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간선언

D-29
책을 읽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글쓰기에 도움이 되고 생각의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지금은 생각과 독서, 글쓰기가 부재된 세상입니다. 외히려 여기에 뛰어들 때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문해력이 정말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긴 글은 아예 안 읽고 말초적인 동영상에만 매달리는 이상한 세상입니다. 휴대폰에 뭐가 들어 있는지, 그것만 보고 걷는 사람과 부딪칠까 봐 두려워 멀리서부터 피해다니는 세상입니다. 책을 읽고 거기서 떠오르는 자기만의 아주 소중한 생각을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그러면 아주 행복한 시간이 되고, 자기를 치유하고, 마구 가슴으로부터 자기의 위대한 희망이 꿈틀거릴 것입니다.
지금 초반을 읽고 있는데 등장인물이 많은 편이고 무슨 일본 추리소설 냄새가 많이 난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더 가보자.
바이든, 시진핑, 푸틴, 네타냐후 등 지금 세계를 뒤흔드는 것들도 알고 보면 이 지구에 별 도움도 안 되고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하는 짓거리가 지금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잘 되지도 않고 지구 폭발 같은 것도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그렇게나 많이 사람들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는데도 일본이나 한국, 미국 국민은 그렇게 죽지 않고 자기와는 직접적으로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걸 가지고 그들끼리 주물럭거린다. 나와 별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가 다루는 것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알고 보면 그런 사소한 것은 다루지 않는다. 아니면 그들의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글을 쓴다. 하여간 그들보단 작가들이 더 이 지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를 다룬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사라지면 절대 안 된다고 본다. 그들은 잘 되지도 않는 현실만 다루지만 작가는 지구와 환경, 우주, 과거와 동시에 현재, 미래를 다 다루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 일본 드라마나 소설을 자주 본다. 그들의 깨끗한 거리와 잘 지키는 기초 질서, 야행성 동물에게 해가 안 가는 적당히 어두운 밤, -아이들까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국민성- 배우들의 금방 갈아입은 것 같은 옷도 설레고 마치 중간중간에 드라마가 같은 경우,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는 것 같은 소개도 좋아하고 -그들은 글자를 마치 그림처럼 꾸미기도 한다- (그들은 일본어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고, 그래 그런지 노벨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한글을 파괴하는 우린 부러울 따름이다.) 드라마라도 꼭 일정한 공간의 무대에서 연극하는 것 같은 색다른 모습도 다 신선하게 보인다. 내용은 또 대체로 단순하고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들은 비만보단 호리호리한 사람들이 더 많다. 아마도 생선이나 채소, 발효 식품을 즐겨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들에게 덧니가 많은 것도, 일설엔 근친상간이란 말도 있지만, 아마도 그건 억센 고기보단 이런 식재료를 지금껏 먹어와 그럴 거라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일본의 자동차는 빵빵거리지 않고 -만들 필요가 없어선지 신호등도 별로 없고- 기다려주는 여유, 소형차 위주와 골목에 자동차가 주차가 안 되어 있는 모습, 안이 다 보이게 하려고 선팅을 안 한 자동차, 전통을 지키는 의복, 음식, 건물들, 또 건물이 너무 높아 숨이 막히고 바람이 불 때 계곡을 형성해 우산을 뒤집히게 하는 것 같은 고층 빌딩이-지진에 대비한 거라고 하지만 어쨌든-일본엔 적어 좋다. 보면 일본 드라마는 그 윗선인 정치를 잘 다루지 않지만 (이것도 일본의 하나의 특징 같은데, 그들은 하나의 정해진 틀을 뭉개는 걸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도 든다. 