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발트 읽기] 『토성의 고리』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9장] '나'는 쎼인트마거릿 교회에 들릅니다. 그리고 18세기 말 샤토브리앙이 혁명을 피해서 영국으로 도망왔고, 그곳에서 아이브스라는 목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그의 딸 샬럿 아이브스와 교류하게 된 일화를 떠올립니다. 그곳에서 샤토브리앙은 샬럿과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당시 그는 기혼자로서 자신을 차마 속일 순 없었기에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그녀를 떠나게 됩니다. 후일 시간이 흘러서 샤토브리앙은 쎄인트마거릿을 회상하며 글을 남기는데, 자신이 지금처럼 정치가이자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당시 샬럿과 결혼해서 살림을 차리고 소박한 행복을 추구했더라면 어땠을까 자문합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에는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의 회한과 아쉬움이 묻어 있습니다. 이 결핍이 글을 글이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는 것은 글쓰기에 뒤따르는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글로 남길 수 있게 되지만, 결과로서 남은 글과 애당초 불행 없는 삶 중에서 무엇이 더 나았으리라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보르헤스의 한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릅니다. 나쁜 일들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글로 변하리라는 것을 보르헤스 자신은 알았다고요. 또 행복은 그 자체로 누리면 되기 때문에 무언가로 변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행복하거나 불행할 테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경험은 하나의 소실점을 이루며 그곳에서 동등하게 견딜만한 것이 되리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제발트의 인식은 이보다 더 멜랑콜리하긴 합니다. 삶에서 대부분의 순간들은 행복보다는 불행한 일이 더 많으므로 "하나의 불행에서 다음 불행으로 비틀거리며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형식을 띠게 될 텐데, 기억 작업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연대기의 기록자는 "자신을 파괴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기 몸에 새겨넣는" 행위를 거듭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불행 앞에서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샤토브리앙에게는 그 수단이 글쓰기였을 테고요. 어느 강연에선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행복이 필요할 뿐이라고요. 이 말이 묘한 위로를 주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드문드문 찾아올 행복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닥치는 불행을 시간의 먼 소실점 너머로 유예시키는 의연함일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이는 단순히 실패를 딛고 성장하는 성장 문법과는 다릅니다. 저는 글쓰기를 통해서 얻는 보상은 글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오늘은 조금 일반론적인 얘기를 해봤습니다. 제가 읽은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9장 마무리합니다.
마지막으로 굴착기가 땅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더니, 더러 거의 건초더미만 한 나무뿌리들을 그 안에 밀어넣고 묻었다. 그리하여 말 그대로 아래위가 바뀌었다. 그 전해에는 양치류와 이끼 사이에서 눈풀꽃과 제비꽃, 아네모네가 자라나던 숲의 흙바닥이 이제는 무거운 점토층으로 뒤덮였다. 오래지 않아 완전히 끈적끈적해진 땅 위에서는 씨앗이 얼마나 오래 땅속 깊이 묻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늪풀만이 다발을 이루며 자라났다. 이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게 된 햇살은 정원의 음지식물들을 순식간에 파괴했고, 날이 갈수록 나는 스텝지대의 가장자리에 사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하루가 시작될 때면 때로 침실의 창문을 닫아야 할 만큼 무수한 새들이 요란하게 노래하던 곳, 오전이면 종달새들이 들판 위로 솟구쳐오르고 저녁 무렵이면 때로 울창한 숲에서 나이팅게일이 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던 바로 그곳에서 나는 이제 생명의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토성의 고리 313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10장~] 어느덧 마지막 장입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 '나'는 1장에서 얘기했던 토머스 브라운 경을 다시 언급함으로써 이 책 전체가 닫힌 원환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나'는 토머스 브라운 경이 남긴 다양한 글 묶음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으로 '누에'를 언급합니다. 나아가, 중국에서 시작하여 폐쇄적으로 번성하던 양잠업이 시리아의 상인들을 거쳐서 유럽으로 건너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영국을 지나, 독일에까지 흘러들어가서 국책 사업이 되었는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책 전체에서 '누에'의 이미지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나'는 '누에'를 어떤 상징물로서 보기보다는 20세기의 역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맞닥뜨린 어떤 비극적 '종'의 사례로 본 듯합니다. 누에를 단순히 상징으로 보게되면, 20세기 유럽의 양잠업의 역사를 등한시하게 될 뿐 아니라 소위 열강들이 한 '종'을 타자화하고 도구화하는 방식으로 종내에는 자기 자신들조차 타자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면밀히 살피지 못하게 됩니다. '나'에게 누에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이야기임과 동시에 여러 논의로 뻗어나갈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게 됩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장 시작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조명의 증가와 노동의 증가, 이 두가지는 평행선을 그리며 나타난다. 우리의 시선이 도시와 근교 위에 걸린 창백한 반사광을 더이상 관통하지 못하는 지금 18세기를 떠올려보면, 산업화 이전에 이미 적어도 특정 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련한 몸이 나무 틀과 살로 조립해놓은, 추가 매달리고 고문장치나 가축우리를 연상시키는 베틀에 평생 꽁꽁 묶여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이 기이한 공생은 아마도 비교적 원시적인 그 형태 덕분에, 우리가 오직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기계에 묶여 있어야만 지상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후에 등장한 어떤 다른 공업형태들보다 더 분명히 보여준다.
