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

D-29
산문집 『전원에서 머문 날들』에 이어서 소설 『토성의 고리』를 읽습니다. ※ 『토성의 고리』는 총 10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2-3일에 걸쳐서 1장씩, 총 29일간 읽어보려고 합니다. ※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안 읽고 얘기하셔도 좋고 아는 척하셔도 좋고 생판 딴 얘기하셔도 좋습니다. ⏤참여 인원과 관계없이 23/4/25에 시작하겠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람들이 더러 극단적이라고 평가할 만큼의 철저한 검소함이었다." p.13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그런 여행에서 돌아온 그를 볼 때나 자신의 작업을 대하는 그의 변함없는 진지함에 감탄할 때, 내게는 그가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겸손함 속에서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은 사람처럼 보였다." p.14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나는 그가 밤의 어둠과 불가해함 속에서(in the dark and deep part of the night)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혼자서 생각했다. p.14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모임 시작] 안녕하세요? 이 모임은 4월 25일 화요일부터 5월 23일 일요일까지 총 29일간 진행되는 모임입니다. 29일에 걸쳐서 『토성의 고리』를 읽습니다. 구판과 신판의 쪽수가 조금 다른데요, 어느 판본이든 괜찮습니다. 제가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각 장별로 일정은 나눠놓겠습니다. 다만 일정에 구애받지 마시고 자유롭게 읽으세요. 일정은 안팎을 구분하는 느슨한 경계로서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낮고 허술한 목책이며, 높고 견고한 벽이 아닙니다.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신청하신 모임인 만큼 이 책이 끝날 즈음에는 각자 무언가를 얻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정 1장 : 4/25-27 (3일) 2장 : 4/28-30 (3일) 3장 : 5/1-3 (3일) 4장 : 5/4-5 (2일) 5장 : 5/6-7 (2일) ⏤*5/8일은 쉬세요. 6장 : 5/9-11 (3일) 7장 : 5/12-14 (3일) 8장 : 5/15-17 (3일) 9장 : 5/ 18-20 (3일) 10장: 5/21-23 (3일)
화제로 지정된 대화
[#1장~] 책의 도입부에 나오는 제사는, 제발트처럼 자기 의도를 선명히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세 개의 제사는 앞으로 펼쳐질 내용 전체를 느슨하게 아우르는 몇 안 되는 표지입니다. 그 중에서 저는 '토성의 고리'에 대한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의 정의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추측컨대 주행성인 토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 행성의 기조력 때문에 파괴되었고, 이후 위성의 크고 작은 잔해들이 토성의 주위를 돌면서 무리를 형성한 것이 오늘날 '토성의 고리'라는 내용을 답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걸맞게, 『토성의 고리』에서 제발트 본인으로 추측되는 '나'는 파괴 이후의 잔해처럼 끊임없이 무언가의 주위를 배회합니다. 정말 '잔해'라는 표현이 꼭 어울릴 정도로 1장에서는 정말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주제가 나오는데, 한 인물과 인물, 주제와 주제 사이에는 특별한 인과성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것의 파편인듯 느슨한 무리를 형성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한 인물(한 주제)는 다른 인물로 미끄러지는 계기로서 작용하며, 한번 다뤘던 인물은 여간해선 다시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물과 인물, 주제와 주제 사이를 "무중력상태"로 부유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양한 인물이 나옵니다. 프란츠 카프카나 귀스따브 플로베르나 보르헤스 같은 소설가 뿐 아니라 렘브란트가 데카르트 같은 화가와 철학자, 그리고 마이클 파킨슨이나 재닌 로절린드 데이킨스 같은 '나'의 사적인 지인도 심심찮게 등장하며, 심지어 허구의 인물인 엠마도 등장합니다. '나'는 인물과 주제 사이를 말 그대로 종횡무진 전개합니다. 하지만 전혀 구심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요, 1장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토머스 브라운' 경일 것입니다. 한편, 1장에서 '나'는 노퍽 지방의 노리치 병원에서 모종의 수술을 진행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회복을 위해 병실에서 머무르는 동안 글을 구상했노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나'는 자신의 병상 생활에서 17세기 노리치 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료인이자 종교가 토머스 브라운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17세기의 어느 날 토머스 브라운이 참관했던 어느 해부학 현장과 자신이 병상에서 누워 보냈던 나날을 연결시키면서, 자연히 한 그림으로 주제를 옮겨갑니다. 