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들은 많이 탄생하는 시대가 따로 있는 걸까요, 아니면 시간에 따라 꼬박꼬박 일정한 비율로 나오는 걸까요. 고전은 고립된 천재의 머릿속에서 어느 순간 뚝딱 튀어나와 갑자기 불멸의 지위를 얻는 걸까요, 아니면 창작자가 영감을 받고 작품이 발견되는 복잡한 비평공동체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요.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답이 명확한 질문들입니다.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은 이렇게 던지게 됩니다. 지금 한국은 시간을 버틸 작품을 풍성하게 탄생시키는 사회인가요? 한국문학 독서공동체는 잠깐의 흥행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목표로 삼는 작가를 응원하고, 그들이 긴 호흡으로 쓴 작품을 시간을 들여 충분히 검토하고 있는지요?
소전문화재단은 2016년 12월 설립 이래 다양한 독서 장려 활동과 작가 지원 사업을 벌여 왔습니다. 특히 시대를 넘어서는 장편소설을 바라는 마음으로 장편을 쓰려는 작가들에게 창작지원금과 취재비, 특별 고료를 후원하는 〈문학과 친구들〉, 집필 공간을 제공하는 상주작가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왔으며, 문학 레지던시도 설립 준비 중입니다.
이번에 시작하는 [이 계절의 소설]은 이 계절에 주목할 만한 장편소설을 고르고, 그에 대한 다양한 비평과 논의를 진행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6명의 평론가들이 모여 3개월마다 두 차례씩, 여기 그믐에서 독서모임을 열고 29일간 좌담을 벌입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작품에 대한 발견과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첫 번째 모임은 지난 3개월간 출간된 장편소설 중 다루고자하는 십여권의 소설을 정하고, 짧은 인상평과 전반적인 기대, 요즘의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번째 모임에서 깊게 읽고 토론하고 싶은 2-3권의 책을 고릅니다.
두 번째 모임은 선정된 2-3권의 책을 같이 읽고, 그 소설에 대하여 6명의 평론가들이 깊은 비평과 논의를 진행합니다.
세 번째 모임은 앞선 두번의 모임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독자들과 소통하는 오프라인 대담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지금 출간되는 장편소설과 작가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작품에 대한 논의를 풍성하게 키우고 싶습니다. 이런 활동이 시간을 버티는 작품을 쓰겠다고 다짐한 작가들에게 작은 응원이 되기 바랍니다. 당대 문학을 읽고 감상을 깊이 나누고픈 독자들의 열린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토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6인의 평론가들이 선정하는 [이 계절의 소설] #1
D-29

소전문화재단모임지기의 말

박혜진
안녕하세요, 박혜진입니다 ^^ 처음 경험해 보는 대화 방식이어서 조금 긴장되기도 하지만, 평소 글을 통해서만 알아 왔던 비평가님들, 그리고 기자 님과 같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데 대한 기대감이 큽니다. 서로 좋은 정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오늘부터 29일 동안 장편소설에 대한 대화들 시작할 텐데요. 이번 6월에는 지난 3개월 동안 출간된 장편소설 중 추천하고 싶은 책이나 읽어 보고 싶은 책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같이 읽을 최종 두어 권의 책을 추려 나가는 대화를 해 보아요. 추천하는 책을 중심으로, 예상할 수 없는 즐거운 대화를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제가 먼저 한 권 꺼내 놓아 볼게요. 지난 5월에 출간된 문미순 작가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라는 소설이에요. 제가 심사에 참여한 '세계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해서, 출간 전에 먼저 읽어 보고 출간을 많이 기다렸던 소설이기도 해요. 출간 후 나온 리뷰 기사 중에는 이 소설을 가리켜서 '간병 스릴러'라고도 했더라고요.
저는 이 소설이 1920년대에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다시쓰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00년 전의 단편소설에는 비참한 상황이 아이러니하고 강렬하게 제시되지만, 100년 후에 쓰인 이 소설에는 간병이라는 사각지대가 훨씬 정밀하게 묘사되고 (폐색감 짙게 묘사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 안에서 궁지에 몰리는 인간의 다양한 내면들 역시 사실적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서스펜스와 감동이 있어서 끝까지 긴장하고 몰입하면서 읽었어요. 참고 목록에 이 책도 한번 넣어 주시면 좋겠네요.

