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3.저주받은 도시 - 스트루가츠키 형제(1부)

D-29
노파가 대답할 새가 없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복도에서 흥분한 목소리들이 흘러들었고 열린 문 사이로 까만 머리의 땅딸막한 자가 들어오더니 복도에 대고 소리쳤다. "그래요. 시급하다니까요! 당장 말해야 합니다!" 안드레이는 인상을 썼고 사람들이 그자를 복도로 끌어낸 뒤 문이 쾅 닫혔다.
저주받은 도시 p.211,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지도에는 시너고그와 영화관 '새로운 환상' 사이에 분수대와 놀이터가 있는 작은 공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저주받은 도시 p.221,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은화님의 문장 수집: "이곳은 무엇이든 제때 하지 않으면 아예 못 하도록 정해져 있었고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을 번복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붉은 건물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내부에는 어떤 규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설명인데요. 건물의 규칙이 곧 데스와 같다는 걸 알게 되죠. 무언가를 하는데 정해진 시간이 있고, 정해진 절차대로 진행해야 하며, 그 룰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다보면 결국 실격됩니다. 그리고 이런 규칙은 체스를 넘어 전략가(스탈린)의 정적 제거, 즉 정치와도 연결됩니다. 스탈린과 그를 둘러싼 고관들은 스탈린이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어떤 불문율과 권력구도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눈 밖에 나면서 제거당하죠. 하지만 설령 규칙을 잘 따른다고 해도 미래가 보장된 건 아닙니다. 체스말은 결국 체스말일 뿐이니까요. 건물/체제/정쟁의 밖에 있건, 그 안에 종속되어 있건 어디에도 대안이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은화님의 대화: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Tukhachevsky 체스 대목에서 '전차병(비숍)'으로 언급되던 미하일 투하쳅스키에 대해 찾아봤습니다. 체스에서는 비숍이 대각선으로 칸 제한 없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기동성 면에서 중요한 말로 평가받는데요. 그의 종횡무진하던 전공과 무훈 그리고 인생을 생각해 보면 적절한 묘사 같네요. 투하쳅스키는 1893년 러시아 스몰렌스크 지방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에 중위로 입대하였고 1915년에 독일군에 포로로 잡히고요. 이 당시부터 이미 투하쳅스키는 포부가 대단하였는데 30살까지 장군이 되지 못하면 자신은 전장 어디에선가 죽어있을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다섯 번의 탈옥 시도 끝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1917년에는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에 가입합니다. 제정 러시아 때 장교로서의 교육과 경험을 갖춘 그는 적백내전 시기에 활약하면서 점차 무훈을 쌓게 되고요. 그러나 1920년에 러시아가 서쪽으로 확장하던 와중 폴란드-우크라이나와 충돌하게 되는데 이 때 바르샤바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스탈린과의 관계가 틀어집니다. 이 당시의 스탈린은 아직 서기장이 되기 전으로, 패전 원인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비판했기 때문이죠. 투하쳅스키는 아직 후진적이었던 소련의 붉은 군대를 개혁하기 위해 현대적인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한 복합적인 작전수행 능력을 강조하고, 현지의 군대와 사령관들이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통신수단도 다양화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스탈린은 투하쳅스키를 매우 싫어했지만 군의 현대화에는 동의했기 때문에 그에게 권한을 맡겼다고 해요. 하지만 부됸니 (책의 주석에도 나오던 체스말 중 한 명) 를 비롯한 소련군 내 기존 장군들의 반대와 시기를 받아 해임됩니다. 투하쳅스키는 '종심 타격이론'의 군사이론을 만들기도 했는데요. 모루가 될 주력부대가 상대의 주력부대와 대치하여 맞서는 동안 틈이 생기면 기동력이 높은 기동부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틈으로 돌파해 들어가 적의 후방 급소를 일망타진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론이 실제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된 기계화 된 병기와 부대 즉 현대화된 군대가 필요하며, 속도전 내지는 전격전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는 지휘관과 장교들이 요구되죠. 말은 단순하지만 당시 소련의 현실에서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매우 '시대를 앞선' 개념이었다고 합니다. 1936년에 투하쳅스키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 방문하고 귀국한 이후 1937년 5월에 극비리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됩니다. 온갖 고문을 당하여 몸과 정신이 무너진 그는 자신이 독일과 내통한 스파이라고 자백했다는데... 당연히 정황상 이것이 진실일지는 지금도 미지수죠. 같은 해 6월, 몇 명의 배반 혐의가 있는 장성들과 함께 투하쳅스키는 당일 저녁 11시 35분에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선고를 받은 지 1시간도 안되어 투하쳅스키는 그의 감방으로 끌려 들어가 머리 뒤에 총을 맞고 사망합니다. 첨부된 사진은 그가 고문 이후에 쓴 자백서인데 중간의 얼룩들은 당시 흘린 핏자국이라고 하고요..
