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혼자 읽기

D-29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할 또 다른 논점이 있다. 실천적 현실주의에 따라 제한된 몇 개의 범주만 인식하는 도덕 규칙이 설정됐으며, 각 범주 내 개체들의 사소한 정신적 능력 차이가 도덕적 지위에서 차이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채 다음 질문을 던져보자.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제11장_제한적 계층주의라는 대안, 셸리 케이건
그렇다면 계단 함수의 형태를 취하는 바로 이것이 도덕적 지위의 진실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아니면 근본적 진실에 완전히 부합하는 규칙 체계를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정당화하려는 ‘편리한 허구(convenient fiction)’에 불과할까? 예를 들어 독수리 두 마리가 있을 때 각각 정신적 능력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이들이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는 게 도덕적 진실일까? 아니면 그저 실용적 목적에 따라 대략적인 ‘근사치(approximation)’를 통틀어 일반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 모두에게 일종의 합의를 구하는 것일까?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제11장_제한적 계층주의라는 대안, 셸리 케이건
사실 나는 계단 함수에 대한 접근방식이 실제로 편리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답변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어쨌든 이 함수는 강요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같은 계단에서는 능력의 차이가 아무런 도덕적 지위의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다가, 어떤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차이가 지위에서의 큰 격차를 초래해 각각 다른 계단에 배치되게 할 수 있을까? 왜 정신적 능력의 차이가 어떤 때는 도덕적 지위의 차이를 만들고 어떤 때는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제11장_제한적 계층주의라는 대안, 셸리 케이건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쪽이 옳을까? 제한적 계층주의는 진실의 구성 요소일까 아니면 근사치일까? 그것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며 여기에서 우리가 확정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다. 어쩌면 끝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질문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도덕 규칙들의 의미에 관한 도덕적 숙고와 더불어 규범윤리학에서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토론의 일부다. 도덕 규칙을 실제적 진실로 보는 관점도 있고 개념적 근사치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비록 양측이 도덕 규칙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고 해도, 우리의 능력과 한계 속에 공들여 설정된 도덕 규칙들은 양측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우리의 목적에 걸맞은 충분한 합의다. 어느 쪽이든 내가 강조하는 핵심 논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동물과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에서 제한적 계층주의 접근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제11장_제한적 계층주의라는 대안, 셸리 케이건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최종 관점은 사실상 ‘상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용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을 도덕적으로 헤아려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헤아림의 정도는 사람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물을 헤아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동물을 똑같이 헤아리지는 못한다는 관점도 상식과 다름없는데,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헤아림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나오며, 셸리 케이건
또한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록 지금에서야 이론적 토대가 마련됐지만 이미 ‘제한적 계층주의’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에 이와 같은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었거나, 이제부터라도 이를 받아들이고자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한적 계층주의에 따르면 사람을 포함한 동물계 안에는 기껏해야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수의 도덕적 지위 범주만 있다. 우선 사람이 있고, 그 아래 다른 계단에는 정신적 능력이 높은 침팬지·돌고래 등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보다 능력이 낮은 개·고양이 등이, 또 그 아래에는 토끼·다람쥐, 마지막 계단에는 어류·곤충류 등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류로 인해 내가 논의를 시작하면서 우려를 표했던 부분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내가 행여 현재 많은 사람들이 동물을 대하고 있는 태도나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동물보다 사람이 우선이고 더 많은 헤아림을 받는 게 사실이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그런 해석이 내 실제 견해에 대한 총체적 몰이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실히 밝히고 싶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나오며, 셸리 케이건
동물은 비록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껏 가져온 생각보다는 훨씬 더 많은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여러분이 나와 함께 꽤 긴 논의를 진행해오는 동안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들을 점검해볼 수 있었다면 나는 만족한다. 내가 제안한 여러 견해에 여러분이 동의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온전한 ‘사람’인 여러분이 사람의 삶을 살면서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동물의 삶에 투영하는 것이 유의미한 작업임을 깨닫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다. 이제 동물의 몫을 생각할 때다. 무엇을 줄 수 있느냐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동물을 학대해온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그 같은 행위가 불명예스럽고 치욕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인식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우리가 오게 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날이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나오며, 셸리 케이건
따라서 도덕철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동물을 진정으로 헤아리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학대를 멈추게 하는 실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인정컨대 내가 이 책에서 수행한 작업이 본격적인 실천 강령을 수립하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할 때 그 실천은 사회적 공론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 더욱이 현재 주류를 이루는 견해, 즉 사람과 동물이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관점은 사회적 공론을 이끌어내기는커녕 저해하고 있다.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하며, 그러려면 절대 다수의 공감과 동의가 필요하다. 사람과 동물이 동등하다는 주장으로는 동물해방도 동물복지도 이뤄낼 수 없다. 그들만의 영원한 리그가 될 뿐이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나오며, 셸리 케이건
따라서 사회적 공론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동물윤리 이론은 반드시 제한적 계층주의 관점을 기반으로 해야 하며, 여기에서부터 세부 사안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동물을 헤아리되 사람보다는 덜 헤아린다는 전제가 아니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지 않고서 무작정 동물에 대한 부끄럼 없고 공정한 처우를 바라는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나오며, 셸리 케이건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비관적인 전망일 수도 있다. 나도 그러기를 희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동물윤리뿐 아니라 모든 윤리에 대한 이해가 도덕적 지위의 중요성을 제대로 고려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혼란스럽고 불완전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우리가 진행한 논의가 사회적 공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론을 풀어나간다는 의미에서 적어도 표면을 긁어놓기는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전히 이 책에서 전혀 다루지 못했거나, 다루긴 했으나 자세히 파고들지 못한 도덕 이론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앞으로 다듬어나가야 할 세부 사안들이 될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악마는 디테일에 있으며, 디테일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나오며, 셸리 케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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