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돌이 님. 반갑습니다! 저 또한 제가 속한 작은 지대를 벗어난 대다수의 일에 대해 구체적/실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지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이 뜨끔하였어요. 해주신 말씀에 백분 공감하며 어떤 문장 하나가 떠올랐는데요... 조세희 선생님의 난쏘공 연작 가운데 〈궤도 회전〉 속 문장입니다. "그게 모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야." 흠칫 '죄까지!?' 싶지만 그럼에도 홀로 바이블처럼 삼아온 문장인데요. 무거운 마음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또 그럼에도 함께할 여정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잘 부탁드려요!
[성북구 한 책 플랜 비-문학] ② 『같이 가면 길이 된다』 함께 읽기
D-29

생각의힘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생각의힘
요 부분에 대해서는 이상헌 작가님께서 나누어주시면 좋을 듯한데 지금 이 시간 상공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한국으로 날아오시는(!?) 중인데요! 🛫 추후 끌어올려서 요 이야기 이어나가겠습니다. 🌜

망원에서공덕까지
1. 다들 책에 진입할 때 어떤 느낌이셨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노동자'는 '인간'이 아니라 '사자'라는 생각을 한다." 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간 목도해온, 감히 대항하거나 목소리를 낸 죄를 처형당한 사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또한 "어그러진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은 늘 언어다." "오늘날, 자유란 각자도생의 다른 이름이다." 라는 부분도 절감했습니다. 여기까지 진입할 때의 소감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니!" 하는 놀라움과 얼마나 좋은 책일까 하는 기대감이었습니다.
2. 다들 1장 제목 읽고서는 또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바로 얼마 전 빵을 샀는데, '허쉬초코빵'인 줄 알았더니 다시 보니 '삼립허쉬초코빵'이었습니다. SPC 불매를 나름대로 계속하고 있어 당황스러웠습니다. 루쉰의 이야기에서는 사람 죽인 빵을 먹지 말자던 구호도 떠올랐습니다. 출근길에 급히 샀다고는 하지만 나는 편리하게 부주의할 수 있구나...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의힘
헛 저도 말씀하신 첫 번째 문장에서 멈춰 섰습니다. 완전히 사자가 되어 원고를 읽어내렸고 지난 삶을 돌아봤어요. 제 싸움은 가망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었고, 겉보기에는 피 흘리지 아니하였지만 상처가 곪은 채였고, 온순하다는 말을 듣는 동시에 포악하고 난폭하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어왔더라고요. 자주 피로했고, 이 경기장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참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 생각조차 안 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냥 그렇게 살아오던 어느 날 요 원고와 만났고, 다음 쪽에 이어지는 "거친 발톱끼리 손잡는 기적을 기다린다"는 문장에서 눈물이 왈칵 터졌던 기억이 납니다.
한편 저도 SPC를 비롯한 몇몇 기업 불매를 이어오고 있지만 (대)기업의 거대한 자본력이나 상술 앞에서는 깜빡 흔들릴 뻔한 경험도 있는데요. 월계역 님 덕분에 다시 정신 바짝 차리자 되뇌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생각의힘
1부 감상 나누어주시는 것들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집중하여 읽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시간이 훌렁훌렁 빠르게 흘러서 어느덧 2부로 넘어갈 시점이 되었네요. ✨
2부 제목은 "100년의 거친 꿈: 당당한 노동"입니다. 이번에는 '살아남은' 노동이 끊임없이 고개 숙이는 현장을 끄집어냅니다. 100년 전 8시간 노동, 최저임금, 차별 없는 노동을 내세우며 (저자 이상헌 작가님이 몸담고 있기도 한) ILO가 만들어졌는데요. ‘당당한 노동’은 누군가에게는 현실로, 그러나 수많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부가 아예 장시간 노동을 장려하는 법까지 만들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여기 적힌 오랜 역사의 문장들은 한결 서글프면서도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생각의힘
2부를 읽는 여정에서는 아무래도 이상헌 작가님과 본문보다 한 발짝 더 들어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궁금하신 점 남겨주시면, (곧 한국 땅 밟는) 작가님께서 같이 이야기 나누실 겁니다.