그것은 절도죄로 교수형을 당한 한 죄수의 해부 현장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렘브란트의 작품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중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1장 시작하겠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데까르뜨는 정복의 역사 주요한 한 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육신에 주목하기를 그만두고 우리 안에 이미 설치된 기계를 향해,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고 철저히 노동을 위해 활용하며 고장이 나면 수리하거나 폐기해버릴 수 있는 기계를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전시해놓은 몸이 시선에서 배제되는 기이한 현상은, 현실에 충실하다고 칭송받는 렘브란트의 그림이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토성의 고리 24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1장] 이어서 얘기를 해보자면, 작중 '나'는 끊임없이 토머스 브라운의 인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나'는 아리스 킨트의 해부 실험을 참관했던 토머스 브라운이 정확히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지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후일 브라운이 남긴 다른 메모로 말미암아 추측건대, 그가 해부 현장에서 모종의 현기증을 느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브라운이 경험했을 현기증과 '나'의 경험, 다시 말해 "병원 구층의 병실에 누워 있을 때 (···) 진통제의 신기한 효과 덕분에 마치 무중력상태로 주변의 부풀어오르는 구름산맥 사이를 떠가는 기구 여행자가 된 느낌"을 연결짓습니다. 토머스 브라운이 그날의 해부 실험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다행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1장 마치겠습니다.
끝없이 먹고 먹히는 이런 과정과 마찬가지로 토머스 브라운은 어떤 것도 영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새롭게 생겨나는 형태에는 이미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전세계의 역사는 갈수록 확장되면서 멋지게 비상하는 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오선에 도달한 뒤 암흑으로 하강하는 궤도를 따른다. 모호함 속으로 사라짐을 파고든 브라운의 학문은 종말의 날에 모든 변혁이 완성되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배우들이 다시 한번 무대에 나타나서 이 위대한 극작품의 파국을 완성하고 완결한다는(to complete and make up the catastrophe of this great piece)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토성의 고리 34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2장~] 2장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영국의 써퍽 주(州)를 걸으며, 보고 듣고 경험하고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장에서는 써머레이턴 저택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써머레이턴 저택은 중세 중기부터 수백 년에 걸쳐서 갖은 가문이 거쳐간 곳으로서, 과거에는 귀족적인 영광을 휘광처럼 두르고 있던 공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남루해진 귀족들의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거대한 창고로 전락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에 대한 쓸쓸한 소회는 본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저택으로 향하는 길에서 보았던 무성한 덤불과 빽빽한 잡목 숲에 대한 묘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 부분을 함께 읽어보면서 2장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나처럼 기차 정거장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영지 전체의 절반을 돌아서 오지 않으려면 덤불 사이에 숨어 지내는 범법자처럼 담을 넘고 빽빽한 잡목 숲을 헤치고 나가야 비로소 공원에 도착할 수 있다. 그렇게 나무들 사이를 뚫고 나가보니, 서커스의 변장한 개나 바다표범을 연상시키는 다수의 웅크린 사람들을 태운 모형기차가 증기를 뿜으며 내 눈앞에서 풀밭을 달리고 있었는데, 이를 보는 순간 나는 때때로 과거의 단계들을 약간의 자기아이러니를 섞어가며 반복하곤 하는 계통발생사의 기이한 사례를 목격하는 느낌이었다.