그들이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가 자기 위치를 모르고 건방지게 구는 행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 하극상이 잘 일어나지도 않고 정권이 잘 바뀌지도 않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을 코스프레하는 그들의 복장이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그들은 남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는 맘껏 자기의 끼를 발산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편으론 AV는 너무 노골적이지만, 또 연애드라마는 주인공이 손잡는 데만도 몇 회분을 금방 훌쩍 넘기기도 한다. 그 중간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검찰과 대통령실 등 그 윗선을 곧잘 다룬다. 지금은 많이 누그러진 듯하지만, 노조 활동도 왕성하고 페미니즘 등 정치적 올바름에도 국민의 관심이 들끓는다. 한국은 전에도 민란이 빈번했고 중종과 인조 같은 왕조의 반정(反正)도 곧잘 일어났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데모하는 곳 천지다. 국민성이 일본보다 더 뜨겁다는 생각이 든다. IT에 대해서도 받아들이는 게 더 빠르고, 용어도 별 이상한 신조어들이 하루가멀다하고 쏟아진다. 일본은 여권에 대해 더 소홀하고 정권이 잘 안 바뀌고 대체로 국민이 고분고분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자기의 장점을 살려 보다 더 나은 나와 세상을 꿈꾸는 것에 이걸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역시 자기만의 타고난 것을 잘 살리는 게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에게만 하늘이 고유하게 부여한 것. 그건 나도 국민도 잘 안 바뀌는 것이니까. 안 바뀌니까 그대로 받아들이고 (땅을 치며 한탄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걸로 뭘 할 건지 정하는 게 더 현명하고 더 잘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하니까.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고 그 좋아함은 남도 같이 좋아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남의 시선을 늘 의식한다. 그들이 내가 행동하는 것에 그럴만하다고 인정해주어야 하고 자신도 그들이 그렇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 여자는 이 남의 시선과 자기의 명분이 필요하다. 자기 혼자만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꼭 남의 시선이 나의 결정에 명분을 만들어 줘야 한다. 혼자만 밀고 나가는 일이 많지 않다. 아마도 사회성이 좋아 그런 것 같다. 내가 좋은 것에 남의 의견도 같으면 더 좋은 것이다. 더 남자보다 남의 시선을 더 의식한다. 이건 사회적 관계를 무시 못 하는 여자의 관계 지향형 때문인 것 같다.
잘못하면 아돌프 아이히만이 된다. 조직의 일원이 되어, 기계가 되어 그 조직의 한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가능하다. 기계니까 그런 것이다. 아이히만이 그냥 조직원 일원으로 명령대로 한 죄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바로 생각을 안 하고 산 죄이다. 인간이면 인간에게만 주어진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다. 그래 인간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 안 그러면 개돼지 소리를 듣고도 남는다. 그런 소릴 듣는 건 생각 없이 아이히만처럼 살기 때문이다. 이런 개돼지들이 인구의 90%이상을 차지한다. 나도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개돼지처럼 산다. 그냥 기계로.
사적 보복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이렇게 된 것은 법꾸라지들이 자기들만 빠져나가고 모르고 돈도 없는 서민에게만 아주 엄격하고 단호하게 법을 적용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누구도 이젠 권력의 개인 검찰도, 법의 창녀인 변호사도, 법원의 법꾸라지들도 믿지 않게 되었다. 위에서 중심을 못 잡고 그냥 기분나는대로 다스리고 생각없이 저대로된 정책도 없이 나라를 주무르니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젠 사적 보복이 더 판을 치는, 그런 드라마가 더 판을 치는 나라가 될 것이다. 법의 신뢰가 땅에 떨어져 참으로 큰일이다.