여담이지만 투하체프스키가 주장했던 '종심작전이론'은 러시아를 휩쓸던 독일군의 유명한 '전격전 (이것도 후대에 붙인 이름이지만)' 이론과 비슷한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임무형 vs 통제형 전술, 소수의 돌파구에 병력 집중 vs 파상 공세를 펼치다가 약한 부분에 집중 등의 디테일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전차의 빠른 돌파력과 항공 지원, 보병과 전차의 협동 전투를 통해 전선에 돌파구를 만들고 그 쪽에 전력을 집중하여 적의 전선 방어 붕괴를 유도한다라는 내용이 거의 비슷하죠. 1930년대에 '독일이 예고 없이 침공을 해올 수 있다'라고 (스탈린이 결단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최고의 악몽 시나리오) 홀로 주장하던 투하체프스키가 살아 있었더라면 독소전 초반에 그토록 치욕스러운 소련의 연속적인 참패 시나리오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후대의 평가가 많았죠. 그렇지만 의심병 환자인 스탈린이 살려두기에는 투하체프스키는 너무 잘 났었죠. 게다가 잘 생겼었고...러시아 제국군 출신이고...
수천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내며 눈물을 흘렸고 울부짖는 음악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하지 못하도록, 떨쳐 내지 못하도록,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저주받은 도시 p.226,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이곳은 무엇이든 제때 하지 않으면 아예 못 하도록 정해져 있었고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을 번복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단을 오른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복모를 벗었다.
저주받은 도시 p.227,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군복풍의 옷을 입은 연로한 파트너, 그의 상대만이 하얗게 센 묵직한 머리를 살짝 떨구고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잡아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소리 없이 텅 빈 홀 중앙을 돌아다녔다.
저주받은 도시 p.228,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휜 다리로 마루를 단단히 딛고서 자신의 어마어마한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주위를 곁눈질했다. 그에게서 보드카와 말의 땀 냄새가 코를 찌르듯 풍겼다.
저주받은 도시 p.231,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하지만 게임이 계속되는 긴 시간 내내 왕이 죽음을 앞둔 공포에 질려 차갑게 땀범벅이 된 채 아슬아슬한 위험 속에 있으리라는, 왕에게 가해지는 압박감이 점점 커지고 커져 마침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고 커다란 피고름이 터져 왕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지고 말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저주받은 도시 p.232,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위대한 전략가는 전략가 이상이었다. 전략가는 언제나 자신이 짠 전략의 틀 안에서 맴돈다. 하지만 위대한 전략가는 그 어떤 틀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그에게 전략은 게임의 사소한 요소였을 뿐이고 아드레이의 시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연한 것, 우연히 변덕스럽게 놓은 수일 뿐이었다. 위대한 전략가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규칙을 지키며 게임 할 줄 아는 자가 이기지 않는다는 것을, 필요한 순간에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상대방은 모르는 자신만의 규칙들을 게임에 적용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그 규칙에서마저 벗어나는 자가 이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어쩌면 날 때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저주받은 도시 p.238,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러는 동안에도 게임은 진행되고 있었다. 안드레이는 열심히 방어하고 후퇴하고 속임수를 쓴 덕에 아직까지는 이미 죽은 자들만 죽도록 할 수 있었다. 방금은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던 도널드가 체스보드에서 치워졌고 탁자 위 샴페인 잔 옆에 그가 남긴 권총과 유서가 놓였다. ‘기뻐하며 오지 막고 슬퍼하며 가지 마라. 권총은 브로닌에게 전해 주시오. 언젠간 쓸모 있을 테니.’ 벌써 아버지와 형이 할머니의 시체를, 오래된 침대보로 둘둘 감아 꿰맨 예브게니야 로마노브나의 시체를 얼음장 같은 계단으로 끌고 내려가 마당의 시체 더미 위에 얹었다…… 아버지는 피스카룝카 어딘가에 위치한 형제의 묘에 시체를 묻었고 음울한 운전사는 묏자리 하나에 최대한 많이 매장하기 위해 살을 에는 듯한 바람으로부터 면도하지 않은 얼굴을 숨기며 얼어붙은 시체들 위로 로드롤러를 왔다 갔다 몰아 평평하게 다졌다…… 그리고 위대한 전력가는 너그럽게, 즐겁게, 악랄한 기쁨을 느끼면서 자신의 말과 타인의 말을 처단했고 턱수염을 기르고 훈장을 단, 그의 말끔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쐈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고 끔찍한 고문을 받아 죽었고 퀸이 되기 위해 서로를 밟아 가며 전진했으나 폰으로 남았다……
