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

D-29
그러는 동안 나는 유리가 창에 잘 맞는다는 것을 확인했고, 유리에 먼지가 잔뜩 끼어 흐릿했기 때문에 맑은 시냇물 속에 담가 돌멩이에 닿아 깨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씻었다. 그런데 이 반짝이는 유리를 해가 있는 쪽으로 높이 치켜들고 비춰보는 순간 나는 지금껏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경이를 보게 되었다.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세 명의 소년 천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 그러나 이 모습은 너무나 희미하고, 어렴풋하게 비쳐서 나는 그것이 태양빛 속에 있는 것인지, 유리 속에 있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단지 내 공상 속에 떠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리판을 움직여보면 일시적으로 천사들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면 갑자기 다시 천사들이 보였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난 이후에 나는 수년간 유리 액자 속에 그대로 끼워져 있는 동판화나 스케치는 그 긴 세월 동안 어두운 밤이면 유리에 자신의 모습을 전한다는 것을, 말하자면 유리 속에 자신의 거울상과 같은 것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원에 머문 날들 133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작품 속에는 유달리 "철 지난 쓸모없고 이상한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꼽으면서, 제발트는 켈러의 잡동사니 사랑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 고물들 지속적으로 순환해야만 하는 자본과 달리 교환관계에서 빠져나와 있다 것입니다. 이는 바로크 판타지이자 시인 특유의 수집벽으로서, 제발트는 켈러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가능성에 대해서 다음처럼 씁니다.
그리고 슐뤼터가 마찬가지로 언급하고 있듯이 그 서사적 태도가 자신의 아이러니적 성격을 획득하는 방식은 사물과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바라본 지나치게 선명한 이미지들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켈러의 예술적 영감이 아무리 그의 내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켈러를 때늦은 혹은 감춰진 사순절 설교자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리라. 켈러의 무상성 철학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바로 그 철학을 감싸는 명랑한 광채다.
전원에 머문 날들 131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5 ~⟨고독한 산책자⟩] 5장은 소설가이자 산문가인 로베르트 발저를 다룹니다. 제발트의 다른 책에서도 로베르트 발저의 언급이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제발트는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로베르트 발저는 살아 생전에 문학적인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동시대 작가인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로베르트 발저를 참 좋아하는데요, 한국에서도 발저의 소설과 산문집이 여러 권 출간 돼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끝⟫이라는 산문집과 ⟪벤야멘타 하인학교⟫라는 소설을 애정합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내세우려는 사람이 많은 시대에서 발저의 작품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모두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세상에서, 어찌 보면 개성없이 개성만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저의 인물들은 이상하리만치 자기 존재감을 지우기에 열중합니다. 우뚝 군림하려는 마키아벨리즘적 인물상의 대척점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하인과 같은 위치의 사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발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바로 발저가 '재'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해당 내용을 재인용하면서 5장 시작합니다.
벤야멘타 하인학교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벤야멘타 하인학교』. 생전에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다. 로베르트 발저는 1970년대 그의 난해한 작품들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스위스의 국민작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소설은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입학하는 귀족 태생의 소년 야콥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성장과 발전으로
세상의 끝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평생 고독 속에 칩거했다. 현존 작가 마르틴 발저(M. Walser)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깊이 은둔했던 시인’이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운명적 친화성을 느꼈던 소설가 제발트(Sebald)는 발저의 인생행로에 남은 흔적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고도 했다.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작가는 흔히 작품 외에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소상
산책자20세기 독일문학사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놓인 작가이자 스위스의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중단편 42편을 모아 엮은 대표 작품집『산책자』. 저자가 남긴 수백편의 작품 중 그를 대표하는 작품을 엄선하여 수록한 것으로, 작가 배수아의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다. '걷기'는 저자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로, 실제 저자는 많은 시간을 걸으며 길 위의 작은 것들에 시선을 두고 그 관찰과 사색을 작품에 담아냈다. 저자는 산책에 강박적으로 몰두했는데
실제로 조금만 깊이 정신을 집중하면 겉보기에 전혀 흥미롭지 않아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전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닌 점들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재를 휙 하고 불면 일말의 저항도 없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재는 겸손하고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것 그 자체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점은 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믿음으로 뭉쳐 있다는 점이다. 재보다 더 덧없고 연약하고 가련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재보다 더 유순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재는 개성을 가질 줄 모르며, 원래의 나무로부터 의기소침이 의기양양과 떨어져 있는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재가 있는 곳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재를 밟아보라. 그러면 밑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느껴지지도 않으리라.