이상 실현은 어렵다 뭔가 속 터지는 사람이 순수하고 순진하게 바른길을 걷고자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못 본 체한다. 그런 순수한 사람들은 평소에 발이 넓지 않아 (너무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없는 법이다)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면 자기 말발이 서지 않는다. 인간과 그들이 만드는 세상의 속성을-간과하고 말고-제대로 안 다음 덤벼야 한다. 내가 옳은 뜻을 품었다고 모두가 내 편일 거라는 생각은 나에게 상처줄 것이고 좌절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생각이다. 뜻이 좋다고 그냥 밀고나갔다가는 제풀에 겨워 곧 무너질 것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한 다음 대들어야 한다. 그래도 될까 말까다. 큰일을 하려면 평소에 그냥 상식과 기본으로 하고(유방(劉邦)처럼 물고기가 많이 모이도록 나를 더럽히면서, 깨끗한 손으론 뭐를 해도 안 된다. 손에 똥을 묻혀야 한다) 그 초심을 잊지 말고 그 힘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래도 기득권은 꿈쩍도 대개는 안 한다. 가진 게 많은 것들은 자기 밥그릇 빼앗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그것에 일생을 걸었을 수도 있다. 누구나 일생을 건 것을 호락호락 내주지 않는다. 위태로우면 그들은 그들끼리 또 뭉친다. 이게 세상의 진면목(眞面目)이다. 솔직히 순수한 주장과 행동의 일관성은 아무것도 안 가진, 몸에 지닌 게 없는 자들만이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인간 세상이라는 게, 그들은 대개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뭘 할지 모른다는 거다. 자기의 행동 방향을 모른다. 대개는 배움이 적다. 인간과 세상을 모른다. 거기서 뭐가 중요한지 모른다. 이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실상(實相)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자기의 이상이 실현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①평소에 배워라. 그리고 ②기득권이 안 되게 몸에 뭔가를 지니지 마라. 그러는 ③동시에 흙탕물이 되어 그냥 물고기가 끼어들게 스스로 더러워져라. 너무 잘난체하지 마라. 세상 사람들을 내 이상 실현에 써먹어라. 그래도 이들도 인간인지라 배신당하는 것에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그럴 수도 있다고 가볍게 넘어가라.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 거기에 너무 힘을 쏟지 마라. 인간에 대한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다. 인간에겐 변수가 많음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내 맘 같지 않다. 내 맘대로 절대 안 된다. 인간 세상의 특징 중 하나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계획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 차라리 프로그램을 입력한, 내 호위 로봇과 함께 싸우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럼, 일반 인간은 언제 써먹나. 인간의 감정을 이용할 때다. 감정으로 인해 이는 그들의 큰 흐름을 이용할 때뿐이다. 내 뜻을 그들의 바람에 실어 나르는 것이다. 그것 외에 다른 짓을 하면 그들과 정리하느라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허비해 이상 실현도 못 하고 나가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④자신도 인간이기에 계속 각성(覺醒)해 초심(初心)을 잃지 마라. 이 4가지를 갖춰야 자기 이상을 아주 조금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실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것도 명심하라. 이렇게 이상 실현이 어렵다. 그 실현은 가상 세계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 인간들이 현실에서 못다 이룬 꿈을 가상에서나마 이루려고 현실보단 그곳에 이제 더 오래 머무는 건지도 모른다.
법으로 인간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어떤 인간 행동이라도 법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인간을 단죄하려면 법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너무 많으니까 다는 못하고 미운 놈 하나 골라 족치면 되는 것이다.
현실엔 불합리한 게 너무 많아 우리가, 지금의 민주주의를 누림에 있어 결과만 놓고 보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건 너무 잘한 일 아닌가? 누가 했더라도 해야만 했던 것을 그가 속 시원히 대신해 줬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독재가 좋은가, 자기가 가진 것을, 맘껏 발현할 수 있는 민주적 환경이 좋은가. 말할 것도 없이 후자(後者)일 것이다. 그가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독재가 끝장난 것이다. 민주 사회의 씨앗이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결과는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란 것을. 그동안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고 “이건 아닌데!”라고 속으로 끝없이 되뇌고 실은 그것과 반대인데 국민이 너무 오해를 많이 하고 그래서 더는 국민을 속이면 (국민은 실상도 모르고 영웅으로 떠받드니, 그럴 게 아니라 독재 정권이 국민을 상대로 프로파간다를 전개하면, 이 한마디만 하면 된다. “지랄하고 있네!”) 안 된다는 사명(使命) 같은 게 속에서 일었던, 겉으로 국민이 볼 때, 가장 믿었던 심복에게 그가 총살을 당했겠나? 오죽했으면 김재규가 그랬겠나? 