토성의 고리 43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2장] 오늘에 와서 관광객이 써머레이턴 영지에서 보게 될 광경은, 언젠가 '나'가 보았던 전당포나 중고매장을 방불케 했다고, 건조한 투로 쓰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된 영광과 자연의 번성은 서로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다는 듯이 써머레이턴의 영애롭던 시절이 지나간 자리에는 녹지만 무성합니다. '나'는 오늘날 써머레이턴 저택을 관리하는 정원사를 만나고, 그가 공교롭게도 과거 한때 독일 전역에 가해진 연합군의 광범위한 공중폭격을 목격한 목격자였음을 전해듣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진보라고 신봉하고 믿었던 것들이 기실 맹목적인 팽창에 불과했으며, 거기에 필연적으 파괴의 참상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한편, 독일 전역에 가해진 공중전에 대한 내용은 앞서 다뤘던 ⟪공중전과 문학에서 잘 드러납니다⟫). 써머레이턴을 지나서 당도한 로스토프트의 풍경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로스토프트는 1930년대 경제공황과 불황 이후로 쇠퇴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는데, 1975년 즈음에는 북해의 석유 시추시설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반전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들끓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고, 이후 도시 전역이 투기 광풍에 휩싸이면서 도시는 끝도없이 빈궁해집니다. 한때 현실 자본주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도시가 이제는 완전히 정지한 채 황폐화된, 그 황량한 풍광을 제발트는 쓸쓸하게 묘사합니다. "바깥에는 빛과 어둠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해변이 뻗어 있었는데, 허공에서도 땅에서도, 물 위에서도 어떠한 미동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만(彎) 안에서 눈처럼 하얗게 부풀어오르는 파도조차도 정지해 있는 것 같았다." 풍선이 한없이 부풀어오르다가, 어느 지점을 지나서 표면이 장력을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면 한순간 고무조각으로 쪼그라드는 것처럼, 극도의 팽창은 어느 지점에 이르면 급속도로 자신을 쇠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프레더릭 패라가 '나'에게 휘황했던 과거의 도시를 묘사하는 장면은 몽롱한 표정으로 과거의 향수에 젖어사는 왕가의 기억처럼 읽힙니다. 2장 마칩니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도시, 푸른 나무들과 덤불로 에워싸인, 해변까지 이어지는 별장들, 여름의 빛, 소풍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거쳤던 바닷가, 다른 남자 한둘과 함께 바지를 걷고 앞서 걸어가는 아버지, 파라솔을 들고 혼자 걸어가는 어머니, 주름진 치마를 입은 누이들, 그리고 그 뒤에서 작은 당나귀를 끌고가는 하인들, 당나귀 등에 매달린 운반용 바구니 사이에 앉아 있던 나, 그 모든 것들 말입니다. 프레더릭 패라는 또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 몇년 전 언젠가는 꿈에서 이런 장면을 보기도 했는데, 우리 가족은 마치 덴하흐 연안으로 유배된 제임스 2세의 작은 왕가 같았습니다.
토성의 고리 64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3장~] 3장에 이르러서 '나'는 로스토프트 남쪽의 황량한 해안가를 걷습니다. 그러면서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자신이 과거에 보고 듣고 읽은 내용들을 담담히 엮어내려갑니다. 과거 한때 바다는 명백히 생명의 보고로서 다양한 수생식물과 어종이 살았지만, 이제는 어획량 자체가 줄고 있으며 이는 로스토프트 남쪽의 해안도 다르지 않습니다. 50년대 학교에 다닐 시절, '나'는 구 시각자료도서관에서 보았던 단편영화 속 한 장면을 회상합니다. 떨리는 검은 선이 어른거리던 그 영화에서는 검은 방수복을 입은 남자들이 노획한 청어를 내려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갑판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방대한 숫자의 청어를 쌓는 장면은 일견 상징적인데, 자연의 불가사의한 과잉 공급을 보여주는 사례임과 동시에 인간이 자연의 한 조각을 남획하고 또 온갖 방식으로 착취하는 사례라고 할 만합니다. 하나 감상 포인트는, 제발트가 노골적으로 두 개의 사진 자료를 별다른 설명도 없이 시간차를 두고 제시하는 부분입니다. 그로써 인간이 자연을 착취한 일부 사례에서 특수한 역사적 비극의 전조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청어잡이에 관한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3장 시작하겠습니다.
루앙의 생선시장 감독관이던 노엘 드 마리니에르도 어느날 두세시간이나 마른 땅 위에 있었음에도 꿈틀거리는 청어들을 보고, 이 물고기의 생존능력을 정확하게 살펴볼 생각으로 지느러미를 잘라내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절단한 일이 있었다. 우리의 지식욕에서 비롯된 이런 행동은 지속적으로 대재앙의 위협에 노출된 이 어종이 겪어야 했던 수난사의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 백년 뒤, 매년 청어 어획량은 육백억마리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런 막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자연사학자들은 인간이 생명의 순환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파괴의 작은 일부에만 책임이 있으며, 독특한 생리학적 조직 덕택에 청어는 고등동물이 죽을 때 느끼는 몸과 영혼의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았다.
