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p.32
오래전에 세례를 받던 때의 기쁨은 때때로 안중근의 마음속에서 솟구쳐올랐다. 그때, 멀리서 빛이 다가왔고 안중근은 밝아오는 영혼의 새벽을 느꼈다. 그때, 안중근은 악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아들이 세례를 받는 날 안중근은 그 때의 기쁨이 부활하기를 기도했다.
p.112-113
안중근이 하숙방으로 찾아와서 술을 사주면서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말을 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이 왜 왔는지를 대번에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에게 동행할 것인지를 대놓고 물어보지 않았고, 우덕순도 같이 가자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의 만주 방문을 알리는 신문을 보여주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가기로 되어 있는 운명을 느꼈다. 자신의 생애는 이 불가해한 운명의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우덕순은 생각했다.
p.149
안정근은 검은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안정근은 스물다섯 살이었는데 오래 산 사람의 무게가 풍겼다. 정대호는 안씨 문중의 사내들은 모두 느낌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세상과 차단되어 있으면서도 세상에 부딪치고 있었다. 사내들은 그 강고한 벽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었다.
p.212
이토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둘이서 말하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 정치적 대화는 없었다. 이 과정은 우덕순의 진술과 안중근의 진술이 일치했다.
이 두 사내들 사이에 어떤 신통력이 작동해서 이런 행동이 가능했던 것인지 미조부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 두 사람만의 일인가, 아니면 다른 조선인들에게까지 확산될 수 있는 일인가를 미조부치는 우덕순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p.217
안중근의 정치성은 이토와 코레아와 세계 공통어 '후라'를 그의 한 몸의 리듬으로 연결시키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거쳐서 대련에 닿는 철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었다. 세계 공통어 '후라'는 말해지지 않은 많은 말을 내장하고 있었다.
p.256
안정근은 면회실에 미리 와 있었다. 전옥과 옥리 세 명이 안정근의 뒤쪽에 앉아 있었다. 안중근은 면회실로 들어서면서 안정근을 보았을 때, 자신과 닮은 동생의 얼굴에 놀랐다. 놀라움은 친밀감이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이목구비가 닮았을 뿐 아니라,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그늘까지도 닮아 있었다. 이것이 혈육이구나… 끝날 날이 가까워지니까 안 보이던 것이 더러 보였다.

하얼빈‘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 ‘작가들의 작가’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이 출간되었다. 『하얼빈』은 김훈이 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인생 과업으로 삼아왔던 특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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