어떻게 될지 자기의 앞날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감행했겠나? 그도 성공했다면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될 것인데 혁명 과업을, 실패했기에 영웅이 아닌 국민의 역적이 되어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그 둘과 김재규는 다를 게 하나도 실은 없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만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어쩌면 그가 자기를 희생해 가며 독재자를 처단한 것이다. 그 내부 사정(자기들끼리의 권력 암투, 인간적 모멸(侮蔑)에 대한 피의 보복)이야 모르겠고 어쨌든 그를 죽임으로써 독재가 종식되었다. 그런데 그와 그를 도운 자들을 사형시켰다. 물론 나중에 역사가 더 정확히 평가하겠지만 (아니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다르고, 그것을 이용하는 자도 있겠지만 하여간) 그는 독재를 그 총 한 방으로 끝낸 것이다. 시민과 대학생들이 부산과 마산에서 들끓으며 물러나라고 그렇게 외쳤어도 꿈쩍도 안 하던 독재 정권을 김재규의 총탄으로 1979년 10월 26일 그날부로 초개(草芥)처럼 스러져가게 된 것이다. 조직의 붕괴는 외부의 저항보단 내부의 분열로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와 가족과 나라를 위해. 어떻게 보면 우리를 위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자기 몸 하나 희생하고 간 것이다. 아마도 법이 없던 원시 시대였다면 그를 총살할 게 아니라 상을 줬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구국 영웅으로 만인이 떠받들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해 희생한 그를. 그가 누구든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그 법은 그를 죽일 수밖에 없는데도, 실은, 말이 안 된다. 현실은 인간이 궁극으로 추구하는 것과 안 맞는다. 그걸 향해서만 가야 하는데 가다 보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목격한다. 정의(正義)의 관점에서 말이 안 된다. 의식하지 않고 같이 가다 보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더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불합리하다. 모순이다. 인간 세상엔 이런 게 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걸 따르면 저것에 어긋나고 저걸 지키면 이것에 어긋나는 그런 게 실은 많다. 그것엔 또 일관성도 없다. 만든 자의 자의에 따라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법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니 인간 세상의 오묘하고 복잡함을 법으로 다 해결하고 다스릴 수 있다면 말은 오만이고 거짓이다. 법이 나이롱줄이 되게 한 건 사회 지도층과 기득권, 법꾸라지들 때문이다. 자기들만을 위해 법을 아주 십분 활용한다. 자기들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약자에게 한없이 엄격하다. 모든 인간은 또 법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냥 가만있는 사람도 법을 씌워 단죄할 수 있다. 관점에 따라 범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러니 법을 믿겠나? 그는 모두를 위해 잘했고 그러면서 모두를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했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잘할 것인데도, 그를 사형시키는 이런 세상이 과연 잘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보는가? 그래서 현재 자꾸 사적 보복이 난무하는 것이다. 실제는 그게 어려우니까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서 가상에서만이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배변(排便)하고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고자 한다. 인간이 만든 것엔 맹점이 많고 시간에 따라 변하니 믿을 건 못 된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고 그게 진리인 것 같다. 뭐든 안 변하는 게 없고 인간이 정한 것은 절대적인 건 절대 없고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거.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불안전하다는 거. 흠이 많다는 거.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시진핑이 윤석열을 이번에 안 만난 것은 너희 보수 꼴통들의 수작에 안 놀아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윤석열은 뭐하러 그렇게 외국을 드나드나? 꼭 한달에 한번은 쓸데없이 드나드는 것 같다. 그게 이미지가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니까 자꾸 써먹는 것이다. 국내에서 골치 아픈 일에 매달리는 것보다 국민과 좀 떨어져서 외국에서의 쇼를 보여줘야 뭔가 더 중요한 것을 열심히 하는 것 같으니까 그걸 십분 이용하는 것이다.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은 1도 없다. 이태원도 그렇고 국민에겐 그렇게 박하게 굴고 외국에만 잘해서 뭐하나? 그 돈으로 청년이나 극빈층에 써라. 시진핑을 죽어라 만나려는 의도가 자기는 나라를 위해 항상 몸도 마음도 쓴다, 라는 것을 순전히 보여주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 총선에 시민핑과의 정상회담 성사를 이용하려던 것이 시진핑이 그 검은 속을 알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하여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식한 정권이다.
