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G님의 대화: 사실, 4장은 많이 배운 장이기도 하지만, 새(폴스키) 선생이 그다지 페어하지 않다는 증거로도 보이는데요. 예를 들어, 마이클 가자니가 같은 뇌과학계 구루의 주장은 그저 한두 문장으로 ‘웃기다’ 이렇게 논평하고 넘어갈 게 아니거든요(117쪽). 저는 새 선생이 아주 낡은 패러다임에 갇힌 분 같아요. :)
철학 개념 가운데 ‘지향성’이 있습니다. 원래는 (새 선생이 질색할) 주체 철학의 중요한 키워드였어요.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한(about) 의식’이라는 명제가 지향성의 핵심입니다. 주체(인간)와 객체(세계/물질)를 가르는 결정적 경계선이 바로 지향성이라는 개념입니다. 새 선생이라면 “개코 같은 소리”라고 할 법한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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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지향성’이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한동안 @장맥주 작가님과 그믐 여러분이 함께 읽었던 브루노 라투르 같은 철학자, 또 최근에 현대 사상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현대 물질주의 철학자가 이 ‘지향성’을 전혀 다른 의미로도 재해석해서 사용하고 있거든요. 철학자마다 핀트가 조금씩 다릅니다만, 제가 이해하는 공통점은 이렇습니다.
알다시피 이들은 인간과 비인간(기술, 물질, 생물, 인프라 등)을 같은 층위에서 다루는 ‘일원론적 인류학’을 지향합니다. 여기서 지향성은 고립된 인간 주체가 행동 전 미리 품고 있는 ‘선험적 의도(자유 의지?)’가 아닙니다. 지향성은 같은 네트워크(망)에서 상호 작용하는 인간과 비인간이 결합해서 형성되는 특정한 효과인 것이죠.
가장 고전적인 예로 설명해 보자면, 총의 존재입니다. 총이 없을 때의 인간과 총이 있을 때의 인간은 전혀 다른 효과를 낳죠. 라투르 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총과 인간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총-인간’이라는 새로운 행위자가 등장하게 되고, 그때 나타나는 이 연합의 효과야말로 지향성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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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읽고서, 새 선생 얘기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지향성의 새로운 해석이 새 선생이 짜놓은 결정론의 프레임 자체를 흔들 수 있고, 자유 의지의 틈새를 다른 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선생의 생각부터 시작해서 아이디어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새 선생의 논리 구조에서 인간(혹은 인간의 뇌)은 일종의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유전자, 호르몬, 태아기 환경, 문화적 배경 같은 입력값이 주어지면 뇌라는 복잡한 회로를 거쳐 행동이라는 출력값이 고스란히 도출되는 통로라는 것이죠. 이런 구조 속에서 자유 의지가 들어갈 틈새는 정말로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라투르 같은 철학자의 시각에서 인간은 결과물이 아니라 매개자에 가깝습니다. 한 주체(인간)가 과거의 원인(유전자, 환경)에 얽매여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원인이 현재의 구체적인 물질적 네트워크(도구, 기술, 제도, 텍스트 등)와 상호 작용하면서 결합하는 순간 그 주체를 결정했던 과거 원인의 효과는 뒤틀리고 재배치됩니다.
이 뒤틀리고 재배치되는 순간이야말로 새 선생식 용어로 따지면 ‘틈새’라고 생각합니다. 가자니가는 새 선생보다 18년 선배인데요(1939년생). 이분 주장의 틀은 놀랍게도 라투르 등과 비슷합니다. 다만, 비인간의 자리에 타인을 놓고 있을 뿐입니다. 즉, 한 주체(인간)가 과거의 원인(유전자, 환경)에 얽매여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다만, 현재 그가 무슨 행동을 할 때는 항상 그 시점의 타인, 공동체 그리고 그것이 무형화된 결과인 제도 등과 상호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상호 작용의 순간에 그 주체를 결정했던 과거 원인의 효과는 뒤틀리고 재배치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순수한 의지력(4장의 ‘그릿’)만으로는 술을 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알코올 중독자는 과거의 원인 탓이니 그를 비난하는 것도 멈춰야 합니다. 다만, 술이 없는 물질적 환경을 조성하고 중독자 치료 커뮤니티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에 자신을 접속시킴으로써 알코올 중독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과정의 성패에 따라 다른 미래가 펼쳐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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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선생은 그 ‘술이 없는 물질적 환경을 조성하고 중독자 치료 커뮤니티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 또 그것에 접속할 수 있는지조차도 또 다른 외부 결정 요인이라고 반박하겠죠. 결과 C를 낳는 원인 A, B 안에 모든 것을 우겨서 넣을 수 있는 무적의 논리니까요. (라투르 등은 이런 주장에도 실소할 겁니다. 왜냐하면, A-B-C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번역과 굴절이 필수니까요.)
그런데 이런 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 치료를 돕는 특정 의약품(날트렉손 등)의 개발 과정이나 알코올 중독자 치료 커뮤니티의 행동 강령은 그 중독자 개인의 과거 원인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독립적인 자기만의 역사와 계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한 개인이 그런 특정 의약품과 알코올 중독자 치료 커뮤니티와 접속했다면, 그것마저도 태초부터 뇌에 예정되어 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 접속으로 그의 미래 삶이 완전히 다른 경로로 갔다면 그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A-B-C의 인과 관계 안에 X가 들어와서 ‘C+X’라는 새로운 하이브리드 주체의 지향성이 D라는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이 ‘C+X’에서 D로 가는 과정이야말로 일종의 틈새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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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인간은 자신이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결정 요인을 역으로 이용하는 성찰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알코올 중독자 치료 커뮤니티의 행동 강령과 단주 노하우야말로 그 단적인 증거죠.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의 성찰의 결과로 그런 제도가 만들어졌고, 후대의 알코올 중독자는 그 제도와 접속할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가자니가가 “책임은 우리의 결정론적인 뇌가 아닌 다른 수준의 조직, 즉 사회적 조직에 존재한다”(117쪽)고 말할 때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결론을 얘기하고 싶어 하면서도 새 선생은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런 견해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제가 페어하지 않다고 한 이유입니다. :)
마침 제가 읽고 있는 다른 책에 마이클 가지니가(이름이 너무 어려워요)의 분리뇌 실험이 등장하네요.
좌뇌와 우뇌를 잇는 뇌량이 단절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인데, 이런 사람들에게 왼쪽 눈과 오른쪽 눈에 각각 다른 이미지를 보여 주고 어떤 이미지를 봤는지 선택하게 하면, 예를 들어 왼쪽 눈에 닭을 보여주고 오른쪽 눈에 제설용 삽을 보여주면, 삽은 인식하지 못하고 닭을 봤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른쪽 뇌의 통제를 받는) 왼쪽 손으로 자기가 본 이미지를 가리키라고 하면 삽의 이미지를 가리킨대요. 그리고 왜 닭을 봤다고 하면서 삽을 가리키냐고 물으면 "닭장을 치우려면 삽을 이용해야 하니까요" 하는 식으로 이유를 지어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자기가 말하는 이유 때문에 삽을 가리킨 거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실험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