토성의 고리 330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10장] 마지막은 책 전체에 대해서 가볍게 얘기하겠습니다. (바깥이라서 지금 책이 없기도 합니다.) 책은 축적과 팽창을 위시한 진보의 역사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며 그 극점에 달하면 급속도로 반전되면서 수축한 역사의 사례집이라고 할 만합니다. 언젠가 다뤘던 『공중전과 문학』에서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요한묵시록의 네 기사〉에 나오는 '진보의 천사'에 관한 벤야민의 묘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파편에 파편을 쉼 없이 쌓아올리며 그 파편을 자기 발 앞에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산산이 부서진 것을 한데 모아 맞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닥치더니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불어대서,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그의 앞에는 잔해더미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폭풍이다." ⏤공중전과 문학, 95쪽. 우리는 '진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자 거스를 수 없는 것이며, 인류의 진보를 멈추려거나 늦추려는 시도는 모두 무용하다는 식의 주장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진보'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나'의 역사적 시선을 경유해서 보여줌으로써 과연 진보가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인지를 재고하게 합니다.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최근 하이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진보'라는 말이 남용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무조건적으로 새롭고 기술적으로 뛰어나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진보'이자 '지고의 선'으로 보는 관점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냅니다. 아무리 새롭더라도 그것이 휴머니즘의 파괴인 한 그것은 진보일 수 없으며, 설령 진보가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좋기만 한 것이라고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고 말이죠. 『토성의 고리』는 그 시절에는 당연한 것이었고 최선의 행동이었던 것들이 오늘에 와서는 몰락의 예표였음이 드러난 다양한 사례로 가득합니다. 오늘이라고 과연 다를까요?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최선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시간이 흘러서 되돌아보았을 때 몰락을 부추기고 앞당기는 요인들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조금 다른 얘기처럼 읽힐 순 있겠지만, 앞서 말한 다비트 프레히트의 책 속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토성의 고리』 마치겠습니다. 이로써 국내에 번역된 제발트의 책은 『이민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잇달아 모임을 열지는 않고 조금 긴 기간을 두고 다음이자 마지막 모임을 열려고 합니다. 더 다양한 얘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또 저혼자 떠들게 되어서 매우 쑥스럽습니다. 뭐가 됐든 수고하셨습니다.
공중전과 문학20세기 말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제발트의 역사의식과 문학론을 살필 수 있는 저서. 1997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진행했던 강연과 후기를 정리하여 묶은 '공중전과 문학', 강연 주제의 문학적 사례인 작가 논문 '알프레트 안더쉬'로 구성되어 있다.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이 책의 저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가장 시의성 있는 주제와 문제를 논하는 대중적 철학가이다. 프레히트가 이번에는 점점 고도화되는 〈인공 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 실존〉과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그는 인공 지능의 발전을 이끄는 것은 앎에 대한 동경도 아니고 자연법칙도 아닌, 자본주의적 계산이라고 지적한다. 즉 특정 집단이 인공 지능의 도움으로 세계와 인간 속으로 깊이 침투하려는 목적은 인간
사실 기술의 "객관적인 문화"는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인간과 자연과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좀 더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지능적인 수단인 돈과 기술은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느 순간 자기만의 삶을 얻더니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구속시킨다. 기술은 인간에게 옴짝달싹 못 하도록 마법을 건다. 인간은 더 이상 기술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기술은 그런 인간을 점점 더 높은 기술적 단계로 내몬다. 그로써 인간은 기술을 이끄는 존재가 아닌 기술에 쫓기는 존재로 전락한다. 결국 기술은 돈과 마찬가지로 우상으로 치켜세워지고, 가치 그 자체가 된다. 그전까지 인간에게 중요했던 가치의 상실에 대해서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 260쪽, 리하르트 ���비트 프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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