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 챌린지] 3.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D-29
[p. 251] 진짜 선택된 마음속 친구는 다 남자들이라고. 흥미롭네요. 남자는 여자와 잘 수 있을지만을 상상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반면 여자도 만나는 남자를 모두 남편감으로 바라본다고. 양 성에 정말 솔직하게 적으시는 크리스티 여사님.
[p. 256] 드디어 처음 글 쓰는 과정. 어머님이 권하시다니 다시 의외. 어렸을 때 문자 읽히면 오염된다고 글 읽지 못하게 하신 분 아니었나요 ㅋㅋㅋㅋ 매지 언니도 이미 글쓴이 기질이 잇었네요. 이미 필명도 따로 있었고. 그리고보면 글 재주도 유전은 아닌가 싶기도. 카이로 무도회 기억이 많아서 카이로 군인 관련해서 소재가 많이 나오네요. 아 이제 왜 추리소설 카이로가 배경인지 알 수 있을 듯. 이든 폴프츠라는 당대 글쟁이와의 네트워크도 있었네요.
[p. 263] 바그너 오페라 보고 뿅 가는 장면. 나는 매일 밤 이졸데를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 아 나는 개인적으로 바그너 별로 안 좋아하는데 ㅋ
495쪽, [또한 낙담시켜서는 안 될 누군가를 낙담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나는 초기 단편 하나를 친절한 친구의 도움으로 유명 여류 작가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슬프게도 그분은 내가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으리라고 단언했다.] 사람의 잠재력을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교훈. 우리 입시제도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봅니다.
516~517쪽에 묘사되는 시기가 그 유명한 행방불명과 기억상실 사건이 있었던 때인가 봐요. 뭐, 앞뒤 상황을 알고 나니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던 중에 그런 사건이 해프닝처럼 일어날 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하네요.
529쪽, [내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변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쓰고 싶지 않고,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마음에 안 들고, 잘 써지지 않음에도 계속 글을 써야 하는 전문 작가의 무거운 짐을 그때 짊어졌던 것이다.] 프로 작가의 정의. 그렇군요.
566쪽, [“내가 좀 부도덕한 삶을 산 건 사실이야. 전 세계에서 온갖 사람들에게 빚을 졌지. 많은 나라에서 법을 어겼고. (…) 하지만 애거서,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단다. 기가 막히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최고가 아니면 결코 만족하지 않았지.”] 한량이고, 약간은 풍운아이고, 약간은 파락호인 오빠 몬티의 인생관을 접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요. 재미있는 인생이란 무엇일까, 너무 도덕적인 삶은 재미가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일탈과 부도덕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는 걸까.
책 앞부분은 마치 동화책 속 이야기 같네요. 매일매일 파티를 즐기고 집에는 당연하다는 듯 하녀가 있어서 음식을 해 주고 테니스와 골프와 승마를 즐기고. 정말 영국 귀족의 삶이 이런 걸까 싶은데, 사실 집이 부자는 아니었고 평범한 가정이었다고 덧붙이네요. 제가 여사님의 젊은 시절같이 시간을 보내려면 지금보다 네 배쯤 벌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하인과 유모가 아주 당연시되던 시기였나 봐요. 사실 한국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식모가 아주 흔했거든요. 중산층뿐 아니라 서민층에도 있었으니... 당시 지어지던 아파트에는 당연하게 식모 방이 있을 정도였고, 심지어 판잣집에서 식도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968년에는 식모에게 주는 한 달 급여가 한 달 담뱃값이랑 같았다고 하네요. ㅠ.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401925 그러고 보면 육아와 가사는 예나 지금이나 한두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중노동인 거 같아요.
결혼 이후의 묘사를 보면 남편은 군인으로 일하고 자신은 간호사로 일하는 중산층 맞벌이 정도의 수입으로 두 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하는 모습도 나타나서, 인건비가 그리 비싸지 않은 시대였던 게 아닌가 생각도 들더라구요. 과연 그 시대의 평민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해지네요. 한편으로는 여사님이 전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이 좋은 시절의 여러 에피소드 정도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마음 불편하기도 합니다. 인권이나 평등에 대한 의식 역시 불과 몇십 년 전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인 걸까요.