나이 많은 남자가 오빠 소리를 좋아하는 이유 이걸 여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왜 나이 많은 아저씨가 ‘오빠’ 소릴 좋아하는지. 그런 소리는 자신은 나인 들었지만 아직은 그 소리를 하는 여자가 자기를 배 나온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가 아니라 하나의 이성(異性)으로 봐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아직은 사람이 아니라 남자라는. 남자는 늙으나 젊으나, 특히 나이가 들수록 그 본능에 충실하다. 이제 살날이 지금까지 산 것보다 적으면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걸 겉으로 의식하지 못해도 본능이고 무의식이기 때문에 자기도 잘 모른다. 따라서 오빠라는 말을 듣고 그 여자도 내 자식을 낳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어떤 희망을 말하기 때문에 오빠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남자가 실실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엔 그런 음흉한 속마음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남자는 알고 보면 모두 늑대이거나 변태다. 여자는 남자가 전체적인 바이브(Vibe), 너드(Nurd)남, 대화 상대 뭐 여러 요소로 판단할지 모르지만 남자는 모든 여자 사람을 이성적으로 끌리느냐 아니냐 자기의 이상형이나 아느냐로 분류해 버린다. 대화 코드가 맞을 것 같은가, 이런 건 그 후의 일이다. 이게 아니면 다음은 없다. 오빠 소리를 듣는 것은 남자를 설레게 만들고 약간 흥분시킨다. “난, 아직 살아 있어!” “난, 아직은 여자들에게 매력이 있어!” 하게 해서 자기 삶에 그것이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는 여자가 자기를 하나의 그냥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연애나 섹스를 할 수 있게 하는 이성으로 대해준다는 그런 의미라 자기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듣기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현타’, 여자는 절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 남자가 느끼는 그런 게 있어 오빠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소릴 남자가 듣기 좋아하니까 하는 것뿐이다. 그 여자는 절대 그 남자에게 1도 관심이나 호감이 없다. 말과 속뜻이 다른 말을 여자들은 티 내지 않고도 잘한다. 일찌감치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나는 다 잘할 수 없다. 그냥 무난하게 조용히 사는 사람, 사회에 잘 적응하며 남들처럼 사는 사람은 그럴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맞게 태어난 사람.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그러니까 못 한 것을 메꾸기 위해 자기에게 타고난 것, 주어진 것을 해야 한다. 적어도 하나는 사는 동안 이뤄야 한다. 그래야만 이 인간 세상에서 대접받고 나도 한 인간으로서 그 힘으로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이 다 하려고 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이 사회에 큰 폐(弊)를 끼친 다음에 사람들과 격리되어 남은 생을, 거기서 또는 그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살아갈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그것에 전부를 걸고 사랑하니까 그걸 못하게 막으면 그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게 그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책상에 올려놓고 절을 3번 한다. 지금도 3번 절한 후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잊으며 다음날 그 2배인 6번 절한다. 그러나 책상에 같이 돈이나 신용카드가 있으면 반드시 치운 후 절을 한다. 지갑조차 치운다. 내 고유한 의식(Ritual)이다. 절대 속물(俗物)처럼 안 되겠다는 내 의지의 발현이다. 왜 간단히 기도나 하지, 절을 하냐고 하면 기도는 아무리 해도 주님의 종이나 노예밖에 안 되지만 절은 열심히 하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한계 없이 글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를 속박하는 걸 용서 못 한다. 남들이 우습게 봐도 할 수 없다. 이미 체화(體化)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신문을 4가지 본다. 신문 다이에 내가 가져가면 1부씩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라 거기가 휑해진다. 나는 좌편인 한겨레와 경향 신문, 중도지인 한국일보, 우 편향인 중앙일보를 본다. 그리고 거기서 뭔가 중요한 내용이다 싶으면 그 부분을 인터넷 공간에 올린다. 인터넷에선 얻을 수 없는 정리된 신문사의 의견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볼펜과 메모지를 가지고 다닌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적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 외출할 때는 그러질 못하는데, 좋은 영감이 떠오르고 그걸 적지 못해 곧 휘발되기 일보 직전에 누가 감히 말을 걸어 그걸 다 잊어버렸다면 나는 순간적인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살인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잘 선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나서 다 잘하지 못한다. 