풍경이 떠올라요. 이들의 가정과 이론이 전부 맞을 수도 있지만 또 전부 빗나가고 틀릴 수도 있겠죠. 다 큰 어르신들이 모여서 국제/국내 정세를 얘기하더라도 현실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죠. 어린아이 수준의 놀이나, 어른의 진지한 토론이나 '더 높은 단계'에서 바라봤을 때는 모두 무의미한 시도이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은화님의 대화: 1부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저는 이 부분이었습니다. 성별/직업/인종/국적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인물들이 한 집에 모여 서로 먹고 떠들고 마시고 하고 있죠. 고상한 의미의 지구촌이나 인류화합보다는, 어디 가까운데서 볼 법한 왁자지껄하고 조금 지저분하며 난장판인 파티의 형태로 서로 취해서 뒤엉킨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뒷부분에서 '유라 삼촌'이 결국 인간은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게 '술이 들어가면 다 거기서 거기야' 같아서 정겹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이 인물들이 마냥 소시민적이고 당장 오늘내일의 잇속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음을 보여줍니다. 인도자들의 [실험]의 의도와 목적을 추측하며 토론하는 장면이 그렇죠. 이쟈, 겐시, 안드레이, 프리츠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와 배경 그리고 자신들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현실을 분석합니다. 마치 어릴 적에 명절이나 가족 모임 때면 식후 다들 둘러앉아 좀 진지하게 미래나 정치 얘기를 하던 옛날 풍경이 떠올라요. 이들의 가정과 이론이 전부 맞을 수도 있지만 또 전부 빗나가고 틀릴 수도 있겠죠. 다 큰 어르신들이 모여서 국제/국내 정세를 얘기하더라도 현실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죠. 어린아이 수준의 놀이나, 어른의 진지한 토론이나 '더 높은 단계'에서 바라봤을 때는 모두 무의미한 시도이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러네……" 유라 삼촌이 음울하게 말했다. "보라고. 유럽도, 우리 러시아도, 황인종이 사는 곳도, 어디든 다 똑같네. 권력은 공정하지 않고. 아니, 형제들, 난 거기서 아무것도 잃은 게 없네. 난 이곳이 더 좋아……"
저주받은 도시 p.162,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은화님의 대화: 얼마 전 서국도에 갔을 때 눈에 띄었던 책 중 하나가 있었는데요. 글항아리에서 나온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입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한나 아렌트의 책과 대조되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나죠. 저자 베티나 슈탕네트는 아이히만 본인이 남긴 다양한 글과 녹음 테잎 등을 분석하여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을 조사했습니다.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나치 독일의 광범위한 조직과 권위와 익명성에 어쩔 수 없이 올라탔던 인물이 아니라 타고난 체계적 살인자였다고 주장하는데요. 아렌트의 연구와 '악의 평범성'만으로는 악惡을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최근에 <파리대왕>을 읽었던지라 악은 내면에 타고나는 것인가 vs 환경이 조장하는 것인가로 생각이 많았는데 아렌트의 이론을 반박하는 내용이라고 하니 더 궁금하네요.
오, 이 책은 작년에 강유원 선생님도 책읽기 팟캐스트에서 (3회에 걸쳐) 다뤄주신 적이 있어요. 저도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인데 당장 엄두가 안 나서리 ㅎㅎ 요거 듣는 걸로 때웠답니다.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 | 📖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2) https://www.podbean.com/ei/pb-busuh-1925d81 파리대왕은 지난번 이웃 벽돌 책 방에서 얘기가 나와서 부쩍 땡기는 책인데, 은화님께서도 읽으셨군요. 영화도 있고 그래픽노블도 나왔더라고요. 에고 읽을 책이 왜케 많은지~ (언제나 마음만 굴뚝!)