"같이" 읽되 (제가 중간중간 던지는 질문에는) 저마다의 속도와 호흡으로 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흘러간 질문에 답해주셔도 언제건 좋고, 새로운 이야기를 던져주셔도 기쁩니다.
4. 2부는 총 열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꼭지(또는 문장)에 가장 오래 머무셨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5. 2부를 읽으며, 얼마 전 뜨거운 화두가 되었던 '주 69시간 근무제'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day
4. 2부에서 오래 머물렀던 꼭지 이야기를 하기 전, 2부 첫 장을 넘기자마자 보였던 페이지에서 머무르다가 본격적인 2부 내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문단이 인상적이었지만, 첫 번째 문단의 첫 문장이 계속 남더라고요.(“무엇보다 살아남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생존이 노동의 최종 목표일 수는 없다.”) 노동의 목표와 최종 목표에 대해 생각하며 편집자님께서 처음에 남겨주신 “대관절 우리에게 '일(노동)'이란 무얼까요?”란 질문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일(노동)이란 무엇인지, 삶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저는 2부에서 자주 멈칫했던 만큼 오래 머물렀던 꼭지가 많았는데, 그중에서 ‘게으름 탓이라는 강고한 신화’, ‘화장실의 불평등’, ‘임금체불 사건’ 3개의 꼭지에 대해 적어 봅니다.
1) ‘게으름 탓이라는 강고한 신화’
p.68 이쯤 되니 빈곤층의 태도마저 시빗거리가 되었다.
p.69 저소득층을 도울 요량으로 소득지원책을 내면 그 내용을 살필 틈도 없이 ‘돈을 주면 더 게을러진다’는 주홍글씨 주장이 쏟아진다. 또 그런 얘기만 듣다 보면 열심히 벌어 세금 내는 ‘부지런한’ 사람의 심사가 틀어지고, 나랏돈이 내 주머닛돈처럼 아까워지는 것이 당연지사다.
p.69~70 게다가 우리는 ‘실패한 게으름’에는 가혹하지만 ‘성공한 게으름’에는 얼마나 관대한가. 운이나 권세 덕분에 자신의 재능과 노력 이상으로 벌고도 몇백 억 세금을 빼돌린 사람은 모른 척하다가도, 없는 사람의 몇만 원에는 서릿발 치는 눈빛을 보낸다.
-> 이 꼭지에서 ‘게으름’에 대해서 생각하다 ‘노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흔히 ‘노오력’이라고도 말하곤 하는데, 정말 가난함은 개인의 탓과 잘못이 아니며 개인이 기울이는 노력만의 문제가 아님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자기계발서가 엄청나게 쏟아지면서 ‘갓생’이라는 단어도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의 노력이 엄청나게 강조되며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기는 쉽지 않다고 느낍니다. 잠시 멈추는 순간 세상에 나의 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함과 불안을 머금고 발걸음을 옮기게 되니까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게, 열심히 사는 게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열심히’의 기준도 모두 다를 것입니다.) 다만 사회제도나 정책 이야기를 제외하고 개인이 하는 노력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이미 만연해있어 끝없이 나와 타인을 비교하며 스스로 채찍질하거나 지원받는 사람은 쉽게 비난하고 소위 ‘금수저’라고 불리는 이는 부러워하기를 반복하는 환경이 이어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69페이지에 나오는 ‘게으른 복지수급자라는 고정관념’ 표현을 보면서 최근 실업급여 개편/폐지 뉴스도 같이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2) ‘화장실의 불평등’&‘임금체불 사건’
p.77~78 가장 평등해야 할 곳에서 그렇지 못할 때 그 사회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하다. 화장실에 갈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나라는 더 불평등하다. 화장실 차별은 적나라하면서도 근본적이다. - ‘화장실의 불평등’
p.81 사슬처럼 얽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약탈적인 하도급은 목숨을 보장하지 않고 월급도 제대로 챙겨주질 않는다. - ‘임금체불 사건’
p.82~83 일을 시킬 때는 ‘갑질’, 일값을 치러야 할 때는 ‘운명공동체’. 하도급 구조는 이렇게 완성된다. - ‘임금체불 사건’
