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 놓고 안 읽은 책 독파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D-29
배우란 어렸을 적부터 익명의 군중에게 자기 모습이 노출되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천부적 재능과는 아무 상관 없는, 그렇지만 재능보다 훨씬 심오한 그 무엇인 이 근본적 동의가 없다면 누구도 배우가 될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13,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신은 자신이 발명해서 조심스레 피부로 감싸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은폐하고 봉합한 체제 내부에 인간이 감히 손을 집어넣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토마시는 처음으로 마취 상태에서 축 늘어진 환자의 피부에 메스를 대고 확고한 힘을 가해 그 피부를 찢고 다시 정확한 솜씨로 봉합하면서 아주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신성모독을 느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1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물론 의학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비롯된 "es muss sein!"은 내면적 필연성이었던 반면, 그때 그것은 사회적 관습이 개입한 외부적 "es muss sein!"과 관련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결 어려웠다. 내면의 명령은 더욱 강렬하고 그래서 더욱 강하게 반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17,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외과의사는 사물의 표면을 열고 그 안에 숨은 것을 들여다본다. 토마시에게 "es muss sein!"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도 이런 욕망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17,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그렇다. 그는 망설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하기가 꺼려졌다. 눈앞 벽면에는 "아지곧 붉은 군대에 입대하는 것을 망설이는가?" 혹은 "아직도 2000자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당신도 2000자 선언에 서명했는가?" 혹은 "사면을 위한 탄원서에 서명하기 싫은가?"라며 손가락질로 위협하는 군인의 포스터가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건 그 군인은 협박을 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4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것보다 생매장당한 까마귀를 꺼내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요." ... 그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53,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55,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나도 직접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다. 그러나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을 모두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55,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5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58,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392,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현실의 공산주의 세계에서 사는 것은 가능했다. 공산주의 이상이 실현된 세계, 그녀가 단 한 마디도 건넬 수 없는, 멍청한 미소만 짓는 세계에서는 아마 일주일 만에 혐오감으로 죽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0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공산주의가 현대 예술을 박해하는 것이 사실 아닌가요? 그녀는 격분해서 대답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15,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하나의 사건도 빠뜨리지 않고 리듬을 맞추기 위해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고, 그래서 대장정은 빠른 발걸음으로 행진하는 바쁜 사람들의 행렬이 되었다. 마침내 무대는 더욱더 좁아져 어느 날 면적 없는 한 점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캄보디아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품에 노란 아기를 안은 미국 여배우의 커다란 사진 한 장. 토마시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 베토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우울한 목소리로 "Es muss sein!"이라고 말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에 침울한 표정을 한 남자. 프란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오랜 방황 끝의 귀환. 그리고 그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55,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65,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71,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나는 왜 소설을 읽고 감상문을 남기는 일이 꺼려질까. 소설을 읽고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감상들을 정확한 문장으로 붙잡아 두는 게 앞으로 또 다른 소설을 읽거나 글을 쓸 때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그런 행위가 이상하게 정 없게 느껴진다. 정 붙인 소설에는 특히 그럴 수가 없다. 올해 끝에도 같은 생각인지 두고볼 것.
안녕하세요^^ 저도 이 책 드디어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동기가 너무나 저랑 똑같으세요^^ 사 놓고 안 읽은 책 독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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