그는 한 가지만 파야 한다. 그래야 무탈하게 잘살 수 있다. 살면서 뭔가 허전하다. 뭔가 늘 공허하다. 그 공허를 조금이라도 메꾸는 일은 뭔가 자기의 자산(資産)을 남기며 그 누구한테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자기의 뭔가를 남겨 그에게 기부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다. 그가 자발적으로 좋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남기는 작업을 하며 현재의 공허를 메꾸고 그 결과로서 나와 비슷한 어떤 인간에게 내 잔존물(殘存物)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것이다. 글엔 분명히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영화에서 감독판이 따로 있는 것하고 비슷하다. 오직 자신의 솔직한 기록인 글과 남에게 공개할 목적으로 다시 다듬은 글. 나는 전자(前者)를 선호한다. 남들의 글에서 전자와 같은 글에서 더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둘(허무 메우기, 잔존물) 중의 하나는 할 것이다. 부질없고 덧없음을 메꾸느냐, 나는 모르겠지만 그 누군가를 위로하며 살아갈 힘을 주는 글을 남길 것이냐. 아마도 둘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겐 안 되겠지만, 허무를 메꾸는 일도 그 누구에게 힘을 주는 일도. 그러나 안 하는 것보단 낫다. 자기의 자산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일. 그러면서 자기도 위로를 받는다. 그런 중에 자기의 자산은 더 불고 더 콸리티가 높아질 것이다. 이게 나름대로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런 걸 다 떠나서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을 잘 살기 위함이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내 글이 보다 적나라하고 솔직할지도 모른다. 나는 자의식(自意識)이 강하다. 나는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길 잘한다. 보통 살아가는 사람들과 구별되길 원한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안다. 내가 생각하는 많은 부분은 외부가 아닌 내 내부로 향하고 있다. 자의식 과잉이라도 할 수 없다. 이게 내 진짜 모습이라 이제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나는 살아야 한다. 또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크게 불만도 없다. 그렇게 살아야 살 수 있고, 그 속에서 만족하고 행복하니 이제 와서 다른 길은 없다고 본다. 다른 길은 나를 불행하게 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글은 솔직한 나 자신에 대한 기록물이다. 쓰면서 생각하고 읽고 그러면 나는 스트레스가 풀린다. 그리고는 어느 때는 큰 희열을 느끼고 행복하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보다 더 만족한다. 글에도 자기 방향이 있고 어느 부분에 흥미와 관심이 돌아 그 분야만을 자꾸 쓰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는 그런 글을 쓰고 싶은 것이고, 많이 쓰다 보면 자기만의 콘텐츠와 문체가 형성될 것이다. 내 글엔 내 속을 헤집는 내용이 많다. 나는 이런 글을 많이 쓰고 싶고 나는 그래서 그리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을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남이 읽어주길 원해 쓰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내 글은 남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고 좀 투박하고 거칠다. 조악하다. 나만 알아볼 수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며 행복하고 몰입할 때 그 어떤 것으로부터 받는 것보다 무한한 희열을 맛본다.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자는 다행이다. 상처를 받아 많은 사람은 좀 꼬여있다. 그 꼬인 것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안 풀고 그냥 있으면 남에게 위해(危害)를 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자는 적어도 남에게 위해를 잘 가하지 못한다. 적어도 남에게 폐는 안 끼치고 자기를 실현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글로 꼬인 것을 풀기 때문이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나는 다 못하기 때문에 글에 목숨을 거는 것이고 뭔가 의미 없이 살면 허전하고 나 나름대로 남겨 나와 같은 인간종에게 힘을 주고 혹시 그가 큰 좌절을 겪고 있을 때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 쓴다. 그리고 쓰면서 큰 행복과 오직 나 자신의 안녕을 위해 글을 오늘도 이렇게 마구 써대는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큰 이유로 글을 쓴다. 글에 치우침으로 해서 나머질 메꾸기 위해, 허무 극복과 의미 있는 뭔가 남겨 타인이게 도움이 됐으면 해서 글로 풀어 나를 실현하고 이 세상에 무해하기 위해.