-> 얼마 전 호텔 주방의 노동 환경 이야기를 짧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호텔 주방에서는 화장실을 갈 수 없어 기저귀를 차고 일하는 게 흔하다는 말을 듣고 잠시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선 노동 중간에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인데요. 알고 있는 노동과 모르는 노동, 노동 환경이 직접적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각각의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노동 환경에 대해 떠올려 보며 책의 내용(협박의 수단이자 보복의 무기가 되는 화장실이라는 공간)과 함께 아찔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제가 ‘화장실의 불평등’&‘임금체불 사건’ 두 꼭지를 한 번에 묶어서 적게 된 것은 호텔 주방 노동 환경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최근에 접한 마루 시공 노동 환경 이야기로 인해서인데요. 건설사 직원과 같은 화장실을 쓰지 못하는 현장 노동자, 여성 노동자의 경우 생리대를 바꾸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 마루 시공 외적인 일(각종 쓰레기 처리 등)까지 맡아야 하는 모호한 업무 범위, 다단계식 구조(원청, 관리자, 노동자)속 장시간 노동과 임금체불, 산업안전보건법이 적용되지 않아 안전 의무를 다하지 않으며 산재 처리에 뒤따르는 사측의 협박성 발언 등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정말로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 되레 생존을 위협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임금체불 사건’ 83페이지에 나오는 “나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싸우라고 했다. 서로 돌봐주지 않는 세상에서 누가 누굴 비난하겠는가.”라는 문장에서처럼, 내가 나를/내 일을 잘 돌보고 지키기도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를/무엇을 감당한다는 것과 그 무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상헌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늘 겪고 있지만,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하는 삶의 문제 대부분이 그런 듯 합니다. 이런 문제가 누적되면 정치와의 괴리, 정치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런 것이 실상 언론이나 정치에서 말하는 '포퓰리즘'입니다. 다소 아이러니한 것이, 이런 현상을 정치와 언론이 만들었어 낸 것인데 그걸 마치 남이 만들어내고 자신들이 싸우는 대상으로 제시하다는 점입니다.

day
일하는 삶의 경제적 이해/정치적 계산에 의한 휘둘림, 정치에 대한 불신에 대한 작가님의 말씀이 정말 공감되고 저도 속상하고 씁쓸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은 지워지고 겉도는 싸움에 피로함을 계속 느끼는 요즘입니다.

day
5. 누군가는 이렇게 발전된 현대에 과로사가 웬 말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현대에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과로사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장 곁에 있던 동료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언제든 제 주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 노동 환경에서도 지켜지지 않는 노동권을 넘어 생존권이 주 69시간 근무제에서 지켜지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암암리에 더 긴 노동 시간을 강요당할 수 있는 환경에 쉬이 노출될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노동 단축을 외치는 세상에서 주 69시간 근무제가 시행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죽을 각오를 권하다 못해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헌
네, 저도 같은 걱정입니다. 일하는 삶의 문제는 좀더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는데, 가끔 좁은 경제적 이해나 정치적 계산에 휘둘리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유독 '선진국' 한국에서 도드라지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혜준
4. 2부에서 <화장실의 불평등> 꼭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어디서 일을 하든, 화장실은 항상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곳을 청소하는 노동자를 마주합니다. 그게 나이 든 할머니일 때도 있고, 저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장소적으로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집중해 읽었습니다.
