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 놓고 안 읽은 책 독파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D-29
너무 좋은데 양에 질렸던 건지 끝까지 읽지 못하고 2023년을 맞이했다. 거의 절반 읽었지만 흐름을 다시 타고자 첫 페이지로 되돌아가 봄!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0,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7,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28,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헤미아는 정복자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알렉산드르 둡체크처럼 영원히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일상적 모욕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8,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감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6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작가가 자신의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토마시는 'einmal ist keinmal.'이라는 문장에서 태어났다. 테레자는 배 속이 편치 않을 때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6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하긴 어머니의 운명에 대한 책임이 테레자에게 있다는 말은 어쩌면 정확할 것이다. 그녀. 남자 중에서 가장 남성적인 남자의 정자 하나와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난자가 이룬 부조리한 만남. 테레자라고 이름 붙여진 운명적 순간에 어머니는 실패한 인생의 마라톤을 시작한 것이다. ...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7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그런 모든 행동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내팽개치려는 유일하고 격렬한 몸짓이었다. 아홉 구혼자가 그녀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던 시절에 어머니는 맨살이 드러날까 조바심을 내던 여자였다. 그녀는 수줍음을 자기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 그녀는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82,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토마시 대신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자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베토벤과 푸줏간 주인의 만남 역시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92,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늬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93,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독학자와 학교에 다닌 사람의 다른 점은 지식 폭이 아니라 생명력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 차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98,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요즘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유들은 누군가가 이미 했던 사유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앞으로도 새로울 것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사유와 내가 쓰는 글들은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지. 너무도 공감이 가기 때문에 적어 두고 싶은 문장이 있고, 너무도 공감가지 않아서 적어 두고 싶은 문장이 있다. 참 신기한 것은 이 책을 다시 읽기까지의 간격이 고작 몇 개월에 지나지 않음에도 표시해 두고 싶은 문장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가 그간 어떤 식으로든 성장했기 때문인지, 인생이 지나갈수록 내게 중요해지는 요소가 달리지기 때문(그것은 성장이 아닌 방향 같다는 생각이)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폐쇄적인 나에게도 그런 변화가 있다는 걸 포착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2023.04.03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토마시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했고 같은 식으로 애무했으며 테레자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정말 추호의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 보낸 셈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03,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거듭 말하지만 소련군의 침공이 비극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도 그 이상한 도취감을 이해하지 못할 증오의 축제이기도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21,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그녀는 자기가 약한 사람들의 편, 약한 사람들의 진영, 약한 사람들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녀는 그들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약했기 때문이고 연설 중에 연신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거야?" "당신이 늙기를 바라.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나약해지길 바라. 당신도 나처럼 나약하길 바라."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30,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오류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 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 불가능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33,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조금 전만 해도 그녀가 쓴 중산모자는 농담의 효과를 보였다. 희극적인 것과 자극적인 것의 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일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4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52,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아버지가 화병의 장미를 그리고 피카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토록 잘못된 일이었을까? 열네 살짜리 자기 딸이 임신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그토록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을까? 그녀는 다시 배신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자기 자신의 배신을 배신하기. ... 그러나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이 배신이 A와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57,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그녀가 아버지를 배신했을 때, 삶은 길고 긴 배반의 길처럼 그녀 앞에 활짝 열렸고, 매번 새로운 배반은 마치 악덕처럼, 승리처럼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는 대열 속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고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65,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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