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속다문화]#1. 모두에게 복된 새해

D-29
나는 TV 소리를 줄이고 부엌의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와 이 친구에게 하나를 권했다. 시크 교도들이 술을 마시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내 상식으로 봐서는 안 마실 게 분명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마다하는 이 친구에게 맥주를 권했다. 어쨌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밤인데다가 서로 좀 취하게 되면 이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친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캔을 땄다. 우리는 캔으로 서로 건배한 뒤,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이 친구가 오른손으로 수염을 한번 쓰다듬는 동안에도 캔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나는 한번 더 건배하자고 캔을 내밀었고 우리는 맥주를 들이켰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36, 김연수 지음
길지 않은 글들로 연말 특유의 분위기를 예쁘게 나타내고 상대방과 조금이나마 친해지고자하는 주인공의 진실한 마음이 와닿아서 내가 마치 주인공의 상황이 된 것 같았다.
한 해가 흐르고 또 한 해가 지나는 동안, 음정은 틀려지고 건반은 망가진다. 그 아이의 한국어가 이미 죽은 한국어인 것처럼, 그 아이가 돌아와 피아노를 친다고 해도 그때 그 시절의 음률을 노인이 듣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바뀔 뿐이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34, 김연수 지음
이 구절에서 음정이 틀려지고 건반은 망가진다는 표현이, 노인이 다시는 그때의 음률을 듣지 못할 거라는 말이 노인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확인 사살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맞지 않는 소리와 건반의 모습이 현재 '나'와 아내 사이의 어긋난 마음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해서 인상깊었다.
"또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혜진이 내 이야기 같은 것도 했습니까?" 웃음을 그치고 내가 말했다. "당신 이야기 같은 것은 안 했습니다. 코끼리 보고 혼자를 했습니다." "코끼리? 혼자? 환자?"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서 내가 되물었다. "코끼리 그림 보고 혼자를 했습니다. 하나. 혼자라고 말했습니다." "아아. 혼자. 그런데 뭐가 혼자라고 말했습니까?" "혜진의 마음, 혼자입니다." 나는 이 친구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게 아내의 심장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인지, 아내가 스스로 혼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인지.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38-139, 김연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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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끝까지 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과연 서툰 한국어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싱의 한국어 실력보다 더 서투른 것은 남편의 마음이었다. 혜진은 늘 혼자여야 했다. 그리고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편은 잊고자 하면 잊어지는 사람, 혜진은 잊기보다는 추억하며 간직하는 사람.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인데, 부부로서 만났으니 혜진이 모래에 아기를 그리면 남편은 파도처럼 그 위를 덮쳐왔을 것이다. 혜진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잊었다고 생각한 아이를 잊지 못하며 매일매일 모래 위에 아이를 그렸을 것이다. 남편은 그날에, 눈이 사람 키처럼 덮여 있고 그 위로 연약한 눈발이 휘날리던 그날에도 파도였다. 그는 자신이 흐르는 대로 흘렀을 뿐이다. 파도는 원래 모래 위로 밀려오는 거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혜진도 그걸 알아서 단 한 번도 남편에게 화내지 않았다. 파도에게 역정을 내면 잠잠해지던가, 혜진은 그저 침묵했다. 한국어는 어눌해도 그 안에 담긴 다정함, 모래처럼 따뜻한 순수함만큼은 명료한 싱 앞에서 혜진은 자신이 모래 한 줌과 같음을 밝혔다. 그녀는 처음으로 위로를 만났고 그 앞에서 한없이 무너졌다. 남편은 아마 끝까지 혜진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혜진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그들은 말 할 수 있는 만큼 말하고, 그 후엔 그저 사랑하기로 한다. 서로를 덮으며, 섞이는 듯 섞이지 않는 마음을 안쓰러워하며 서로를 사랑한다. 우리가 그린 수평선 너머로 새로운 해가 떠오르기를 소망하며.
감상평이 마치 소설같아. 문장이 너무 아름답네. 혜진을 모래에, 남편을 파도에 비유한 것도... 파도에게 역정을 내면 잠잠해지던가... 같은 한국어를 능숙하게 쓰고 10년 이상을 같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사는 부부는 서로 닿지 못하는데 만난 지 5개월 언어도 문화도 사는 곳도 판이하게 다른 싱과 오히려 진정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 '말하자면 친구'가 된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다. 그치? +이 소설을 읽고 내가 그치? 을 발화할 때마다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 친구는 거실에 놓인 저 피아노를 조율하겠답시고 장장 한 시간에 걸쳐서 버스를 타고 온 것이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121p, 김연수 지음
아내와 '그 친구'의 관계가 매우 좋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이는 아내는 '그 친구'가 남편보다 이야기가 더 잘 통하기에 점차 그와 친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별 의미 없어보이는 구절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인물들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해서 인상깊었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호동의 불빛이 바필 때마다 자동차들이 일제히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홀러든다. 조금 열어 둔 창문 틈으로. 그 소리가 파도 소리를 닭아, 내 귀가 자꾸만 여 웨어간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면. 수천만 번의 겨울을 보 내고 다시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하는 해변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노낌이 들므로. 그게 그 해변의 제일 마지막 겨울이라서 파도 소 이를 듣는 일이 그토록 외로운 것이라고, 그렇게 두 눈을 감고 나 는 가만히 들어본다.