특히 "가장 평등해야 할 곳에서 그렇지 못할 때 그 사회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하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남더군요. 화장실은 평등한 장소라는 개념 자체를 책에서 접했을 때의 깨달음이 씁쓸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5. 주69시간제는 장시간 노동의 폐해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장시간 노동의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장 주69시간 근무제를 진행하는 건 무리라 생각합니다.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선 현 노동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보완 장치를 마련한 후에 주69시간 근무제와 같은 것들을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망원에서공덕까지
4. 2부는 총 열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꼭지(또는 문장)에 가장 오래 머무셨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화장실의 불평등>입니다. 학생 시절, 아파트 건설 현장의 모델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첫날 화장실에 관해서 물었는데, 현장에는 모델하우스 아르바이트들이 쓸 만한 화장실이 없으니 현장 밖 가장 가까운 2층 카페의 화장실에 몰래 다녀오거나 사람 없는 구석 아무 곳(?)을 사용하라고 하더군요. 선배들은 옆에서 "두세명이 봐주면 된다"고 다독여주었구요. 지금 같았으면 달랐겠지만 당시에는 '단기로 반짝 일하기 좋은 일'이니 아쉬운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카페 음료를 하루에 두어번은 사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르바이트는 물론이고, 현장의 건설 노동자들의 사정이야 달랐을까요? 나중에 그 아파트를 지날 때면,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는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은 아파트인 것을 사람들은 모르겠지,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day
'그 아파트를 지날 때면,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는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은 아파트인 것을 사람들은 모르겠지,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고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책에서 나왔던 쿠팡 등을 이용해 물건을 구입하며 배달된 물건만 보고, 배달을 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속의 노동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망원에서공덕까지
5. 2부를 읽 으며, 얼마 전 뜨거운 화두가 되었던 '주 69시간 근무제'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난 광복절,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라는 말을 (축사랍시고) 듣고는 망발도 저런 망발이 다 있나, 사람이 죽은 공장에서 또 사람이 죽고 있는데, 나라가 들끓고 있는데...
속에서 너무 많은 말이 터져 나오려 해 입은 그만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 69시간 근무제'를 들었을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우리
앗, 벌써 2부로 넘어갔군요! 제가 진도가 느립니다.. ㅠㅠ 저는 2부에서 <노 동조합, 이로우나 허하지 말라>라는 소제목이 눈에 띕니다. 어떤 내용이 나올지 너무너무 궁금해요! (이 장부터 읽어야겠어요~) 저도 쪼그마한 회사에서 생전 처음 노조에 가입한 적이 있는데, 별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실로 죽을 뻔했거든요. 신문에 나올 법한 회사의 노조 방해 공작, 노조원 회유 등 규모만 작았지 뉴스 상황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비극으로 끝난 이야기... 이른바 '깨어 있다'는 출판계도 그러한데(제 직업이 편집자입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일터에서 노조의 일상화는 가능할까요. 저는 23세기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문득 경영진과 노조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이상적인 회사가 과연 한국에 몇 개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외국 사례도 궁금하구요.

김남주
4. 저는 2부 중 <화장실의 불평등>에 마음이 가장 동하였어요. 화장실 접근권을 보편적 권리라 말씀하시는 부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는데요. 세상의 '보편적 권리'마저 노동 현장에서는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에는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누군가는 개인용 변기를 갖춘 고품격 화장실을 혼자 이용하는 반면, 1만5천명이 일하는 건설 현장에서는 '3분 이상'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게 만드는 노동 현실. 또 어떤 노동자에게는 화장실이 곧 휴식의 공간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보복의 무기가 된다니, 보편적 권리라 일컫는 화장실에서도 우리는 불평등을 경험하게 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노동환경은 불평등으로 가득합니다. 언제쯤 그 보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올까요?
인상적인 구절을 남겨 봅니다.
가장 평등해야 할 곳에서 그렇지 못할 때 그 사회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하다. 화장실에 갈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을수록 그 나라는 더 불평등하다. 화장실 차별은 적나라하면서도 근본적이다. _p.77
낙타6
마감일날 뒤늦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책을 보내주시면서 정성스럽게 손글씨로 편지를 써주신 담당자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을 정돈하고 정성스럽게 읽어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다른분들과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위에 올려주신 말씀들을 읽는것만으로도 감정이 뭉클해지고 조금씩 배워갑니다.
