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간선언

D-29
법으로 인간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어떤 인간 행동이라도 법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인간을 단죄하려면 법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너무 많으니까 다는 못하고 미운 놈 하나 골라 족치면 되는 것이다.
현실엔 불합리한 게 너무 많아 우리가, 지금의 민주주의를 누림에 있어 결과만 놓고 보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건 너무 잘한 일 아닌가? 누가 했더라도 해야만 했던 것을 그가 속 시원히 대신해 줬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독재가 좋은가, 자기가 가진 것을, 맘껏 발현할 수 있는 민주적 환경이 좋은가. 말할 것도 없이 후자(後者)일 것이다. 그가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독재가 끝장난 것이다. 민주 사회의 씨앗이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결과는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란 것을. 그동안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고 “이건 아닌데!”라고 속으로 끝없이 되뇌고 실은 그것과 반대인데 국민이 너무 오해를 많이 하고 그래서 더는 국민을 속이면 (국민은 실상도 모르고 영웅으로 떠받드니, 그럴 게 아니라 독재 정권이 국민을 상대로 프로파간다를 전개하면, 이 한마디만 하면 된다. “지랄하고 있네!”) 안 된다는 사명(使命) 같은 게 속에서 일었던, 겉으로 국민이 볼 때, 가장 믿었던 심복에게 그가 총살을 당했겠나? 오죽했으면 김재규가 그랬겠나? 어떻게 될지 자기의 앞날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감행했겠나? 그도 성공했다면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될 것인데 혁명 과업을, 실패했기에 영웅이 아닌 국민의 역적이 되어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그 둘과 김재규는 다를 게 하나도 실은 없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만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어쩌면 그가 자기를 희생해 가며 독재자를 처단한 것이다. 그 내부 사정(자기들끼리의 권력 암투, 인간적 모멸(侮蔑)에 대한 피의 보복)이야 모르겠고 어쨌든 그를 죽임으로써 독재가 종식되었다. 그런데 그와 그를 도운 자들을 사형시켰다. 물론 나중에 역사가 더 정확히 평가하겠지만 (아니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다르고, 그것을 이용하는 자도 있겠지만 하여간) 그는 독재를 그 총 한 방으로 끝낸 것이다. 시민과 대학생들이 부산과 마산에서 들끓으며 물러나라고 그렇게 외쳤어도 꿈쩍도 안 하던 독재 정권을 김재규의 총탄으로 1979년 10월 26일 그날부로 초개(草芥)처럼 스러져가게 된 것이다. 조직의 붕괴는 외부의 저항보단 내부의 분열로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와 가족과 나라를 위해. 어떻게 보면 우리를 위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자기 몸 하나 희생하고 간 것이다. 아마도 법이 없던 원시 시대였다면 그를 총살할 게 아니라 상을 줬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구국 영웅으로 만인이 떠받들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해 희생한 그를. 그가 누구든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그 법은 그를 죽일 수밖에 없는데도, 실은, 말이 안 된다. 현실은 인간이 궁극으로 추구하는 것과 안 맞는다. 그걸 향해서만 가야 하는데 가다 보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목격한다. 정의(正義)의 관점에서 말이 안 된다. 의식하지 않고 같이 가다 보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더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불합리하다. 모순이다. 인간 세상엔 이런 게 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걸 따르면 저것에 어긋나고 저걸 지키면 이것에 어긋나는 그런 게 실은 많다. 그것엔 또 일관성도 없다. 만든 자의 자의에 따라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법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니 인간 세상의 오묘하고 복잡함을 법으로 다 해결하고 다스릴 수 있다면 말은 오만이고 거짓이다. 법이 나이롱줄이 되게 한 건 사회 지도층과 기득권, 법꾸라지들 때문이다. 자기들만을 위해 법을 아주 십분 활용한다. 자기들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약자에게 한없이 엄격하다. 모든 인간은 또 법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냥 가만있는 사람도 법을 씌워 단죄할 수 있다. 관점에 따라 범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러니 법을 믿겠나? 그는 모두를 위해 잘했고 그러면서 모두를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했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잘할 것인데도, 그를 사형시키는 이런 세상이 과연 잘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보는가? 그래서 현재 자꾸 사적 보복이 난무하는 것이다. 실제는 그게 어려우니까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서 가상에서만이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배변(排便)하고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고자 한다. 인간이 만든 것엔 맹점이 많고 시간에 따라 변하니 믿을 건 못 된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고 그게 진리인 것 같다. 뭐든 안 변하는 게 없고 인간이 정한 것은 절대적인 건 절대 없고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거.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불안전하다는 거. 흠이 많다는 거.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시진핑이 윤석열을 이번에 안 만난 것은 너희 보수 꼴통들의 수작에 안 놀아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윤석열은 뭐하러 그렇게 외국을 드나드나? 꼭 한달에 한번은 쓸데없이 드나드는 것 같다. 그게 이미지가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니까 자꾸 써먹는 것이다. 국내에서 골치 아픈 일에 매달리는 것보다 국민과 좀 떨어져서 외국에서의 쇼를 보여줘야 뭔가 더 중요한 것을 열심히 하는 것 같으니까 그걸 십분 이용하는 것이다.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은 1도 없다. 이태원도 그렇고 국민에겐 그렇게 박하게 굴고 외국에만 잘해서 뭐하나? 그 돈으로 청년이나 극빈층에 써라. 시진핑을 죽어라 만나려는 의도가 자기는 나라를 위해 항상 몸도 마음도 쓴다, 라는 것을 순전히 보여주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 총선에 시민핑과의 정상회담 성사를 이용하려던 것이 시진핑이 그 검은 속을 알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하여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식한 정권이다.