토성의 고리 72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3장] 인용구에 이어서 말하자면, 역사 속에서 자행된 숱한 학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스스로 행위가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게끔 하는 심리적인 우회로를 만드는 데 귀재입니다. 그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너무 흔합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대를 상종도 못할 악마로 규정한 다음에, 그런 악마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옳다는 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구체적인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런 행위 기저에는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종(種)으로 보지 않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나'가 코브히스 마을의 어느 전기철조망 안에서 한 무리의 돼지들을 보고 느낀 소회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는 마을의 미친 남자에게 예수가 기적을 행한 마태복음 4장을 떠올립니다. 내용인즉, 예수가 미친 사람에게 들려 있던 귀신들을 불러내서 풀밭에 있는 돼지 무리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이후에 이천마리가 넘는 돼지들이 비탈에서 굴러떨어져서 물속에 빠져죽었다 내용인데요, 통상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우화에서 예수가 행한 기적을 읽어내거나 오늘날 돼지가 불결함의 상징이 된 근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우화는 우리가 우리의 병든 정신을 항상 우리보다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든지 파괴해도 좋다고 여기는 종에게 거듭하여 떠넘긴다는 뜻이 아닌가?" 살펴보면 '나' 지속적으로 포착하는 역사의 비극과 참상은 더 이상 되돌아갈 곳이 없는 까마득한 절벽 속으로 투신하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비극 이전으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기에는 폐허에서 희망이 태어난다는 식의 안이한 낭만주의가 없고, 위기야말로 희망이 깃드는 곳이라고 하는 한탕주의 도박 같은 아이러니도 없습니다. 어떤 비극은 비극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죽음은 완전한 소멸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비정함마저 느껴집니다. 물론 이런 것들에서도 의미를 뽑아올릴 수 있는 여지는 남아있지만요. 여담으로 하나 더 언급하면, 3장의 마지막은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에 수록된 ⟨틀뢴, 우르바크,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의 마지막과 완벽히 겹쳐집니다.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라는 문장이 하나 더 있다는 점과 "내 시골 별장의 고요한 여유 속에서" 부분을 제외하고는 완벽히 동일한데, 제발트 특유의 위트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보르헤스의 단편도 정말정말 흥미롭고 3장과 연결지어서 얘기할 대목이 많긴 하지만,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보고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3장 마치겠습니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픽션들<픽션들>은 2백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상상은 심심풀이 환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의 미궁에 대한 깊은 통찰과 독창적인 사유로 이루어진 상상이다. <픽션들>은 20세기 문학에서 돋보이는 큰 별이다.
모든 언어가, 심지어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영어조차도 우리 행성에서 사라질 것이다. 세계는 뜰뢴이 될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에 개의치 않고 내 시골 별장의 고요한 여유 속에서 토머스 브라운의 ⟪유골단지⟫를 께베도풍으로 조심스럽게 번역하는 데 골몰할 것이다(그러나 이 번역을 출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토성의 고리 89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4장~] 4장은 유독 이동이 많고 다루는 소재도 많습니다. 『토성의 고리』 전체가 '나'가 끊임없이 장소를 이동하면서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 읽은 것, 만난 사람들을 다루고 있긴합니다만 4장은 유독 더 그런 인상이긴 합니다. 4장 초반부에서 '나'는 그리니치 해양박물관에 들르는데요, 그곳에서 쏠 베이 전투를 소재로 그린 그림 몇점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그 그림들이 사실주의적인 의도로 그려지기는 했으나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감지합니다. 비극은 극적으로 재현될 수 있겠지만, 그러한 극적인 효과는 실제 비극 이면에 놓여 있는 놀라울 정도로 덧없는 노력과 파괴의 전모를 드러낼 순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전체적인 파괴의 규모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몇 배는 되었고, 어차피 대부분 파괴될 운명을 가진 배들을 건조하고 무장하기 위해 나무를 벌목하여 가공하고, 광석을 채굴하여 제련하고, 쇠를 단조하고, 돛을 짜고 바느질하는 등 얼마나 엄청난 노동이 필요했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비유컨대 비극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비극을 몸소 눈앞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은 도널드덕과 청둥오리만큼이나 다른 일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나'는 지속적으로 그림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하게 되며,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도 이러한 경험은 계속됩니다. '나'는 끊임없이 재현한 것과 재현된 것 사이의 불일치를 경험합니다. 