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3.저주받은 도시 - 스트루가츠키 형제(1부)

D-29
복도에서 그는 말없이 왕의 팔꿈치를 잡고 데려갔다. 왕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랐으며 안드레이는 문득 왕이라면 처형장도, 고문실도, 그 어떠한 굴욕적인 자리에도 바로 지금처럼 이렇게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따라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드레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의 타협에는 뭔가 동물적인 것이, 인간에는 미치지 못하나 동시에 고귀하고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타협의 이면에는 발생하는 사건의 대단히 깊고 은밀하며 영원한 핵심에 대한 어떤 초자연적인 이해가, 영원한 무용성, 즉 저항의 무가치성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양은 서양이고, 동양은 동양이다. 이 문구는 기만적이고 불공정하며 비하적이기까지 하지만, 이 경우에는 왜인지 적절한 듯했다.
저주받은 도시 제2부 수사관 제3장,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아니, 더 좋지 않아." 왕이 말했다. "더 떨어질 곳이 없는 자리에 있는 편이 가장 좋아. 넌 이해 못 해, 안드레이." "왜 반드시 떨어진다고 생각해?" 안드레이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왜인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돼.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당장 떨어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력을 해 가며 버텨야 하지. 나는 알아. 그 모든 걸 다 겪었어."
저주받은 도시 제2부 수사관 제3장,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왕은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이가 말을 마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네 말 이해해. 너는 네 식대로 옳아. 그런데 너는 여기 건설을 하러 왔지만, 난 여기로 도망쳐 온 거거든. 넌 투쟁과 승리를 추구하지만 나는 안정을 추구하고. 우리는 아주 달라, 안드레이." "안정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야? 너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야! 네가 안정을 원했다면 번듯한 직책을 맡아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았겠지. 여기엔 번듯한 직장이 차고 넘치잖아. 그런데 너는 가장 더럽고 가장 인기 없는 직업을 고르고는 성실하게 일하고, 힘도, 시간도 아낌없이 쓰면서…… 그러는 네가 무슨 안정을 찾는다는 거야!" "영혼의 안정 말이야, 안드레이! 영혼의 안정!" 왕이 말했다. "나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맺는 관계에 있어서의 안정 말이야."
저주받은 도시 제2부 수사관 제3장,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그저 모든 것이 올바르고 합리적이도록 정의롭게 처리하고 싶었을 뿐인데 웬 자선을 베풀고 제 식구 감싸기를 하고 연줄을 행사한 꼴이 되어 버렸다……
저주받은 도시 p.288,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보로닌 수사관은 그 어떠한 것도 약속할 수 없다. 그럴 권한이 없다…… 그때 그는 문득 왕의 눈을 봤다. 이상한, 특유의 이상함이 대단히 익숙한 시선이었고, 안드레이는 갑자기 모든 것을 떠올리고는 그 기억 때문에 온몸이 후끈거렸다.
저주받은 도시 p.289,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소문의 확산은 무서운 일이지만, 그 어떠한 소문보다도 무서운 것이 붉은 건물이다. 사람들이 들어갔다가 영원히 사라져서가 아니라, 때때로 사람들이 거기서 나오기에 무서운 것이다! 나와서, 돌아와서 우리 사이에 섞여 산다. 카츠만이 그러하듯……
저주받은 도시 p.293,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그곳에서 그 내부의 무언가가 망가졌고 그는 무언가를 영원히 잃었다……
저주받은 도시 p.293,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나는 이전에 도시의 문서 보관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사회를 위한 봉사 차원에서 계속 그 일을 하는 거고 모든 고문서 자료에, 즉, 도시 경계 밖에 있는 자료에도 마찬가지로 접근 권한이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저주받은 도시 p.302,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됩니다만.” 이쟈가 말했다. “꿈 비슷한 겁니다. 겁먹은 양심의 환영이라고요.”
저주받은 도시 p.303,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속은 찝찝했고 입안은 텁텁한 데다 마치 똥을 잔뜩 처먹은 듯 역했다. 신문은 편향되었으며 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붉은 건물 가설을 완전히, 전적으로 헛짚었다.
저주받은 도시 p.308,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런데 왜 이런 소문이 생기는 겁니까? 그게 누구에게 필요한 일입니까? 소문이 어디서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누가 만들어 낸 겁니까? 누가 퍼뜨리고 있습니까? 어째서일까요?