제목과 루쉰의 인용구를 보고 어린시절 즐겨읽었던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왜 길로 다니지 않는 거지?"
이루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내가 한 말이다. 카알은 대답했다.
"길은 인간의 것이야. 엘프는 길을 만들지 않아."
"길을 안만든다고요?"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옛이야기가 있지.
엘프가 숲을 걸으면 그는 나무가 된다.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긴다.
엘프가 별을 바라보면 그는 별빛이 된다.
인간이 별을 바라보면 별자리가 만들어진다.
엘프와 인간의 변화를 잘 나타내는 말이지."
우리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길을 만들어가는 존재들입니다. 루쉰의 말과 함께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길, 곧 희망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노동의 고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희망일 것입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이끌고, 참고, 살아가게 합니다.
수험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에겐 대학생활이 그 희망일 것입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에겐 좋은 직장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것이란 것이 그 희망이 될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노동의 고단함을 견뎌내는 사람들에겐 자녀들의 미래가 그 희망일 것입니다. 희망이 현실을 견디고, 길을 찾아 만들어 나가게 합니다.
작가님은 시작하는 글에서 "희망은 같이 키우는 법이다"라고 하셨고, 제목도 "같이 가면 길이 된다"라고 쓰셨습니다. 이 무거운 여정에서 어떻게 희망을 함께 키우고, 길을 만들 수 있는지 배워보고 싶습니다.
P.S.1
여기까지 쓰고나니 문득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의 한 구절이 떠오르네요. 인용해봅니다.
"그들은 손에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신념만은 대단히 확고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와 살이 움직이면 군대와 탱크도 막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들이 한데 뭉쳐 있으니 거센 열기가 솟아올랐다. 모든 사람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 같았다. 이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빛이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고, 또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의 몸보다 에너지를 더 멀리 전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던 그 밤에 나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P.S.2
이영도 작가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 및 그의 작품세계를 총괄하는 표현인 레젠다리움의 엘프 개념과, 또 톨킨에게 영향을 받은 던전 앤 드래곤이란 TRPG의 엘프의 개념을 빌려와 조금 변형해서 사용합니다. 이후 한국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죠.
판타지 소설에 익숙하지 않으신분들을 위해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위 소설의 세계관에서 엘프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숲을 걸어간다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곳을 따라서 자연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걸어가기 위해 노력하겠죠. 그와 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변형시킵니다. 나무를 베고, 돌을 고르고, 길을 만들겠죠. 인간은 길을 만들어갑니다.
톨킨은 어렸을 때 공장주변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자라면서 봐온 검은 연기를 내뿜는 굴뚝을 싫어했다고 해요.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자신도 친구들과 함께 1차대전에 참전했고, 함께 학부시절을 보내던 친구들 여럿이 그 전쟁에서 사망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아들마저 2차대전에 보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톨킨은 자연스럽게 기계문명과 전쟁을 싫어하게 됩니다. 말년에 당신의 시골집 앞에 길이 나는것마저도 싫어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의 작품을 다룬 영화가 화려한 전쟁장면에 초점을 두었다는건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낙타6
1.
제사1에 나온 사자와 인간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자본가들에게 사자씩이나 되긴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보단 모기나 소, 돼지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자본가에게 노동을 통해 고기든, 일이든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소, 돼지 취급일테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노종자들은 모기같은 존재들일테죠.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을 공격한다면 멸종을 시켜야할 벌레들이나, 집단폐사를 시켜야할 쓸모없는 가축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습니다.
2.