전원에 머문 날들 151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첫장만 읽고는 시험과 과제가 겹쳐 책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문은 소설보다 생각의 영역이 넓고 깊어 가볍게 읽지 못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russist 께서 올려주신 내용을 참고서 삼아 이번 여름 여행을 시작하며 차근차근 잘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은 면에서 참 훌륭한 독서 길라잡이님이십니다. ^^
사실 매번 모임 때마다 저 혼자 말하는 느낌이라, 제가 뭘 잘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하긴 합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종종 감상 남겨주세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5 ~⟨고독한 산책자⟩]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발저의 형제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후손을 많이 낳아서 기르는 것이 관례이던 시대에 아버지인 아돌프 발저는 무려 십오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후에 로베르트 발저를 포함해서 총 여덟 명의 형제를 낳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저 형제들은 이상하게도 단 한 명의 자식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시작되었던 산업혁명이 근 한 세기가 넘도록 절정을 유지하던, 막대한 생산성의 시대에서 자신의 후대를 남기는 순환의 고리가 끊어졌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게 읽힙니다. 더욱 재밌는 점은, 발저가 쓴 산문 중에서 발저가 가상의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에게 쓴 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짧은 산문에서, 발저는 제도권 중심의 교육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빛나는 교육'이 필연적으로 한 인간에게 "빛나는 성과를 요구하고, 빛나는 인생행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발저는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들아, 줄곧 성공만 생각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너는 부족한 교육 덕분에 오히려 모범이 되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끔찍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자유인이 되는 거야. 자연의 아들, 세상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 너는 자유롭게 숨 쉬고 살게 될 거다. 모범적인 사람들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여담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도 "아들아 인생을 어떻게 살아라" 하는 시리즈가 유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러한 교육관은 아버지가 자기 시대에 정답이라고 믿는 가치관이 아들의 시대에서도 유효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 근거합니다. 어쩌면 발저는 그러한 '빛나는 교육'의 외피를 입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경계했던 것 같아요.
세상의 끝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평생 고독 속에 칩거했다. 현존 작가 마르틴 발저(M. Walser)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깊이 은둔했던 시인’이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운명적 친화성을 느꼈던 소설가 제발트(Sebald)는 발저의 인생행로에 남은 흔적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고도 했다.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작가는 흔히 작품 외에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소상
다시 돌아와서 본문 얘기를 해보자면, 5장에서도 제발트는 자신이 다루는 인물과 자신을 겹쳐 봅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조부의 외형과 발저의 그것이 매우 흡사했다고 밝히면서, 발저 산문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산문적 특성이기도 하죠. 앞서 4장에서 소개한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저의 글에서는 자기 시대를 적극적으로 혁명하려는 정치적 열망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만 발저는 지독한 끈기로 매일 희망도 절망도 없이 글쓰기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다만 헤벨처럼 민중들을 궐기하려는 욕구가 없었고, 루소처럼 코르시카를 배경으로 자신만의 정치적 이상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뫼리케처럼 전원 풍경으로 도피하면서 자신을 문학저 격벽 안쪽에 세워두지도 않았습니다. 또 켈러처럼 다시 한번 문학으로써 정치 참여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벌저의 글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자기 생의 방향타를 쥐고서 무언가로 변모해 가려는 의지가 흐릿합니다. 그런데도 그 과정은 전혀 체념적이거나 비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세계 몰락을 예언하는 표현주의적인 선지자"라기보다는, "미미한 사물의 전문 투시자"라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쩐 일인지 맑고 무구한 눈동자가 연상됩니다. 제발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토로 그늘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펼치는 페이지마다 더없이 다정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순수한 절망에서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항상 같은 이야기를 쓰지만 절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며, 미세한 부분에서 예리함을 발휘하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라워하고, 지상에 확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지만 공중에서 주저 없이 자신을 놓아버리는 그런 작가, 읽는 도중에 벌써 해체되기 시작해 몇 시간 뒤에는 글 속의 하루살이 같은 인물과 사건, 사물 들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지는 산문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원에 머문 날들 153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제발트도 언급하듯, 발저의 글 근저에는 유용해지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나아가 망각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유의 잉여성이 있습니다. 언젠가 발저는 자신은 이 산문 저 산문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다채롭게 조각나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나'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인공 '나'가 '나'라는 책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행인들 무리 속에 안전히 은신하고 있다." 이는 제발트가 2장에서 루소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나'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거의 은폐되는 방식으로 산문을 전개한 것이 연상됩니다. 또한 제발트는 발저가 크라이스트를 다룬 산문을 읽으며, 고트프리트 켈러와 크라이스트와 로베르트 발저가 기이한 방식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듯 전혀 상관없어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인물 사이에서 연결점을 모색하고, 그것을 전경화하는 것은 제발트 특유의 서술법입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드러나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5장 마칩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때부터 나는 모든 것이 시공간을 뚜이ㅓ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법을 차츰 배우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작가 클라이스트의 삶이 툰에서 악치엔 양조장 직원으로 일했다고 주장하는 스위스 산문작가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베를린 반제 호수에 울려퍼진 권총 소리가 헤리자우 요양원의 창에서 바라본 풍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발저가 떠난 산책과 내가 떠난 소풍이, 출새일과 사망일이, 행복과 불행이, 자연의 역사와 우리 산업의 역사가, 고향의 역사와 망명의 역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 모든 여정에서 발저는 항상 내 옆에서 같이 걸었다. 나는 일상의 작업을 중단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딘가 구석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방금까지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있던, 도저히 몰라보고 지나칠 수 없는 고독한 방랑자의 형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그의 두 눈으로 찬란한 제란트를 보았고, 또 이 제란트에서 은은히 빛나는 하나의 섬 같은 호수를 보았으며, 이 호수의 섬에서 다시금 다른 섬, "가벼운 아침 햇살의 안개에 싸여, 가물거리는 희끄무레한 빛 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생피에르섬을 본 것처럼 생각된다.