은화님의 대화: 1부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저는 이 부분이었습니다. 성별/직업/인종/국적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인물들이 한 집에 모여 서로 먹고 떠들고 마시고 하고 있죠. 고상한 의미의 지구촌이나 인류화합보다는, 어디 가까운데서 볼 법한 왁자지껄하고 조금 지저분하며 난장판인 파티의 형태로 서로 취해서 뒤엉킨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뒷부분에서 '유라 삼촌'이 결국 인간은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게 '술이 들어가면 다 거기서 거기야' 같아서 정겹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이 인물들이 마냥 소시민적이고 당장 오늘내일의 잇속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음을 보여줍니다. 인도자들의 [실험]의 의도와 목적을 추측하며 토론하는 장면이 그렇죠. 이쟈, 겐시, 안드레이, 프리츠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와 배경 그리고 자신들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현실을 분석합니다. 마치 어릴 적에 명절이나 가족 모임 때면 식후 다들 둘러앉아 좀 진지하게 미래나 정치 얘기를 하던 옛날 풍경이 떠올라요. 이들의 가정과 이론이 전부 맞을 수도 있지만 또 전부 빗나가고 틀릴 수도 있겠죠. 다 큰 어르신들이 모여서 국제/국내 정세를 얘기하더라도 현실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죠. 어린아이 수준의 놀이나, 어른의 진지한 토론이나 '더 높은 단계'에서 바라봤을 때는 모두 무의미한 시도이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루 할아버지의 동반자가 되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한 직원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따뜻하게 포옹을 해 줬다. 할아버지는 셰리에게 이 인간적인 접촉이 얼마나 좋은지 털어놨다. 그와 포옹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럴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는 여전히 찾아오는 친구 데이브와 함께 커피숍에서 크리비지 게임을 한다. 할아버지는 다른 층 그린 하우스에 사는 한 사람에게도 크리비지 게임을 가르쳐 줬다. 뇌졸증으로 마비가 된 사람이었는데, 가끔 할아버지 집에서 둘이 함께 게임을 즐긴다. 그럴 때면 직원 하나가 그의 카드를 들어 주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루 할아버지가 그 일을 대신하기도 한다. 상대의 카드를 훔쳐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카드놀이를 하지 않는 날 오후에는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개 베이징과 함께 셸리가 들른다. 하지만 그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도 행복해한다. 그런 날 할아버지는 아침식사를 한 후 자기 방으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본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엉망으로 돌아가는 세상 꼴을 봐야 하기"때문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p.223,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하고 인간답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이를 성취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마무리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ifrain님의 문장 수집: " 루 할아버지의 동반자가 되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한 직원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따뜻하게 포옹을 해 줬다. 할아버지는 셰리에게 이 인간적인 접촉이 얼마나 좋은지 털어놨다. 그와 포옹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럴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는 여전히 찾아오는 친구 데이브와 함께 커피숍에서 크리비지 게임을 한다. 할아버지는 다른 층 그린 하우스에 사는 한 사람에게도 크리비지 게임을 가르쳐 줬다. 뇌졸증으로 마비가 된 사람이었는데, 가끔 할아버지 집에서 둘이 함께 게임을 즐긴다. 그럴 때면 직원 하나가 그의 카드를 들어 주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루 할아버지가 그 일을 대신하기도 한다. 상대의 카드를 훔쳐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카드놀이를 하지 않는 날 오후에는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개 베이징과 함께 셸리가 들른다. 하지만 그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도 행복해한다. 그런 날 할아버지는 아침식사를 한 후 자기 방으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본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엉망으로 돌아가는 세상 꼴을 봐야 하기"때문이다. "
좀 다른 상황이긴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나오는 루 할아버지 관련 내용 부분입니다. "엉망으로 돌아가는 세상 꼴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이 책에는 노화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인데요. 죽음 앞에서 삶이 달리 보일 거라는 생각 때문에 루 할아버지가 티비를 보는 관점이 어떨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왕: "인도자들이 오래전에 자기 의도에 엉켰고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이제는 스스로도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고 했어. 도널드는 이렇게 말했어. 완전한 실패라고. 지금은 그저 관성으로 굴러가는 거라고."
저주받은 도시 149p,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이쟈: 그들이 실험이니 뭐니 무슨 대단한 생각을 하든 말든, 형제들, 솔직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네." "그런데 나는 이곳에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이 자유를 건드리지 않는 한은 나 역시 아무도 건드리지 많을 걸세. 그런데 농부들의 생활환경을 바꾸려는 자가 생기면,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네. 우리는 너희 도시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다 무너뜨릴 거라고. 우리는 너희에게, 이런 제기랄, 원숭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우리는 너희가, 이런 제기랄, 우리한테 목줄을 채우게 두지 않을 거라고....! 그래. 바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네. 형제들."
저주받은 도시 150p,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은화님의 대화: 얼마 전 서국도에 갔을 때 눈에 띄었던 책 중 하나가 있었는데요. 글항아리에서 나온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입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한나 아렌트의 책과 대조되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나죠. 저자 베티나 슈탕네트는 아이히만 본인이 남긴 다양한 글과 녹음 테잎 등을 분석하여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을 조사했습니다.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나치 독일의 광범위한 조직과 권위와 익명성에 어쩔 수 없이 올라탔던 인물이 아니라 타고난 체계적 살인자였다고 주장하는데요. 아렌트의 연구와 '악의 평범성'만으로는 악惡을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최근에 <파리대왕>을 읽었던지라 악은 내면에 타고나는 것인가 vs 환경이 조장하는 것인가로 생각이 많았는데 아렌트의 이론을 반박하는 내용이라고 하니 더 궁금하네요.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를 말씀하시니 이안 부루마Ian Buruma가 쓴 <부역자: 전쟁, 기만, 생존The Collabotators>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글항아리에서 2023년에 출간된 책이고요. 2차 세계대전 당시 사기꾼, 협잡꾼이자 기회주의자였던 세 명의 인물 펠릭스 케르스텐, 프리드리히 바인레프, 기아시마 요시코 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이안 부루마가 보기에 이들은 생각이 없어서 권력의 톱니바퀴가 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 명의 인물은 자신의 생존, 출세, 혹은 뒤틀린 영웅주의를 위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지어내고 타인을 속이고 자신을 속입니다. 즉, 한나 아렌트같으 사람마저 속아 넘어가게 할 만큼 회색지대에서 '평범한 척' 능동적으로 자신을 연출했다(기만)는 점을 지적하고 있죠. <부역자: 전쟁, 기만, 생존>에서 아이히만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과 세상을 기만하는 부역자의 전형으로 소환하고 있죠. 부루마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살아남기 위해 영악하게 머리를 굴리고 자신과 타인을 속여 거짓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였던 것입니다.