저주받은 도시 pp.239~240,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경쟁자들이 아니라 바로 파트너들이, 동맹자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으며 게임은 단 하나의 유일한 출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지지 않고 모두가 이길 뿐이었다…… 물론 승리의 순간까지 살아남지 못한 자들은 예외겠지만……
저주받은 도시 p.241,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급히 계단을 내려가 ‘출구’라 쓰인 문에 도달했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이미, 끼익대는 용수철의 저항을 이겨 내며 몸을 기울였을 때 이미 그는 불현듯 저 위에서 자신을 응시하던 눈빛에 담겨 있던 공통된 무언가의 정체를 깨달았다. 질책이었다. 그들은 그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자신도 몰랐는데 그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저주받은 도시 p.249,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도시는 끝장입니다. 실험도 끝장이고말고요. 지금 첩자질이 자행되고 있고, 태업을 일으키려는 시도나 분열을 조장하려는 시도가 있고,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소문들이 퍼지고 있습니다. […] 이곳에, 바로 이 도시에, 우리 곁에, 우리 중에 실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다소 계산적인 이유로 온 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니힐리스트들, 내부의 은둔자들, 믿음을 잃은 분자들, 아나키스트들이지요. 이들 중에 활발히 활동하는 자는 거의 없지만, 소극적이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적 해이를 일으키고 이상을 파괴하고 한 계층이 다른 계층을 적대하게 만들고 파괴적인 회의주의를 야기합니다. 이를테면, 당신도 잘 아는 카츠만이라는 자가 그렇지요……
저주받은 도시 제2부 수사관 제1장,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안드레이는 펜을 들어 조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조사자에게 판에 박힌 절망을 안겨 주고 사법 기관의 흠결 없는 기계와도 같은 절차에 따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으리라는 예감을 안겨 줄, 두드러지게 단조롭고 관료주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주받은 도시 제2부 수사관 제1장,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이럴 줄은 몰랐구려……! 여기서도 누가 누구랑 있는지 알아야 한다니…… 독일 놈들이 왔을 때는 앉아서 입을 딱 닫고 있어야 했지. 1948년 이후에도 또다시 입을 딱 닫고 보기만 해야 했우. 황금빛 봄이 왔을 때는 입을 아주 조금은 열어도 됐지. 그런데 세상에, 러시아인들이 전차를 타고 와서는 또 닥치라고, 또 조용히 하라고 했고…… 그러다 여기로 오게 됐는데, 여기도, 그러니까, 똑같구먼……
저주받은 도시 제2부 수사관 제1장,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 황당무계한 노파가 불지 않는다면, 이 늙은 나무 그루터기 같은 노인네를 유치장에 넣을 테다. 법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망할 사건의 수사를 강화하기는 해야 하지 않나…… 노파 한 명 조사하는 데 시간을 얼마나 쓸 수 있겠는가? 유치장에서의 하룻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마법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월권을 행사했다고 불쾌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테고 이 노파는 탄원하지 않을 테니 괜찮다…… 안 그러게 생겼으니…… 뭐, 불쾌한 일이 생겨 봐야 검찰총장이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엄청 깨지지는 않겠지. 경고는 하겠지만 내가 뭐, 그들에게 감사 인사나 받자고 일하나? 경고할 테면 하라지. 이 망할 사건을 조금이라도 진전시킬 수 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진전시킬 수 있다면 나는……
저주받은 도시 제2부 수사관 제1장,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나무타는산토끼님의 대화: 여담이지만 투하체프스키가 주장했던 '종심작전이론'은 러시아를 휩쓸던 독일군의 유명한 '전격전 (이것도 후대에 붙인 이름이지만)' 이론과 비슷한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임무형 vs 통제형 전술, 소수의 돌파구에 병력 집중 vs 파상 공세를 펼치다가 약한 부분에 집중 등의 디테일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전차의 빠른 돌파력과 항공 지원, 보병과 전차의 협동 전투를 통해 전선에 돌파구를 만들고 그 쪽에 전력을 집중하여 적의 전선 방어 붕괴를 유도한다라는 내용이 거의 비슷하죠. 1930년대에 '독일이 예고 없이 침공을 해올 수 있다'라고 (스탈린이 결단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최고의 악몽 시나리오) 홀로 주장하던 투하체프스키가 살아 있었더라면 독소전 초반에 그토록 치욕스러운 소련의 연속적인 참패 시나리오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후대의 평가가 많았죠. 그렇지만 의심병 환자인 스탈린이 살려두기에는 투하체프스키는 너무 잘 났었죠. 게다가 잘 생겼었고...러시아 제국군 출신이고...