전원에 머문 날들 186-187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6 ⟨낮과 밤처럼⟩~] 6장에서는 화가이자 친구인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을 다룹니다. 얀 페터 트리프는 제발트와 함꼐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로서, 제발트가 작고할 때까지도 긴밀히 교류했던 사람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전에 다뤘던 산문집 ⟪캄포 산토⟫의 한 챕턴에서, 제발트는 친구였던 트리프를 만나럿 슈투트가르트 지역으로 갔던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6장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캄포 산토⟫의 ⟨재건 시도⟩를 한번 읽어보세요. 본문에 나오는 도판 자료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는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정물과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단순히 현실을 정밀하게 모사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세부 사항은 사실주의적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서 원근법이 미세하게 틀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마치 그림에 유리를 덧씌워놓은 것처럼 보이게끔 유리의 미세한 실금을 그려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평면에 삼차원을 외삽(interpolienren)"합니다. 하지만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그림 대결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이 겨냥하는 바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외려 현실이 재현되는 맥락, 재현가능성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은 현실과 완벽히 겹쳐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되레 그림이 현실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갈 때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과 그 효과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불가능이란, 아무리 극도로 정밀하게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라는 2차원의 평면 위에서는 "결국 일정한 수효의 기호만 그려넣을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에 바탕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곰브리치의 표현을 재인용하자면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가 황금빛 문직물의 모든 바늘땀을, 천사의 머리칼의 모든 가닥을, 나뭇결의 모든 무늬를 다 그려넣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아무리 확대경을 들고 헌신적으로 작업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의 '현실'을 다만 환기할 뿐이며, 그러기 위해서 적절한 기호를 택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이 도드라지고 어떤 기호가 포착됩니다. 트리프는 바로 그때 포착되는 '단 한 순간의 기호'를 포착하는 데 능합니다. 이를테면, 죽은지 일주일된 생쥐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압정 크기만한 핏방울"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재현 예술이 현실을 환기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캄포 산토W. G. 제발트 선집 3권. W. G. 제발트의 유고집 <캄포 산토>(2003)가 독일에서 출간된 지 15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작은 문학-에세이-학술의 경계를 휘젓는 제발트식 글쓰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작으로 손꼽힌 책이다.
이제 그 동물은 바닥도 배경도 없는 무 속에 감싸여 그 박쥐 같은 귀를 쫑긋 세운 채 희박한 공기 속을 부유한다. 눈가의 새까맣고 얼룩덜룩한 털은 마치 상장처럼, 아니면 북극을 통과해 여름밤을 가로질러가는 비행기 승객의 수면안대처럼 보인다. '우리는 꿈들을 이루는 재료와 같다. 우리의 시시한 삶은 잠으로 완성된다.'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표면의 환영주의 이면에 무시무시한 깊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현실의 형이상학적 안감이다.
전원에 머문 날들 206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6 ~⟨낮과 밤처럼⟩]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은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 앞에서 그림들 간의 참조점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그림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한 작품에서 빈 구두 한 짝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그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유발한 다음에, 전혀 다른 시공간인 15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느닷없이 한 귀퉁이게 그 구두를 가져다 놓는 식입니다. 이른바 그림 안에서 (글쓰기에서나 볼 법한) 인용과 참조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사실성은 한 치 오차도 없을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대상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반복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목적도 아니고요. 롤랑바르트가 카메라를 든 사진사에게서 죽음의 사진을 보았고 사진에는 사멸해가는 사물의 잔여물이 있다고 했지만, 결정적으로 사진 예술이 장례업이 아닌 이유는, 사진 예술이 삶 자체가 아닌 "삶과 죽음의 근접성"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비춰 볼 때, 트리프의 작품은 현실을 모사하기보다는 현실을 예술의 방식으로 환기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현실을 재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현실의 무한하고도 압도적인 규모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환기합니다. 다만 트리프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업이 이뤄지는 방식에서 그의 작품이 안팎으로 연결되고 그 경계에서 사유할 가능성이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제발트는 구두 그림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개에 관해서 언급하며 6장을 마무리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개는 후일 해당 그림을 관람하게 될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다소 특이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비슷하면서도 다른 얘기인데, 영화에서 주인공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장면은 매우 예외적이고 많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있고요. 그 부분을 같이 읽어보면서 6장과 '전원에서 머문 날들' 모임도 함께 마무리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 속에서 자기 신발의 역사와 불가해한 상실에 대해 숙고하는 붉은 머리 여성은 그 비밀의 공표가 그녀 바로 등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비밀의 담지자로서 시간의 심연을 훌쩍 뛰어넘는 개는 어떤 점에서는 우리보다 더욱 정확히 알고 있다. 개의 왼쪽 (길들여진) 눈은 미미하게나마 빛을 덜 발하고, 왠지 삐딱하고 낯선 인상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그늘진 눈이 우리를 꿰뚫어본다고 느끼는 것이다.
전원에 머문 날들 214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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