저주받은 도시 177p,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헛소리와 위험한 속삭임과 거짓의 혼돈 속에서 지금도 계속 활동중일 정보원들을, 불길한 안개를 드리우는 중심을 찾아야 한다....
저주받은 도시 193p,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이곳은 절대악의 왕국이 아닌데요.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혼돈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 혼돈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저주받은 도시 256p,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분명,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면 뮛 하러 타협을 하고 또 끈질긴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까.
저주받은 도시 259p,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왕의 타협에는 뭔가 동물적인 것이 인간에는 미치지 못하나 동시에 고귀하고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타협의 이면에는 발생하는 사건의 대단히 깊고 은밀하며 영원한 핵심에 대한 어떤 초자연적인 이해가, 영원한 무용성, 즉 저항의 무가치성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도시 279-280p,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1부까지는 아직 어떤 내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2부부터는 [도시]의 내막과 상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하는데요. 2부까지 읽은 내용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1) 1부와 2부에서의 안드레이가 주는 인상은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일까요? 청소부/수사관이라는 직업일까요? 아니면 '붉은 건물' 사건 때문이라고 보시나요? 2) '왕'은 직업을 바꾸고 싶지 않다며 계속 청소부로 남기를 고집합니다. 그는 책임질 아내와 아이가 있음에도 더 높은 보수를 주는 자리에 가려고 하지 않죠. 왕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혼의 안정'을 택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영혼의 안정'은 무슨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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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in님의 문장 수집: " 에필로그 책 속 부역자들의 문제는 이들의 기만이, 때로 아마도 거짓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기만이, 결국 자기기만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거짓 속에서 살다보면 흔히 그런 결과를 맞는다. 나는 책 앞부분에서 독재와 강점 세력에 저항했던 사람들 또한 이름이나 문서나 정체성을 꾸며냈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스스로를 기만하지는 않았다. 그늘 속에서 비밀스럽게 살았을지언정 진실 속에서 살았다. 반면 두려움이나 기회주의에 사로잡혀 거짓 속에 사는 사람들은 결국 거짓에 사로잡혀버린다. 기와시마 요시코와 프리드리히 바인레프와 펠릭스 케르스텐은 성장 배경이 복잡하고 다문화의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단테의 여덟 번째 지옥에 간 것이 아니다(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아홉 개의 지옥 중 여덟 번째 지옥은 사기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간다). 타인을 속였기 때문에 다른 사기꾼들과 함께 여덟 번째 지옥에 간 것도 아니다. 이들이 지옥에서 고통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스스로를 속였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인생을 허구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런 정체성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독재 체제에 살고 있든 그렇지 않든, 우리 중 많은 수가 여전히 그런 우울한 상태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 "
2부를 읽으면서 언급해주신 내용이 떠오르네요. 267~268쪽에 언급되는 '유다 스투팔스키'는 실존인물인 줄 알고 이름을 찾아봤지만 정보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허구의 인물인가 봅니다. 하지만 동포들을 게슈타포에게 팔아넘겼다는 대목에서 바인레프가 겹쳐 보이네요. 마침 노인이 [도시]를 지옥으로 언급하며 단테를 말하기도 하고요.
은화님의 대화: 2부를 읽으면서 언급해주신 내용이 떠오르네요. 267~268쪽에 언급되는 '유다 스투팔스키'는 실존인물인 줄 알고 이름을 찾아봤지만 정보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허구의 인물인가 봅니다. 하지만 동포들을 게슈타포에게 팔아넘겼다는 대목에서 바인레프가 겹쳐 보이네요. 마침 노인이 [도시]를 지옥으로 언급하며 단테를 말하기도 하고요.
네 저도 그 노인이 나오는 부분을 읽으면서 찾아봤는데 실제 인물이 아니더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살아남은 미꾸라지 같은 면모에서 바인레프와 겹쳐보이는 부분이 많습니다.
여기, 코앞에서 아주 촘촘한 망이 짜이고 있는데 나는 소문의 출처나 찾아야 하고……
저주받은 도시 p.309,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다른 한편으로는 물론, 나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실험처럼 대대적인 과업에는 다양한 계급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이는 즉, 분열과…… 반목…… 유동적인 반목이라고는 하지만…… 적대적인 투쟁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니……
저주받은 도시 p.309,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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