투하쳅스키는 죽어서도 제대로 묻히지 못했더군요. 돈스코예라는 지역에는 대규모 화장터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주요 정계 인물들의 재가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장소 자체도 악의적인 게, 과거 제정 러시아 시절 동방 정교회가 있었으나 소련의 박해로 철거된 곳으로 골랐다네요. 당연히 스탈린과 공산당의 위세가 한창일 때는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추모 공간이 되어 희생자들을 기리는 곳으로 바뀌어 있고요. 여러모로 비극적인 인생이라 지금까지도 러시아인들에게 기억되는 거겠죠. 포부와 능력과 자신감이 충만했으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주변환경에 의해 휩쓸리고 좌절 당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좀 더 찾아보니 당시 독일도 투하쳅스키가 가장 큰 위협이 될 걸 알았기에 일부러 소련 정보기관에 그가 서방과 내통한다는 거짓 정보들을 흘렸다고 하네요. 제 개인적인 의견은, 스탈린이나 소련에서 거짓 정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독일과 스탈린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기에 옳다구나 하고 일부러 거짓임을 알면서도 투하쳅스키를 제거할 구실을 서로 서로 이용한 게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시대와 운과 사람이 따르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인이네요. 조국에 충성을 다했음에도 적대국과, 지도자와, 주변의 전우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살다 간 운명..
안드레이는 게임 판에서 흰 말을 치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검은 말을 놓았는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조끼를 입은 야생 고양이가 생에 처음으로 조련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더니 담배를 많이 피워 누래진 이를 드러내며 적의 어린 비웃음을 보내는 장면을 목격했다. 곧 피부가 까무잡잡한, 올리브처럼 까무잡잡하고 러시아인도 유럽인도 아닌 듯한 인물이 열에 끼어들어 푸른 코안경 쪽으로 미끄러지더니 녹이 슨 커다란 삽을 휘둘렀다. 코안경이 푸른 빛줄기를 그리면서 옆으로 날아갔고 창백한 얼굴을 한, 위대한 연단과 실패한 독재자의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신음을 내뱉으며 다리가 꺾였다. 그의 크지 않은 유려한 몸이 열대의 태양에 달구어진, 아주 낡아 이가 빠진 계단으로 굴러떨어져 하얀 먼지와 선홍빛 진득한 피에 뒤덮였다…… 안드레이는 숨을 고르고 목에 걸리적거리는 덩어리를 삼키고는 다시 체스보드를 바라보았다.
저주받은 도시 제2부 수사관 제2장,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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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님의 문장 수집: "안드레이는 게임 판에서 흰 말을 치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검은 말을 놓았는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조끼를 입은 야생 고양이가 생에 처음으로 조련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더니 담배를 많이 피워 누래진 이를 드러내며 적의 어린 비웃음을 보내는 장면을 목격했다. 곧 피부가 까무잡잡한, 올리브처럼 까무잡잡하고 러시아인도 유럽인도 아닌 듯한 인물이 열에 끼어들어 푸른 코안경 쪽으로 미끄러지더니 녹이 슨 커다란 삽을 휘둘렀다. 코안경이 푸른 빛줄기를 그리면서 옆으로 날아갔고 창백한 얼굴을 한, 위대한 연단과 실패한 독재자의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신음을 내뱉으며 다리가 꺾였다. 그의 크지 않은 유려한 몸이 열대의 태양에 달구어진, 아주 낡아 이가 빠진 계단으로 굴러떨어져 하얀 먼지와 선홍빛 진득한 피에 뒤덮였다…… 안드레이는 숨을 고르고 목에 걸리적거리는 덩어리를 삼키고는 다시 체스보드를 바라보았다."
붉은군대를 창설한 군사 지도자(“조련사”)이자 뛰어난 대중 연설가(“위대한 연단”)였고, 스탈린의 최대 정적이었던 레프 트로츠키의 최후가 아주 상징적으로 묘사돼 있네요. 스탈린이 보낸 스페인인(“올리브처럼 까무잡잡…”)에게 등산용 피켈(“녹이 슨 커다란 삽”)로 암살당한 장소가 망명지 멕시코(“열대의 태양”)였다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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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전권독파 - 요시카와 에이지 버전으로[모집] 평생의 숙제 인간관계, 삼국지의 영웅들에게 답을 묻다 (w. 『최소한의 삼국지』)
혼자이기에 오히려 깊이 읽은 책들
<인간의 대지> 오랜만에 혼자 읽기 『에도로 가는 길』혼자 읽기천국의 열쇠 혼자 읽기거실의 사자 : 고양이는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고 세계를 정복했을까
부커상을 받았어요
[책증정][1938 타이완 여행기] 12월 18일 오후 8시 라이브채팅 예정! [이 계절의 소설_봄]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함께 읽기[Re:Fresh] 3. 『채식주의자』 다시 읽어요.[서울국제작가축제X비채]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함께읽기 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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