내게 겨울은 낭만적인 계절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냐 하는 질문에 바로 답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런 점 마저도 낭만적으로 다가올 만큼, 나는 언제부턴가 겨울이라는 계절이 푹 빠져 있었다. 비록 글에 적힌 것처럼 수천만 번의 겨울은 보내지 못했지만 겨울이란 계절은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설레임과 울렁거림을 각인시켰다고 생각한다. 한 번을 지내고 나면 1년을 지내서야 찾아오는 이 하얀 계절은, 이전 계절의 기억을 망각하게 하며 작년에 내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그 찰나의 순간들과 추억을 다시 끄집어낸다. 이것들은 계절의 공기에도, 바람에도, 풍경에도 조금씩 각인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올해, 내게 겨울은 조금 이르게 찾아온 서늘한 냉기와 함께 이 글로써 내게 다가왔다. 이리 생각해 보건데,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부분 부분 겨울을 닮아 있었다. 아이와의 이별 여행 차 다녀온 훗카이도의 오타루에서는 시리고 포근한 눈이 내렸으며, 조율이 덜 된 채 오랜 겨울동안 싹을 틔우지 못한 풀처럼, 심의 말을 빌리자면 긴 시간 노래하지 않은 피아노가 그러했다. 또 제목에서도 언급되는, 겨울의 끝자락에서야 마침내 찾아오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역시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고독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는 쏠쓸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눈이 내리는 밤에 짖지 않는 개와 마찬가지로 저는.....” 작중 심이 하는 이 대사는, 마치 부부의 겨울과 같은 감정을 비록 조율이 덜 되었지만, 날것 그대로의 음악을 들려주는 오래된 피아노처럼 서툰 말로서 표현한 것 같았다. 그랬기에 무엇보다 겨울을 잘 나타낸 이 구절이 내게 많은 여운을 남기게 되었다.
나는 이 친구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게 아내의 심장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인지. 그러자 이 친구는 맥주 캔을 내려놓고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트비르 싱은 아내의 외로움을 이해하지만 남편이 아내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답답했다. 아내의 심장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인지 부분에서 남편은 아내의 외로움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는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제야 나는 "말하자면 친구"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은근히 걱정한 것처럼 심각한 게 아니라 아무런 대가 없이 서로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쳐주는 관계였던 것이다. 이 친구는 더듬더듬 한국어로 말하고. 마찬가지로 아내도 더듬더듬 영어로 말하는 사이. 말 그대로. "말하자면 친구"인 사이. 나는 마음이 좀 풀어져서 맥주를 쭉 들이켜고는 이 친구에게도 마시라고 강권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37, 김연수 지음
'나'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이 친구가 될 수 없을거라는 인식으로 "말하자면 친구" 라는 관계에 대해서 궁금해 했고, 남편 본인이 아닌 최근에 만난 외국인 노동자가 아내를 더 안다는 사실과 남녀 사이에 관한 걱정 등이 아내의 친구라는 말을 솔직히 믿지 않았던 것이 보이는 구절이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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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한국어가 연기처럼 자욱하게 떠다니는 광장의 한가운데 혼자 서 있다가 숨이 막혀서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제 음을 찾아가야만 하는,아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리들이 집을 울렸다. 이제쯤 돌이켜보면 오타루의 겨울은 단 한 톨의 눈송이도 버리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아주 많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마침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해가 찾아올 때까지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42, 김연수 지음
이 여자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 아픔을 위로해준건 정작 남편이 아니라 사트비르싱이 아니었나 싶다. 또 아내와 인도인인 사트비르싱이 친구가 되어가는것을 보면서 정작 남편은 속으로 걱정을 하는 그 모습. 서로 힘들어 보이기만 한다. 이 구절은 소설 가장 마지막을 마무리하며 나오는 구절인데, 새로운 해가 모두에게 찾아온다면 희망이 생긴다는 말 같아보였다. 괜찮아지면 좋겠다.
한 십여 년 전, 우리의 꿈은 소박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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