나이 많은 남자가 오빠 소리를 좋아하는 이유 이걸 여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왜 나이 많은 아저씨가 ‘오빠’ 소릴 좋아하는지. 그런 소리는 자신은 나인 들었지만 아직은 그 소리를 하는 여자가 자기를 배 나온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가 아니라 하나의 이성(異性)으로 봐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아직은 사람이 아니라 남자라는. 남자는 늙으나 젊으나, 특히 나이가 들수록 그 본능에 충실하다. 이제 살날이 지금까지 산 것보다 적으면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걸 겉으로 의식하지 못해도 본능이고 무의식이기 때문에 자기도 잘 모른다. 따라서 오빠라는 말을 듣고 그 여자도 내 자식을 낳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어떤 희망을 말하기 때문에 오빠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남자가 실실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엔 그런 음흉한 속마음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남자는 알고 보면 모두 늑대이거나 변태다. 여자는 남자가 전체적인 바이브(Vibe), 너드(Nurd)남, 대화 상대 뭐 여러 요소로 판단할지 모르지만 남자는 모든 여자 사람을 이성적으로 끌리느냐 아니냐 자기의 이상형이나 아느냐로 분류해 버린다. 대화 코드가 맞을 것 같은가, 이런 건 그 후의 일이다. 이게 아니면 다음은 없다. 오빠 소리를 듣는 것은 남자를 설레게 만들고 약간 흥분시킨다. “난, 아직 살아 있어!” “난, 아직은 여자들에게 매력이 있어!” 하게 해서 자기 삶에 그것이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는 여자가 자기를 하나의 그냥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연애나 섹스를 할 수 있게 하는 이성으로 대해준다는 그런 의미라 자기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듣기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현타’, 여자는 절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 남자가 느끼는 그런 게 있어 오빠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소릴 남자가 듣기 좋아하니까 하는 것뿐이다. 그 여자는 절대 그 남자에게 1도 관심이나 호감이 없다. 말과 속뜻이 다른 말을 여자들은 티 내지 않고도 잘한다. 일찌감치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나는 다 잘할 수 없다. 그냥 무난하게 조용히 사는 사람, 사회에 잘 적응하며 남들처럼 사는 사람은 그럴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맞게 태어난 사람.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그러니까 못 한 것을 메꾸기 위해 자기에게 타고난 것, 주어진 것을 해야 한다. 적어도 하나는 사는 동안 이뤄야 한다. 그래야만 이 인간 세상에서 대접받고 나도 한 인간으로서 그 힘으로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이 다 하려고 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이 사회에 큰 폐(弊)를 끼친 다음에 사람들과 격리되어 남은 생을, 거기서 또는 그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살아갈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그것에 전부를 걸고 사랑하니까 그걸 못하게 막으면 그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게 그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책상에 올려놓고 절을 3번 한다. 지금도 3번 절한 후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잊으며 다음날 그 2배인 6번 절한다. 그러나 책상에 같이 돈이나 신용카드가 있으면 반드시 치운 후 절을 한다. 지갑조차 치운다. 내 고유한 의식(Ritual)이다. 절대 속물(俗物)처럼 안 되겠다는 내 의지의 발현이다. 왜 간단히 기도나 하지, 절을 하냐고 하면 기도는 아무리 해도 주님의 종이나 노예밖에 안 되지만 절은 열심히 하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한계 없이 글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를 속박하는 걸 용서 못 한다. 남들이 우습게 봐도 할 수 없다. 이미 체화(體化)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신문을 4가지 본다. 신문 다이에 내가 가져가면 1부씩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라 거기가 휑해진다. 나는 좌편인 한겨레와 경향 신문, 중도지인 한국일보, 우 편향인 중앙일보를 본다. 그리고 거기서 뭔가 중요한 내용이다 싶으면 그 부분을 인터넷 공간에 올린다. 인터넷에선 얻을 수 없는 정리된 신문사의 의견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볼펜과 메모지를 가지고 다닌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적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 외출할 때는 그러질 못하는데, 좋은 영감이 떠오르고 그걸 적지 못해 곧 휘발되기 일보 직전에 누가 감히 말을 걸어 그걸 다 잊어버렸다면 나는 순간적인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살인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잘 선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나서 다 잘하지 못한다. 