부역자 - 전쟁, 기만, 생존제2차 세계대전을 남다르게 관통한 세 사람의 삶을 추적하는 일종의 전기다. 세 사람은 독일어로 ‘호흐슈타플러’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사기꾼, 허풍쟁이, 협잡꾼쯤으로 번역되는 호흐슈타플러는 부역자나 저항자에 딱 들어맞지 않고 강한 도덕적 질타를 불러일으키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모순투성이 삶을 산 이들이다. 저자는 이들을 통해 역사를 다시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글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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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느리게 읽기 (1)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함께 읽는 과학도서] 천천히 곱씹으며 느리게 읽기 <지구의 짧은 역사> 3부
안 노란 책을 찾아라!
안노란 책 리뷰 <지금, 그리고 그때>안노란책 리뷰 <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안노란 책 리뷰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 앤 드 마르켄안노란 책 리뷰 <메데이아> 에우리페데스안노란 책 리뷰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하임 마이어호프
새벽엔 느낌 좋은 소설로 하루 시작해요
[느낌 좋은 소설 읽기] 3.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느낌 좋은 소설 읽기] 2. 오버스토리 [느낌 좋은 소설 읽기] 1. 모나의 눈
아티초크의 멋진 책!
[아티초크/책증정] 세계 여성 시인선 100『슬픔에게 언어를 주자』와 함께해요.[아티초크/시집증정] 감동보장!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아틸라 요제프 시집과 함께해요.[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
‘인생 록 음악’ 추천!
[그믐밤] 49. 국제 암석의 날 기념, ‘인생 록 음악’ 추천해주세요[김영사/책증정] 대화도 음악이 된다! <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 함께 읽어요[그믐밤] 33. 나를 기록하는 인터뷰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새폴스키의 책을 읽습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6.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8. <행동>
동구권 SF 함께 읽어요!
[함께 읽는 SF소설] 12.신이 되기는 어렵다 - 스트루가츠키 형제[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기원 단장과 함께 스토리의 비밀, 파헤칩니다
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1. 호러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2. 액션 + 로버트 맥키의 액션스토리 탐험단 시즌 2 : 장르의 해부학 읽기 3. 신화 4. 회고록과 성장물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우리는 왜·어떤 다른 세상을 꿈꾸는가?] - 4회차[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3) 프랑켄슈타인[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2회차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1719)[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우리는 왜·어떤 다른 세상을 꿈꾸는가?] 1회차-마션
히어로와 함께
카라마조프의 피도스토옙스키와 29일을[그믐연뮤번개] 3. [독서x관극x모임지기 토크] 우리 몸에 살고 있는 까라마조프를 만나다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3권의 책 종류
『육식의 종말』완독 하기! (책 증정)[김영사/책 증정] 장안의 화제! 노화과학을 다룬 <우리는 왜 죽는가>를 함께 읽어요 [인플루엔셜/책증정] 진정한 앎은 무엇인가? <지식의 탄생> 읽고 함께 이야기해요!
청명하다, 꾸준히 읽는 중
독서기록용_웍과 칼독서기록용_필요의 탄생독서기록용_제자리에 있다는 것독서 기록용_유성기의 시대, 유행시인의 탄생
삼국지를 가슴에 품다
삼국지 전권독파 - 요시카와 에이지 버전으로[모집] 평생의 숙제 인간관계, 삼국지의 영웅들에게 답을 묻다 (w. 『최소한의 삼국지』)
혼자이기에 오히려 깊이 읽은 책들
<인간의 대지> 오랜만에 혼자 읽기 『에도로 가는 길』혼자 읽기천국의 열쇠 혼자 읽기거실의 사자 : 고양이는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고 세계를 정복했을까
부커상을 받았어요
[책증정][1938 타이완 여행기] 12월 18일 오후 8시 라이브채팅 예정! [이 계절의 소설_봄]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함께 읽기[Re:Fresh] 3. 『채식주의자』 다시 읽어요.[서울국제작가축제X비채]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함께읽기 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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