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발트 읽기] 『전원에서 머문 날들』 같이 읽어요

D-29
그때부터 나는 모든 것이 시공간을 뚜이ㅓ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법을 차츰 배우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작가 클라이스트의 삶이 툰에서 악치엔 양조장 직원으로 일했다고 주장하는 스위스 산문작가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베를린 반제 호수에 울려퍼진 권총 소리가 헤리자우 요양원의 창에서 바라본 풍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발저가 떠난 산책과 내가 떠난 소풍이, 출새일과 사망일이, 행복과 불행이, 자연의 역사와 우리 산업의 역사가, 고향의 역사와 망명의 역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 모든 여정에서 발저는 항상 내 옆에서 같이 걸었다. 나는 일상의 작업을 중단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딘가 구석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방금까지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있던, 도저히 몰라보고 지나칠 수 없는 고독한 방랑자의 형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그의 두 눈으로 찬란한 제란트를 보았고, 또 이 제란트에서 은은히 빛나는 하나의 섬 같은 호수를 보았으며, 이 호수의 섬에서 다시금 다른 섬, "가벼운 아침 햇살의 안개에 싸여, 가물거리는 희끄무레한 빛 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생피에르섬을 본 것처럼 생각된다.
전원에 머문 날들 186-187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6 ⟨낮과 밤처럼⟩~] 6장에서는 화가이자 친구인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을 다룹니다. 얀 페터 트리프는 제발트와 함꼐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로서, 제발트가 작고할 때까지도 긴밀히 교류했던 사람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전에 다뤘던 산문집 ⟪캄포 산토⟫의 한 챕턴에서, 제발트는 친구였던 트리프를 만나럿 슈투트가르트 지역으로 갔던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6장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캄포 산토⟫의 ⟨재건 시도⟩를 한번 읽어보세요. 본문에 나오는 도판 자료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는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정물과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단순히 현실을 정밀하게 모사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세부 사항은 사실주의적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서 원근법이 미세하게 틀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마치 그림에 유리를 덧씌워놓은 것처럼 보이게끔 유리의 미세한 실금을 그려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평면에 삼차원을 외삽(interpolienren)"합니다. 하지만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그림 대결에서도 보듯,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이 겨냥하는 바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외려 현실이 재현되는 맥락, 재현가능성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은 현실과 완벽히 겹쳐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되레 그림이 현실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갈 때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과 그 효과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불가능이란, 아무리 극도로 정밀하게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라는 2차원의 평면 위에서는 "결국 일정한 수효의 기호만 그려넣을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에 바탕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곰브리치의 표현을 재인용하자면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가 황금빛 문직물의 모든 바늘땀을, 천사의 머리칼의 모든 가닥을, 나뭇결의 모든 무늬를 다 그려넣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아무리 확대경을 들고 헌신적으로 작업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의 '현실'을 다만 환기할 뿐이며, 그러기 위해서 적절한 기호를 택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이 도드라지고 어떤 기호가 포착됩니다. 트리프는 바로 그때 포착되는 '단 한 순간의 기호'를 포착하는 데 능합니다. 이를테면, 죽은지 일주일된 생쥐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압정 크기만한 핏방울"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재현 예술이 현실을 환기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캄포 산토W. G. 제발트 선집 3권. W. G. 제발트의 유고집 <캄포 산토>(2003)가 독일에서 출간된 지 15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작은 문학-에세이-학술의 경계를 휘젓는 제발트식 글쓰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작으로 손꼽힌 책이다.
이제 그 동물은 바닥도 배경도 없는 무 속에 감싸여 그 박쥐 같은 귀를 쫑긋 세운 채 희박한 공기 속을 부유한다. 눈가의 새까맣고 얼룩덜룩한 털은 마치 상장처럼, 아니면 북극을 통과해 여름밤을 가로질러가는 비행기 승객의 수면안대처럼 보인다. '우리는 꿈들을 이루는 재료와 같다. 우리의 시시한 삶은 잠으로 완성된다.'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표면의 환영주의 이면에 무시무시한 깊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현실의 형이상학적 안감이다.
전원에 머문 날들 206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6 ~⟨낮과 밤처럼⟩]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은 근원적인 재현불가능성 앞에서 그림들 간의 참조점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그림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한 작품에서 빈 구두 한 짝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그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유발한 다음에, 전혀 다른 시공간인 15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느닷없이 한 귀퉁이게 그 구두를 가져다 놓는 식입니다. 이른바 그림 안에서 (글쓰기에서나 볼 법한) 인용과 참조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얀 페터 트리프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사실성은 한 치 오차도 없을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대상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반복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목적도 아니고요. 롤랑바르트가 카메라를 든 사진사에게서 죽음의 사진을 보았고 사진에는 사멸해가는 사물의 잔여물이 있다고 했지만, 결정적으로 사진 예술이 장례업이 아닌 이유는, 사진 예술이 삶 자체가 아닌 "삶과 죽음의 근접성"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비춰 볼 때, 트리프의 작품은 현실을 모사하기보다는 현실을 예술의 방식으로 환기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현실을 재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현실의 무한하고도 압도적인 규모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환기합니다. 다만 트리프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업이 이뤄지는 방식에서 그의 작품이 안팎으로 연결되고 그 경계에서 사유할 가능성이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제발트는 구두 그림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개에 관해서 언급하며 6장을 마무리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개는 후일 해당 그림을 관람하게 될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다소 특이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비슷하면서도 다른 얘기인데, 영화에서 주인공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장면은 매우 예외적이고 많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있고요. 그 부분을 같이 읽어보면서 6장과 '전원에서 머문 날들' 모임도 함께 마무리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 속에서 자기 신발의 역사와 불가해한 상실에 대해 숙고하는 붉은 머리 여성은 그 비밀의 공표가 그녀 바로 등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비밀의 담지자로서 시간의 심연을 훌쩍 뛰어넘는 개는 어떤 점에서는 우리보다 더욱 정확히 알고 있다. 개의 왼쪽 (길들여진) 눈은 미미하게나마 빛을 덜 발하고, 왠지 삐딱하고 낯선 인상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그늘진 눈이 우리를 꿰뚫어본다고 느끼는 것이다.
전원에 머문 날들 214쪽,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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