재현한 것은 가변하는 현실로서 고정불변하지 않은 반면에, 재현물에는 당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어떤 극적인 효과가 부여되며 고정불변합니다. '나'가 느끼는 모종의 불일치는 이러한 차이에서 연원합니다. 따라서 '나'는 프랑스 철학자인 디드로가 스헤베닝언 해변으로 가는 산책로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했던 말을 떠올려보지만, 과거에 디드로가 걸었던 스헤베닝언은 오늘날과 너무 달라져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나'의 감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을 읽어보면서 4장 시작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나의 수호성인은 다키아 혹은 덴마크 출신의 왕자였는데, 빠리에서 프랑스 여왕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식 날 밤, 그는 지극한 무상의 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봐, 오늘은 우리 몸이 이렇게 꾸며져 있지만, 내일이면 벌레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지.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벌써 도망길에 오른 그는 남쪽 이딸리아로 순례를 떠나 거기서 은둔자의 삶을 살다가 이윽고 자신 안에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겼음을 느꼈다.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확실하게 굶어죽었을 영국의 왕자 위니볼드와 우니볼드를 천상의 사자가 가져다준, 재로 빚은 빵으로 구해내고, 비첸짜에서 고명한 설교를 한 뒤에 알프스를 넘어 독일로 왔다. 레겐스부르크 근처에서 그는 외투를 타고 도나우강을 건넜고, 그 도시에서 깨진 유리를 원상복구했으며, 나무가 부족해 애를 태우는 달구지 목수의 화덕에 고드름으로 불을 피웠다. 얼어 있는 생명물질을 태웠다는 이 이야기는 내게 줄곧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내면의 결빙과 황폐화란 결국 일종의 사기에 가까운 쇼를 통해 자신의 가련한 심장이 여전히 불타고 있다고 세상이 믿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었던가 하고 나는 자주 자문하곤 했다.
토성의 고리 106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4장]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재현하는 사람의 능력과 별개로 인간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한계는 명확합니다. 그리고 때론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자 했던 중요한 사실들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서 왕왕 일어납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닌데,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노리치를 오가는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문득 창밖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나는 이런 고도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면 우리가 목적과 결말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가 끔찍하리만큼 분명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인식에 비춰서 4장의 남은 부분도 계속해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편집부가 출판했던 1차세계대전의 화보집이 전쟁의 참상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음을 떠올립니다. 기사나 사진 따위의 재현물은 그것을 무기력한 풍자로써 전달하거나 아이러니의 수법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이는 4장의 말미에 등장하는, 쿠르트 발트하임과 관련한 일화에서도 그러합니다. 쿠르트 발트하임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두 번의 임기동안 UN사무총장을 지낸 인물로서 후에 오스트리아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훗날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제적으로 지탄을 받았고,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사실상 정치적으로 생명을 마감했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도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그가 UN사무총장을 지낼 시절에, 우주탐사선 보이저2호를 발사하면서 우주에 있을지 모를 외계인에게 인사말을 녹음한 자기 음성을 태워보냈다는 사실은 무척 아이러니합니다. 한번 떠나간 보이저2호를 다시 지구로 되돌릴 길은 요원합니다. 결과적으로 지금도 보이저2호는 잔인한 나치부역자의 음성을 인류의 평화를 대변하는 목소리로 둔갑시킨 채 태양계 바깥지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치의 목소리가 평화를 염원하는 인류의 목소리로 둔갑한 채 아득한 우주 너머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근원적인 재현 불가능성과 그것을 표현하는 한 형식으로서 아이러니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4장 마칩니다.
코자라의 여성 주민들은 독일로 수송되어 제국전역에 퍼져 있던 강제노동소에서 대부분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의용군은 조국에 남게 된 아이들 이만삼천명의 절반을 현장에서 살해했고, 나머지 절반은 크로아티아의 여러 집결소로 강제 이송했는데, 이들 가운데서도 적지 않은 숫자가 가축용 화물차량이 크로아티아의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티푸스와 탈진, 두려움으로 숨졌다. 목숨이 붙어 있던 아이들 중 많은 아이는 배가 고픈 나머지 목에 걸고 있던, 개인정보가 적힌 마분지 판을 씹어 먹었으니, 결국 극도의 절망 속에서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토성의 고리 120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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