그는 한 가지만 파야 한다. 그래야 무탈하게 잘살 수 있다. 살면서 뭔가 허전하다. 뭔가 늘 공허하다. 그 공허를 조금이라도 메꾸는 일은 뭔가 자기의 자산(資産)을 남기며 그 누구한테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자기의 뭔가를 남겨 그에게 기부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다. 그가 자발적으로 좋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남기는 작업을 하며 현재의 공허를 메꾸고 그 결과로서 나와 비슷한 어떤 인간에게 내 잔존물(殘存物)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것이다. 글엔 분명히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영화에서 감독판이 따로 있는 것하고 비슷하다. 오직 자신의 솔직한 기록인 글과 남에게 공개할 목적으로 다시 다듬은 글. 나는 전자(前者)를 선호한다. 남들의 글에서 전자와 같은 글에서 더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둘(허무 메우기, 잔존물) 중의 하나는 할 것이다. 부질없고 덧없음을 메꾸느냐, 나는 모르겠지만 그 누군가를 위로하며 살아갈 힘을 주는 글을 남길 것이냐. 아마도 둘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겐 안 되겠지만, 허무를 메꾸는 일도 그 누구에게 힘을 주는 일도. 그러나 안 하는 것보단 낫다. 자기의 자산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일. 그러면서 자기도 위로를 받는다. 그런 중에 자기의 자산은 더 불고 더 콸리티가 높아질 것이다. 이게 나름대로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런 걸 다 떠나서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을 잘 살기 위함이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내 글이 보다 적나라하고 솔직할지도 모른다. 나는 자의식(自意識)이 강하다. 나는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길 잘한다. 보통 살아가는 사람들과 구별되길 원한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안다. 내가 생각하는 많은 부분은 외부가 아닌 내 내부로 향하고 있다. 자의식 과잉이라도 할 수 없다. 이게 내 진짜 모습이라 이제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나는 살아야 한다. 또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크게 불만도 없다. 그렇게 살아야 살 수 있고, 그 속에서 만족하고 행복하니 이제 와서 다른 길은 없다고 본다. 다른 길은 나를 불행하게 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글은 솔직한 나 자신에 대한 기록물이다. 쓰면서 생각하고 읽고 그러면 나는 스트레스가 풀린다. 그리고는 어느 때는 큰 희열을 느끼고 행복하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보다 더 만족한다. 글에도 자기 방향이 있고 어느 부분에 흥미와 관심이 돌아 그 분야만을 자꾸 쓰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는 그런 글을 쓰고 싶은 것이고, 많이 쓰다 보면 자기만의 콘텐츠와 문체가 형성될 것이다. 내 글엔 내 속을 헤집는 내용이 많다. 나는 이런 글을 많이 쓰고 싶고 나는 그래서 그리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을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남이 읽어주길 원해 쓰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내 글은 남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고 좀 투박하고 거칠다. 조악하다. 나만 알아볼 수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며 행복하고 몰입할 때 그 어떤 것으로부터 받는 것보다 무한한 희열을 맛본다.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자는 다행이다. 상처를 받아 많은 사람은 좀 꼬여있다. 그 꼬인 것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안 풀고 그냥 있으면 남에게 위해(危害)를 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자는 적어도 남에게 위해를 잘 가하지 못한다. 적어도 남에게 폐는 안 끼치고 자기를 실현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글로 꼬인 것을 풀기 때문이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나는 다 못하기 때문에 글에 목숨을 거는 것이고 뭔가 의미 없이 살면 허전하고 나 나름대로 남겨 나와 같은 인간종에게 힘을 주고 혹시 그가 큰 좌절을 겪고 있을 때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 쓴다. 그리고 쓰면서 큰 행복과 오직 나 자신의 안녕을 위해 글을 오늘도 이렇게 마구 써대는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큰 이유로 글을 쓴다. 글에 치우침으로 해서 나머질 메꾸기 위해, 허무 극복과 의미 있는 뭔가 남겨 타인이게 도움이 됐으면 해서 글로 풀어 나를 실현하고 이 세상에 무해하기 위해.