우선 부정적인 것부터 감행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친아버지와 친오빠에게 번갈아 가며 강간당해 오빠의 애를 낳고 그 애에게 해코지해서 결국 죽인 여자는 서울대에 가서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그들은 이미 그들만의 견고한 문화와 카르텔이 있다. 그들과 섞이고 엮이면 내 불행만 더 부각될 뿐이다. 나에게 타인은 지옥이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잘 안 하는데 그들과 엮이지 않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는 처지가 비슷한 사람과 서로를 위로하는 편이 좋다. 먼저 엮이지 않는 게 우선이다. 일단은. 살아온 환경이 비슷한 사람과 살아야 그나마 가끔이라도 나는 행복하다. 거기서 남의 행복을 보고 자기만 왜 이렇게 불행한가 한탄하며 남을 살해하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몰살하는 것이다. 이걸 끊어내기가 그렇게 힘들다. 무엇으로 끊어낼까. 글로 가능할까.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과의 교류와 연대로 가능할까. 다른 인간에게 위해를 안 가하고 자기 행복을 찾으려면 그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남자와 여자 남자는 여자에게 끌린다. 여자도 그렇다. 음과 양이 서로 끌려 그러는 것 같다. 음양의 조화다. 그런데도 남자는 여자를 혐오한다. 여자도 그런 남자를 보고 혐오한다. 왜 그럴까? 왜 서로 끌리면서도 서로 왜 동시에 혐오하는 것일까? 나는 그게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다르기 때문 같다. 다르니까 서로 몰라, 알 수 없어 자꾸 끌리는 거고 그래, 다르니까 다가가서 결국 아는 것에 실패해 포기하고 혐오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끌린다. 끝없는 반복이다. 신의 조화 속이다. 서로 다르게 만들어 놓고 끌리면서 동시에 혐오하게 만들었다.
내가 안 해야 하는 것 조상이 잘못된 길을 걸어갔어도 그 힘이 내게 남아 있으며, 나는 좋은 방향으로, 정의의 방향으로, 가장 인간적으로 그 힘을 이용해 갈 수 있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내가 좋고 행복하면 끝이다. 나는 엄청 이기적이다. 나는 지구에서 모든 살아 있고 의식 있는 생물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남의 행복을 훼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짓거리는 해선 안 된다. 내가 의식 있는 다른 것의 행복을 방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듯이 남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방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최소한 여기에 살면서 그 짓은 해선 안 된다. 살아 있는 다른 것에 본능 외에 다른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그걸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르는 삶을 향해 오늘도 갈 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 사람들과 그냥 시간 가는 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신이 있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과 같은 존재인 이상(理想)을 향해 갈 것인가. 현실(現實)에만 기반을 두고 그냥 살면 뭔가 허전하다.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만들고, 이상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으니, 현실엔 완전체가 없으니 신과 이상을 만들어 그걸 떠받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은 현실을 견딜 수 없으니까 신과 이상을 만들어 그것을 향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게 아닐까? 아마도 말은 안 하지만, 아니 자기 생각을 모르겠지만 인간은 현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모르면서도 그걸 느끼니까 뭔가 계속 그리고 언제나 기댈 수 있는 것을 만들어 거기에 기대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 드라마는 아기자기한 것이 현실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가끔 이상도 이야기한다. 그것은 누구라도 현실에 젖어 실기만 하면 뭔가 빈 것 같은 공허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빈 공간을 현실에서 무엇으로 메우려는 것인데 그걸 채울 수가 없다. 채우려는 또 다른 그것을, 현실과 관련 없는 것을 정해서 그걸 채우는 과정이 인생이 아닐까? 작가는 현실이 한 25%이고 이상은 한 75% 되는 것 같다. 그들은 현실에 너무 불만족이니까 이상에 많이 치우쳐 사는 것 같다. 나도 그런 것 같다. 현실과 인간은 변한다. 잡으려고 하면 도망간다. 잡지 못하니까 안 도망가는 이상을 좇는 것인지도 모른다. 뭔가 안 도망가고 나에게 그래서 항상 위안을 주고 믿음직하고 든든한 그 무엇이, 이상 아닐까.
윤석열이 아주 고맙다 지금이 분명 적은 있지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윤석열 정권이 환경도 그렇고 노동도 여성도 약자 편이 아닌 이미 가진 자의 편만 드니까 아예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적이 없어 곤란하고 헤매고 심지어 스트레스였는데 스스로 적이 되어 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아예 대놓고 그를, 이적 행위를 비판하게 된 것이다. 이들을 살맛나게 하는 게 정치적 올바름과는 반대로 가는 윤석열 정권이다. 요즘 아주 살맛난다. 어디에 이 현실에서 오는 불만을 표출할 데가 없었는데 그가 나서서 그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으니, 쓰레기를 배설할 곳을 만들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살아갈 힘을 주는 인간이 스스로 되어 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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