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함께 읽기] #44. <수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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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공지능의 등장에 불안해했던 사람도 하나둘씩 마음을 놓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말을 배우고, 사춘기의 고민과 진로를 상담하고, 첫사랑의 설렘까지 공유하는 식으로) 이 인공지능의 세심한 배려 속에서 자랍니다. '클라우드(구름)'에서 탄생한 이 새로운 존재를 놓고서 사람들은 '선더헤드(Thunderhead, 뇌우)'라는 별명도 붙여주죠. 새로운 신이냐고요? 아닙니다. 선더헤드는 자기가 신처럼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일을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슬며시 인류에게 경고하고 제안합니다. 한정된 지구에서 인류가 종을 보존하려면 매년 일정 수의 죽음은 불가피하다고. 자기는 인류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겠지만,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만은 인류의 몫으로 남겨놓겠다고. 그래서, 인류는 고심 끝에 '수확(Gleaning)' 즉, 매년 무작위로 할당된 만큼 인간의 목숨을 (자기 방식대로) 빼앗는 자격을 부여받은 '수확자'라는 존재를 승인합니다. 중세 시대의 성직자처럼 자기 공동체만의 규율(수확령)의 제약을 받은 이 수확자의 행동에 선더헤드는 전혀 관여하지 않기로 약속하죠. 물론 선더헤드의 비전이 인류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진통이 있었습니다. 끝까지 새로운 질서를 거부한 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못하고 저항했던 정치인이었죠. 소설에서는 수확자 '퀴리'가 백악관과 의회에 들어가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들 정치인의 목숨을 수확함으로써 구시대를 끝장냈다고 기록합니다. 어떻습니까? 흥미롭죠? 바로 닐 셔스터먼의 '수확자' 시리즈 『수확자』, 『선더헤드』, 『종소리』의 세계관입니다.
영미권에서 '영 어덜트 소설(young adult fiction)'로 불리는 작품을 챙겨서 읽습니다. 국내 출판계로 따지면 '청소년 소설'과 겹치죠. 하지만, 국내 청소년 소설은 (예외가 있긴 합니다만) (너무 낮춰본) 10대 독자의 눈높이에만 신경 쓰면서 짧은 분량, 성긴 구성, 유치한 설정 등으로 독자층을 넓히지 못하는 일이 많죠. 반면에 영미권의 영 어덜트 소설 가운데는 촘촘한 세계관, 치밀한 구성, 몰입감 넘치는 스토리텔링과 그에 맞춤한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 시리즈(『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 제이』)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영화 <배틀 로열>의 아류라고 생각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팬이 되었죠. 실제로 '헝거 게임' 시리즈는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을 위한 민주주의 토론 교재로 읽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독재와 저항,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의 긴장, 민주주의와 리더십 등의 주제부터 혁명 이후 새로운 권력의 등장과 함께 나온 '모든 혁명은 타락하는가?' 같은 질문까지 있거든요. (재기발랄한 정치학자가 『헝거 게임과 민주주의』를 써 주세요!) '수확자' 역시 '헝거 게임'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주제로 가득합니다. 우선 영화 <터미네이터>를 포함해서 수많은 곳에서 변주한 '인간을 지배하는 인공지능'이라는 구태의연한 설정을 가져오지 않아서 반갑습니다. 그 대신 지금 인공지능과 미래 사회를 놓고서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진행 중인 다양한 논의를 저자의 시선으로 재정리해서 하나의 세계관으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책의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수확자'의 존재도 흥미롭습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죽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구 자원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부분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도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언제든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서는 한국어로 '철퍽'으로 번역하는 유희를 즐기는 10대가 있습니다. 고층빌딩에서 떨어지거나 자율 주행차가 질주하는 도로로 뛰어들어 일시적으로 숨이 멎고, 신체가 곤죽이 되어도 선더헤드가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가 살려줍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철퍽'에서 살아남은 10대도 갑자기 수확자가 찾아와서 오늘 영원히 생명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타인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 수확자의 처지는 어떨까요? 오직 공동체의 규율로만 움직이는 수확자는 자기 제어가 가능할까요? 이 시리즈의 두 10대 주인공처럼 갑작스럽게 '견습 수확자'로 선정되어서 평생 타인의 목숨을 앗아갈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면 어떤 내외적 갈등에 휘말리게 될까요? 『수확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 소설은 『선더헤드』와 『종소리』에서는 문명사적 차원으로 질문을 확대해 갑니다. 이 시리즈가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 인류는 문명을 지속할 자격이 있는가?' 10대나 대학생은 물론이고 여러 세대가 함께 읽고서 토론할 거리가 넘치는 소설입니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등장하는 설정에 거부감을 가지는 순문학(?) 독자라면 편견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201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는 상을 받기 전에도 복제 인간을 등장시킨 『나를 보내지 마』(2005)를 펴낸 적이 있고, 상을 받고 나서는 인공지능 로봇을 등장시킨 『클라라와 태양』(2021)으로 자신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갔습니다. 역시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국내에도 팬이 많은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은 어떻고요. 매큐언도 2019년에 인공지능 로봇 '아담'이 등장하는 『나 같은 기계들』을 펴냈습니다. 『나 같은 기계들』에서는 로봇과 주인공 두 남녀가 삼각관계가 되고, 심지어 섹스도 합니다. 세상이 변했고, 문학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저도 완독했습니다. 과학 기술로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시대. 누구도 자연적으로는 죽지 않아 불가피하게 인구 조절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고 우주개발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갔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폭력적으로 거둬갈 것이 아니라 출산을 먼저 조절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어서 소설의 첫 번째 가정 '수확령'에 공감하기는 조금 어려웠습니다. 왜 이미 태어난 사람들에게 저런 고통을 주어야 할까? 첨단 과학 기술로 피임도 용이할 것 같은데, 타노스적인 해결책보다는 일단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저 상황에서는 더 윤리적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는 삶에서 탄생과 특히 죽음이 가진 무게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었어요. 그래서, 인상적이었고요.
실제 영원히 사는 세상이 된다면 교육, 노동, 가족 관계 등 우리 삶의 모든 행태가 많이 달라질 것 같은데 소설 속에서는 (일단 1권에서는) 그런 점이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되지는 않아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기결정권과 삶의 의미 같은 철학적 명제들까지 생각케 하는 단단한 책인 것은 분명하네요.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로 마무리합니다.
네, 그런 부분은 2권에서 아주 디테일하게 나와요. 제가 앞에서 정리 요약한 설정도 대부분 2권을 참고한 것이랍니다. 이참에 2권, 3권도 읽기를 추천드려요. :) (자꾸 책만 읽으라고 꼬십니다.)
언젠가 내 집 문을 두드리며 거둬 달라고 요청한 여자가 있었다. 나는 방문객을 쫓아 버리지 않기에, 안으로 들여서 사연을 들어 보았다. 90년 넘게 함께한 남편이 5년 전에 수확을 당했다고 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어디에 있든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했다. 남편이 어디에도 없다면, 하다못해 함께 어디에도 없고 싶어 했다. “불행한 건 아니에요. 그저……끝났어요.”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불사란 정의상으로 우리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확자가 끝내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영영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일시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감정만이 일시적이다. (…) 10년쯤 후에 그 여자와 마주쳤다. 회춘하여 20대 후반의 몸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을 예정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본 나의 현명함에 고마워했다. 감사의 인사는 정중하게 받아들였고, 잠시 동안은 그 일로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수확자 393~394쪽 ,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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