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I

D-29
시가 짧아 전문을 올려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연애시로 느껴집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헤어진 다음, '간신히' 일어나 '아침 방송을 들'으며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려는 연인의 노력이 못내 슬프게 다가오네요. 이 시에서 제가 굉장히 흥미롭게 본 점은 문장 부호의 사용입니다. 이 시에는 문장 부호가 딱 한 번 나오는데요 '끝났다' 라는 단어 뒤에 나오는 쉼표입니다. '끝났다' 라는 말 뒤에는 마침표가 나와야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쉼표를 썼습니다. 이 관계는 정말 끝난 것일까요? 시 속의 화자는 우리 사이가 끝난 것이 아니고 잠시 쉬어가는 것이라고 끝끝내 믿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슬픔을 담대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가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어요. 리추얼, 이라는 단어가 생각나기도 했는데요. 맨 마지막 연에서 "어제와 똑같은 아침 방송을 들었다"는 행이 더더욱 그랬고요.
며칠 동안 들어와보지 못했는데 3일 남았군요 벌써! 자기 전에 시집 진득하게 읽어보고 내일 아침에 공유해볼게요.
@고쿠라29 @ㄱㅕㅇㅇㅣ 두 분은 시를 쓰고 계시나요? 아니시라면 얼른 시작하십시오.
한때 썼다가 지금은... 쏘주 님은 시를 쓰는 분이신가요?
일 년에 한 편 씁니다.^^
밤새 현관문을 열어놓고서 밤낚시꾼처럼 간이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고 있어 숲이 깰까 봐 숲이 우르르 일어나 아이를 물고 우리 집을 찾아올까 봐
[죽지 않는 그림자] 파괴된 건물의 파괴되지 않은 그림자들은 볼가 강물과 바람 속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그림자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간다면, 그것은 강물과 바람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림자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 일이다.
전적으로 그림자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 일이다.
이 시의 각주 재밌게 읽었어요. 따로 인용된 문장이 없었기에 저는 시의 일부로 읽었고 "우리가 그림자를 던지자 첨벙, 하고 커다란 소리를 냈고 세상의 모든 강물이 산산이 부서졌다."라는 문장이 가장 인상 깊었답니다. 그림자가 소리를 냈다는 감각을 포착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정말.. 좋아요!
오늘은 4월의 금빛 햇살이 넘실거리네 달걀 껍질 같은 것 막 구운 빵 냄새 같은 것 실오라기가 남아 있는 단추 같은 것, 눈동자 같은 것, 그것은 누구의 가슴을 여미다가 터졌을까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봄날은 간다 (105p), 김행숙
아침에는 집 근처 내천가를 달리고 왔어요. 숨 고르며 돌아오는 길에 '4월의 금빛 햇살'을 본 것 같아요.
저도 같은 시에 눈길이 갔어요. 저는 그럼 <봄날은 간다>에서 다른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신기해, 왼손에 있는 것을 오른손에 옮길 수 있다는 것 내 손에 있는 것을 네 손에 옮길 수 있다는 것 바구니는 넘치는데 우리는 점점 더 가벼워지네 바구니가 우리를 들고 둥둥 떠가는 것 같네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봄날은 간다> 중에서, 김행숙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헤어진 후라면 <봄날은 간다>는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의 모습을 달달하게 그리고 있어요. 장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사러 가는 연인인데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이 공짜이기 때문에 이처럼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들 즉, 햇살, (달걀 내용물 말고)달걀 껍질, (빵이 아니고) 빵 냄새 같은 것들로 바구니를 채우고 싶다고 하네요. 사랑에 빠진 이들에겐 모든 것이 기적으로 느껴지지요. 왼손에 있는 것을 오른손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바구니를 왼손으로 들다가 오른손으로 드는 것일까요?) 내 손에 있는 것이 네 손으로 가는 것(바구니를 내가 들다가 애인에게 넘겨줄 수도 있겠죠?) 장바구니에 구매한 물건을 담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바구니는 엄청 무거워졌을 테지만 연인들의 마음은 풍선처럼 하늘을 날아갑니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시네요. : )
여드레 동안 시집 읽기가 끝났네요. 모르는 시집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시를 여러 편 만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문학의 언어란 본래 그러한 것이다. 말라르메가 말했듯 언어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 야콥슨이 말했듯 언어 자신을 전달하는 언어, 이 언어들이 존재하는 장소가 문학이다. 김행숙의 시에서 언어들이 일종의 존재로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러한 의미에서다.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진정한 말의 시, 함께-있는 밤을 위하여' (박슬기) p. 128, 김행숙
저도 마침 김행숙 시인의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를 못 읽고 있다가 다시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내맨뒤에 해설에서 좋은 문장을 발견해서 공유해봅니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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