박혜진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보헤미안 랩소디』(정재민), 『저스티스맨』(도선우),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오수완),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고요한) 등 매해 걸출한 장편소설을 배출해온 세계문학상, 그 열아홉 번째 수상작인 문미순 작가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 출간되었다. 185편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이 작품은, 간병과 돌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는 두 주인공이 벼랑 끝에 내몰린 현실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빛을 찾아가는 잔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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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한소
안녕하세요! 한국일보 한소범 기자입니다. 문화부에서 오랫동안 문학 기사를 썼고, 현재는 기획영상팀에서 다양한 영상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문화부를 나온 뒤에는 리뷰에 대한 부담 없이 읽고 싶은 책들만 내키는대로 읽으며 지냈는데, 이렇게 이계절의 소설에 초대되어서 갑자기 조금 긴장이 되네요. ㅎㅎ 저도 올해 상반기에는 장편소설을 많이 챙겨읽지 못했는데요, 함께 이 계절의 소설을 하면서 다양한 장편소설을 읽을 기회가 생길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상반기에 에르난 디아스의 '트러스트'를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최근에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수상 전에도 화제작이긴 했지만, 수상 이후에 정말 안팎으로 많은 감상과 리뷰들이 나온 것 같아요. (저는 퓰리처상 수상 전에 읽었는데 수상 소식을 듣고 나니 어쩐지 '오..좀 이득(?)' 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ㅋㅋ 왠지 그렇지 않나요...퓰리처상 수상작...나는 이미 읽었는데~이런..ㅎㅎ)
책 줄거리와 구성에 대한 소개는 많이 나왔지만 그래도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트러스트'는 20세기 초 미국 월스트리트를 지배했던 앤드루 베벨이라는 거물을 둘러싼 이야기를 각각 소설, 자서전, 후기, 일기라는 네 가지 다른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인데요. 이야기라는 게 결국 쓰는 사람과 목적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쓰여질 수 있고, 글로 옮겨지는 순간 어쩌면 완전한 '진실'에서는 영영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재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주식도 전혀 하고 있지 않고 경제 분야는 무지하다시피 한 편이라서 ^_ㅠ 소설 속 미국 경제상황에 대한 디테일에 좀 압도되어서 수월하게 읽기는 버겁기는 했는데요. 진입장벽이 있는 소설인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장벽을 조금씩 견디고 넘겨가면서 끝까지 읽어냈을 때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게 장편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합니다. 높은 산 너머에 도대체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기어올라보고, 그렇게 다 오른 뒤 정상에서 보게 되는 풍경이 더 멋지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그 여정을 끝마쳤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뿌듯함도 있을 테니까요. ㅎㅎ
그런 점에서 '트러스트'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라도 붙잡고 "야 이거 진짜 재밌어 읽어봐" 이렇게 추천하기는 머뭇거려지지만, 그래도 이곳 '그믐'에 모여계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넘어볼만한 산인 것 같습니다. ㅎㅎ
쓰다보니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무튼, 앞으로 그믐에서 나누게 될 장펴소설에 관한 여러 대화들이 무척 기대가 됩니다. 일단은 박혜진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어서 읽어야 할 것 같고요. ㅎㅎ
(앗 쓰다보니 퇴근시간이 되었네요 후후. 즐거운 불금~ 전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닷)

박혜진

트러스트1920년대 월 스트리트를 주요 배경으로 한 『트러스트』는 금융계에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며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 부부에 대해 네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경제, 금융, 돈, 권력, 계급 등 오늘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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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
<트러스트>는 저도 지인 추천으로 읽었어요. 상반기에 출간된 외서 중에서 화제작이라 할 만한 소설을 꼽으라면 <트러스트>는 빠지지 않겠단 생각이 드네요. 때 맞춰 상까지 받았으니..!
미국 투자사에서 소외됐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해 보려는 작가의 시선도 산뜻했고, 형식이 바뀔 때마다 소설의 공기가 확확 바뀌는 것도 소설적인 재미가 뭔지 보여 줬다고 생각해요. 전반부에서는 말이 너무 많아서 수다 과잉이란 생각도 들었는데, 뒤로 갈수록 전혀 다른 스타일이 나오니 앞서 가졌던 판단들은 무리없이 철회하게 되더라고요. 역동적인 독서였어요. 읽는 내내 한국 버전의 투자사 혹은 투기사를 다룬 소설이 있다면 어떨까, 딴생각도 많이 했는데, 그만큼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뜻이겠죠.
그나저나 첫 번째 글 쓰고 나서, 내가 왜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었는지 조금 더 생각해 보게 됐어요. 대뜸 2020년대의 '운수 좋은 날'이라고 비유부터 한 것 같아서.. 이 소설은 어릴 때부터 아픈 아버지를 돌보며 지금은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20대 청년과,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연금을 계속 수령하기 위해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어머니를 미이라로 만드는 50대 여성, 두 이웃에 대한 이야기예요.
간병 살인, 돌봄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회적인 제도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제가 한 생각이 뭐였나면, '아, 이게 문학이지' 하는 거였어요. 현실의 한계를 보여 주고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돌파해 버리는 거요. 금기를 어기거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식으로.
그런데, 제가 그동안 주변에 이런 추천을 정말 많이 했는데도, 아직 이 책을 읽었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소설 안 어두운데, 생각해 보니 '운수 좋은 날'이라는 비유는 하지 말걸 그랬나 봐요. 너무 비참한 소설에 비유한 걸 후회하고 있는 지금입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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