식모나 하인은 노예와는 좀 다른 개념 같아요. 그래서 그 직업의 존재나 고용 경험을 문제의식 없이 말하는 걸 비판하려니 그 또한 주저됩니다. 미래 로봇 시대의 시민들에게는 21세기 초반의 환경미화원이나 음식 배달기사, 출장 가사도우미, 연예인 매니저, 비서 같은 직업도 기이하게 느껴질 것 같고요. (2022년현재 저는 그 직업들에 별반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는 않는데 말이지요.) 과거의 소작농 같은 신분이나 집사 같은 직업은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와 별개로 한 평생을 돌아보는 이야기에서 자신이 속했던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대한 언급이 이토록 희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습니다. 크리스티 여사님(1890~1976)은 제가 좋아하는 조지 오웰(1903~1950)이 살았던 시기 내내 같은 나라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출신 계급의 문제일까요? 그보다 더 깊은 가치관의 문제일까요.
오오 이 글을 읽고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어릴 때 친한 동네 친구가 사는 아파트에 자주 놀러 갔는데, 부엌 근처에 정말 작은 사이즈의 방이 하나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나네요. 검색해 보니 1990년에 지어진 아파트인데 정말 최근까지도 식모를 두는 문화가 있었나 봐요.
크리스티 여사님은 본업인 추리소설 작가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 성악, 춤, 골프, 고고학자, 약 조제사와 간호사로도 일한 경험이 있으시네요. 심지어 본인은 불만족하시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작곡한 곡들이 높은 평가를 받고 인기 악단이 레퍼토리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취미 부자가 아닌 직업 부자(!) 라 불릴 만한데요. 여사님의 예술적 소양이 워낙 뛰어나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인정받는 창작품에 대한 기준이나,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한 전문 지식의 기준이 현대에 비해 훨씬 낮은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 같기도 합니다.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써 저렇게 다양한 범주의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부럽네요.
저는 어릴 때 책에 종종 나오는 ‘박물학자’가 무슨 직업인지, 무슨 학자인지 알 수 없어 꽤 오랜 기간 궁금해 했더랬어요. 지금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 직업이자 학문인데... 과학 전 분야가 그 시절에는 신사 계급의 취미였다 생각하니 참 신기합니다. 전인(全人)으로 살기에는 분명 과거가 지금보다 나았다 싶기도 하고, 그런 기회를 얻는 사람이 전 인구의 0.1퍼센트도 안 됐을 거라는 점을 의식하면 현대가 가장 행복한 시기 같기도 하네요. ^^
'사교계' 라는 곳은 루이 16세 시대에나 있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드라마 브리저튼 보셨나요?!)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은 물론이고 딸인 로잘린드까지 사교계에 데뷔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네요. 비교적 최근까지 있었던 문화라는 것에 한번 놀라고, 모두가 잠재적으로 결혼할 이성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사교계 분위기에는 웃음짓게 되네요. 사교계란 마치 좀더 점잖고 좀더 다양한 액티비티를 하는 결혼정보업체 같은 거였나 봐요.
저도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상상이 잘 안 되는 풍습 중 하나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 제사를 상상할 때 이런 기분일까요. 그런데 CSI 라스베가스인지 CSI 뉴욕인지에 잘 기억은 안 나는데, 현대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사교계 데뷔를 엄청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그게 범죄 동기랑 얽혀 있던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고풍스러운 사교계가 요즘도 있기는 있는 건지, 드라마에서 과장한 건지는 전혀 모릅니다. 브리저튼은 못 봤는데, 음... 저는 부끄러워서 못 보게 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 아이 부끄러워...
605~606쪽, [글쓰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특정 작가를 열렬히 존경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작가의 스타일을 저절로 모방하게 되는 일이 생기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스타일이라 형편없는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더 감동의 힘은 약해져 간다. 여전히 특정 작가를 존경하고, 심지어 그 사람처럼 쓰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나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고는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의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열심히 하루키를 흉내 낸 글을 썼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표절까지는 아니지만 모방작들은 당시 꽤 나왔습니다.
당시는 재혼이나 연상연하 커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현대보다 좀더 관대했던 걸까요? 서술되는 시점이 과거의 일이니 재혼에 대해서도 당연히 더 보수적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책에서 언급되는 여러 사람들이 별 망설임 없이 자식이 있는 사람들과도 재혼하는 모습이 나타나서 신기합니다. 아니면 한국인의 가치관이 너무 보수적인 나머지, 100년도 더 전의 영국인보다 더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대중 소설로 성공하는 작가는 대중과 비슷한 도덕관과 가치관, 그리고 대중보다 더 고상한 취향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에서 드러나는 여사님의 가치관(결혼과 가정에 대한 생각이나, 유럽인으로서의 우월감) 을 보면 굉장히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면이 있어 보이는데, 다양한 직업과 취미 생활을 보면 너무나 진취적이고 흥미로운 사람으로 생각되어서 대체 이 사람은 뭘까 싶었는데요. 이런 사람이었기에 대중이 열광하는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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