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주떼>, 김혜나
1. 몸은 정확한 선열(Alignement)과 배치(Placement)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유롭게 춤을 출 수가 없습니다. 몸이 틀어진 상태로 춤을 추면 오히려 더 약해질 수도 있어요. 반드시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만 체내의 순환이 원활해져 독소와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체중은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틀어지거나 어긋나 있으면, 그 부분이 신체의 모든 부분에 다 영향을 주거든요. 그러니 단 한군데도 흐트러짐 없이 정확하고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 주세요.“ p.12
2. 애초에 타고나지 못한 재능은 나중에도 결코 생겨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선천적인 질병으로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춤을 전혀 추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러니 이로 인한 별다른 좌절이나 절망, 원망감 같은 것조차 가질 수 없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거나 망가진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었기에, 나에게는 별다른 불만이나 원망이 자라날 수조차 없었다. p.27
3. 리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내 몸은 마치 하나의 어항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나의 어항 속으로 리나의 이야기가 더욱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내 몸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의 근육들이 모두 늘어나고, 관절들이 모두 열리면 리나의 이야기가 더 많이 쏟아져 들어올 것 같았다. 그러면 리나는 영원히 내 곁에 남아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만 같았다. p.63
4. 죽음과도 같은 시간, 외부의 시간은 흐르고 있으나 나에게는 모든 것이 정지되어 흐르지 않는, 흐를 수 없는 시간. 내 몸과 의식의 모든 시간과 기능이 다 멈춰버리고 마는 시간. p.79
5. 나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은 채 멀쩡하고 건강하게 자라난 아이였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만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없었던 일이 되는 줄만 알았던 이야기. 그 이야기...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계속, 나에게 떠오르는 것일까? 왜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일까? 왜 이렇게 자꾸만 밖으로 나오려 하는 것일까? p.110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1. 근육, 식사, 커피, 술 등 관리해야 할 대상들을 적다 보면 거꾸로 내가 어떤 경주에 참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그것도 울트라 마라톤이나 투르 드 프랑스 같은 초장거리 경기다. 그렇게 관리를 해가며 내가 매달리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하고 내 업(業)의 본질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된다. p. 32
2. 한 선배 문인이 한국문학의 위상이 추락했다고 아쉬워하며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어 세대 전에는 소설가가 오피니언 리더 대접을 받았는데, 이제는 아니라면서.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상이 복잡해졌고, 상식으로 논평할 수 있는 일이 줄었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정부 시절 문학이 반독재 투쟁의 전위 역할을 하며 사회적 위상이 과하게 높았던 측면도 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헷갈린다. 고색창연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문학 종사자에게는 어떤 앙가주망 같은 게 있지 않나, 펀드매니저하고는 다르지 않나, 하는 마음이 있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넘길 수 없었고, 조지 오웰은 스탈린에 대해 그랬다. 소설가는 지식인인가? 사회 현안을 살피고 목소리를 내야할 책무가 있나? p.118-119
3. 나는 한때 ‘월급사실주의자’라고 내 소개를 하고 다닌 적이 있다. 내가 지어냈고, 지금도 좋아하는 말이다. 내가 당대 현실에 밀착한 글을 쓰며, 내 경력도 그렇고, 무엇보다 내가 갑자기 튀어나온 별종이 아니라 한국문학에 그런 새 물결이 오고 있는데 나는 그 일선에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담았다. 그런데 기대와 다르게 나 혼자 쓰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작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아마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 되는 경우이리라. 무슨무슨 소설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난 요즘 하루키를 읽고 있어“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다. 나도 내 소개가 될 수 잇는 소설,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장강명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p. 218
4. 스물이 넘어 서서히 내 삶에 책임을 지게 되고, 해방과 독립이 마냥 달콤한 방학 같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문학에 매료돼 있었는데, 이제는 자유가 아니라 ‘의미’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세상만사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큰 것은 큰 것대로 속이 텅 빈 듯했고,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한심해 보였다. 신앙을 떠났으나 여전히 의미는 필요했다. 의미가 없으면 살 이유도 없을 테니. p. 300-301
5. 한편으로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다들 경험하셨듯이 2000년 이후 어느 나라에서나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습니다. 이 세계화는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이뤄진 단일화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치와 경제는 각각 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로, 생산과 소비는 기업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맥도날드 방식’으로, 문화는 ‘젊음, 풍요로움, 섹스’를 중시하는 미국 대중문화를 닮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했어요. 그러다 보니 적어도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점점 비슷해져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대에 진정으로 개인이 남들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게 가능할까? 우리는 다들 비슷비슷하게 규격화된 경로를 거쳐, 비슷 비슷한 허무와 불행에 이르게 되고야 마는 것 아닐까? 그런 문제 의식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쓴 장편소설 ‘표백’으로 데뷔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만의 색을 지닐 수 없고, 모두 흰색이라는 정답으로 표백되어간다는 의미의 제목이에요. p. 326-327
그랑 주떼젊은 감성을 위한 테이크아웃 소설 시리즈 「은행나무 노벨라」 제2권 『그랑 주떼』. 도서출판 은행나무에서 200자 원고지 300매~400매 분량으로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만큼 속도감 있고 날렵하며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형식과 스타일을 콘셉트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두 번째 작품은《제리》, 《정크》의 저자 김혜나 작가의 소설이다. 발레에 적합한 몸을 지녔지만 정작 춤에는 재능이 없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말하고 듣는 세계’보다 ‘읽고 쓰는 세계’를 지향하며 책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누구나 책을 써보자고 제안했던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유유히)에서는 자신의 직업인 ‘소설가’가 헌신할수록 더 좋아지는 직업이라고 당당히 고백하며, 부지런히 글을 지어 먹고사는 소설가의 일상과 더불어 문학을 대하는 본심을 숨김없이 풀어놓는다. 소설가 장강명은 오후 11시 반쯤 자고 오전 6시 반 전에 일어난다. 글 쓰는 시간은 스톱워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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