제목을 보고 너무 놀랐지만, 내용을 읽으면서 식인이 맞구나, 맞구나.. 하면서 가슴을 쳤습니다ㅠㅠ 정말 저는 타인의 죽음 위에 살아가고 있었네요. 이젠 "죽을 각오로" 같은 표현은 평생 못쓸거 같습니다. 정말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해놓고 어떻게 그런 말을 쓸 수 있겠어요 ㅠㅠ 며칠전 또 SPC 샤니의 공장에서 또 노동자가 끼임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대체 사고가 난게 얼마나 되었다고ㅠㅠ 정말 먹먹합니다ㅠㅠ
3. <죽음이 또 다른 죽음으로 잊히는 사회> 였습니다. 바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들어가보았습니다. '속보'와 '접기'가 대비되는게 너무 속상했습니다. 속보를 눌러 속보들이 가득한 웹페이지로 이동했습니다. 8월 8일 하루동안에만 네명이 사망했어요. 사건마다 간단하게 어떤 상황인지 한문장으로 묘사되어있는데 읽고 상상만해도 앞이 깜깜했습니다. 앞에 올라온 감상들을 읽고 중대재해알림 오픈카톡방을 찾아가보았습니다. 각 지역별로, 업종별로 카톡방이 엄청나게 많더군요.
이 소식들을 매일매일 들으시는 분들은 어떻게 견디고 사는건가 싶다가도, 주요 언론과 포털이 이런 일들을 맨 앞 페이지에 싣고, 이런 소식들을 공유하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질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낙타6
4. <8시간 노동의 험난한 여정>입니다. 이걸 읽으면서 <6시간 vs 8시간,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도 떠올랐습니다. 작가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결국 이 문제는 경영자들이 노동에 얼마나 돈을 지불할것이냐의 문제가 가장 핵심적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더 많은 돈을 노동에 쓰지 않으니 그 안에서 노동자들이 더 아둥바둥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조금 일해도 살아가는데 충분한 돈이 있다면 조금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노동자들은 평생 그런 돈을 벌수가 없죠..
한편, 노동자들은 쉴 권리가 필요하지만 또 살아가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가정에선 더욱 더 그렇습니다. 온통 돈 나갈 곳 뿐이죠 ㅠㅠ 노동시간을 줄인다는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의 첫 생각은 "그럼 줄어드는 내 소득은?"일 것입니다. 보수언론은 지난 정권에서 이 심리를 굉장히 잘 이용했죠.
소득과 워라밸, 이 둘의 긴장관계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잘 조절할 것인지 고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많은 소득 vs 워라밸에서 워라밸을 선택하는게 아니고, 이런 노동시간 제한을 정책적으로 추진했을 땐 오히려 그런 정책을 추진한 정당이 일할 권리를 강제로 빼앗아간다며 지지를 잃는 걸 몇년전 경험했으니까요.
5. 재벌들은 노동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을 "비용"이라 하면서 이 비용을 어떻게든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심지어 제 때 지불하지도 않죠. 하지만 "재벌들의 실패"엔 너무나, 너무나 관대합니다. 사실 한국 기업의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자들의 불성실이나 비효율이나 고비용이 아닙니다. 미래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곳에 투자하지 못하고, 큰 자본을 투자하면서도 이로 인해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기업의 미래가 저물어가는게 제일 큰 문제죠. 이 자본은 단순히 재벌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정부가 그 재벌에게 집중 지원해주면서 만들어낸 것이고, 사실상 이 나라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벌들은 그 실패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경영자들이나 교체하고 말겠죠. 그 경영자들은 또 다른 재벌기업에 가서 같은 일을 반복하구요. 그리고 기업이 이윤을 내면 그들이 가장 많이 받아갑니다.
어떻게하면 이런 재벌과 경영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을 조절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론 북유럽처럼 사회적 대타협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중도/진보적인 스탠스의 정당보다 보수정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게 현실이고, 현재 언론환경에선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정치적 동력을 만들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사회적 대타협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사회적 대타협을 했는데 노키아처럼 기업이 쇠락했을 때의 문제입니다. 이 또한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영자들의 잘못이지만 오히려 대타협이 정치적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으니까요. 또 한편으로는 시대가 바뀌어가고, 돈이 나오는 곳이 달라질 때 빠르게 적응하는데 장애물이 되면 어떡하냐는 쓸데없는 생각도 듭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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