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G님의 대화: 오늘 7월 23일 목요일은 11장 '자유 의지 회의론자는 난동에 가담할까?'를 읽습니다. 이번 장의 핵심 질문은 '자유 의지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 비해서 더 엉망으로 살아갈까?' 이 질문에 대한 새 선생의 일차 답변입니다. 그 답변을 이끌어 내고자 새 선생은 분량의 상당 부분을 종교인과 무신론자 사이의 여러 비교 연구를 들이대고 있어요. 종교인(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 무신론자(자유 의지가 없다고 믿는 사람). 이런 대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 전체에서 새 선생의 논지 전개가 제일 취약한 장이 11장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종교인을 과연 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신의 뜻대로’라는 생각을 가지고 “미래는 이미 신의 뜻(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는 숙명론자(새 선생이 인용하는 철학자 닐 레비 등의 표현대로라면 ‘운명론적 결정론자’) 아닌가요?
또 무신론자 가운데도 분명히 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고 확신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지난 4월에 함께 읽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의 주인공 휴머니스트야말로 신의 뜻이 아니라 자기 의지(자유 의지)로 자신과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무신론자들이었잖아요.
이렇게 비유의 전제가 흔들리다 보니, 저로서는 논지 전개를 위한 설득력이 아주 취약한 장으로 보였답니다. 사실, 개인적인 경험도 있어요. 과학자 중에도 이상한 과학자 아주 많습니다. 과학자 가운데 민주당이나 국민의힘 열성 지지자 가운데 정말 대책 없는 선악 이분법에 갇혀서 내집단 옹호, 외집단 증오에 앞장서는 분들 많고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 중에서도!)
그런 과학자 가운데 특히 이상한 사람들 중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나 불교인도 많고, 그렇다고 무신론자가 덜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 여기서 다시 새 선생의 논지로 돌아가는데, 그냥 세상에는 한 30% 정도의 선한 경향의 사람과 한 30% 정도의 악한 경향의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 양극단 30% 안에는 각각 종교인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고 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자유 의지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들의 선한 의지를 북돋고 악한 의지를 자제시키는 역할이 제도이고, 그것이 바로 마지막에 새 선생이 드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사례가 증명하는 모습이겠죠.
11장 논지 전개는 엉망이었지만, 앞의 두 단락은 사실 전형적으로 새 선생의 논리이죠; 하지만, 저는 원래 자유 의지의 틈새가 아주 작다고 생각하는 구조주의자였으니까,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고요. :) 새 선생이 현대 철학의 구조주의자, 예를 들어 미셸 푸코 등에 호의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새 선생이야말로 그런 구조주의자 같아요.
미셸 푸코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같은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사회·담론이라는 수면 아래의 구조(Structure)가 주체를 구성한다’며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죠. (이렇게 2025년 12월에 읽은 『미셸 푸코: 1926~1984』와 이어집니다.)
새 선생은 그 ‘구조’의 자리에 언어나 담론 대신 ‘유전자·호르몬·전전두엽·유년기 환경’이라는 생물학적 구조를 가져다 놓았을 뿐, 인간 주체를 해체하는 방식과 논리 구조는 구조주의와 완벽히 판박이입니다. 공부를 더 하시면 반할 텐데; 이 과학자의 인문학 폄훼도 내집단 옹호, 외집단 증오의 한 본보기입니다.
(새 선생 사모님(리사 새폴스키)이 뮤지컬 연출가이니, 또 뮤지컬 사랑은 어찌나 극진한지. :))
근본주의자 fundamentalist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새박사님은 진심 fundamentalist 같다는 너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