우선 부정적인 것부터 감행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친아버지와 친오빠에게 번갈아 가며 강간당해 오빠의 애를 낳고 그 애에게 해코지해서 결국 죽인 여자는 서울대에 가서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그들은 이미 그들만의 견고한 문화와 카르텔이 있다. 그들과 섞이고 엮이면 내 불행만 더 부각될 뿐이다. 나에게 타인은 지옥이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잘 안 하는데 그들과 엮이지 않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는 처지가 비슷한 사람과 서로를 위로하는 편이 좋다. 먼저 엮이지 않는 게 우선이다. 일단은. 살아온 환경이 비슷한 사람과 살아야 그나마 가끔이라도 나는 행복하다. 거기서 남의 행복을 보고 자기만 왜 이렇게 불행한가 한탄하며 남을 살해하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몰살하는 것이다. 이걸 끊어내기가 그렇게 힘들다. 무엇으로 끊어낼까. 글로 가능할까.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과의 교류와 연대로 가능할까. 다른 인간에게 위해를 안 가하고 자기 행복을 찾으려면 그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남자와 여자 남자는 여자에게 끌린다. 여자도 그렇다. 음과 양이 서로 끌려 그러는 것 같다. 음양의 조화다. 그런데도 남자는 여자를 혐오한다. 여자도 그런 남자를 보고 혐오한다. 왜 그럴까? 왜 서로 끌리면서도 서로 왜 동시에 혐오하는 것일까? 나는 그게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다르기 때문 같다. 다르니까 서로 몰라, 알 수 없어 자꾸 끌리는 거고 그래, 다르니까 다가가서 결국 아는 것에 실패해 포기하고 혐오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끌린다. 끝없는 반복이다. 신의 조화 속이다. 서로 다르게 만들어 놓고 끌리면서 동시에 혐오하게 만들었다.
내가 안 해야 하는 것 조상이 잘못된 길을 걸어갔어도 그 힘이 내게 남아 있으며, 나는 좋은 방향으로, 정의의 방향으로, 가장 인간적으로 그 힘을 이용해 갈 수 있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내가 좋고 행복하면 끝이다. 나는 엄청 이기적이다. 나는 지구에서 모든 살아 있고 의식 있는 생물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남의 행복을 훼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짓거리는 해선 안 된다. 내가 의식 있는 다른 것의 행복을 방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듯이 남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방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최소한 여기에 살면서 그 짓은 해선 안 된다. 살아 있는 다른 것에 본능 외에 다른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그걸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르는 삶을 향해 오늘도 갈 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 사람들과 그냥 시간 가는 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신이 있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과 같은 존재인 이상(理想)을 향해 갈 것인가. 현실(現實)에만 기반을 두고 그냥 살면 뭔가 허전하다.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만들고, 이상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으니, 현실엔 완전체가 없으니 신과 이상을 만들어 그걸 떠받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은 현실을 견딜 수 없으니까 신과 이상을 만들어 그것을 향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게 아닐까? 아마도 말은 안 하지만, 아니 자기 생각을 모르겠지만 인간은 현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모르면서도 그걸 느끼니까 뭔가 계속 그리고 언제나 기댈 수 있는 것을 만들어 거기에 기대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 드라마는 아기자기한 것이 현실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가끔 이상도 이야기한다. 그것은 누구라도 현실에 젖어 실기만 하면 뭔가 빈 것 같은 공허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빈 공간을 현실에서 무엇으로 메우려는 것인데 그걸 채울 수가 없다. 채우려는 또 다른 그것을, 현실과 관련 없는 것을 정해서 그걸 채우는 과정이 인생이 아닐까? 작가는 현실이 한 25%이고 이상은 한 75% 되는 것 같다. 그들은 현실에 너무 불만족이니까 이상에 많이 치우쳐 사는 것 같다. 나도 그런 것 같다. 현실과 인간은 변한다. 잡으려고 하면 도망간다. 잡지 못하니까 안 도망가는 이상을 좇는 것인지도 모른다. 뭔가 안 도망가고 나에게 그래서 항상 위안을 주고 믿음직하고 든든한 그 무엇이, 이상 아닐까.
윤석열이 아주 고맙다 지금이 분명 적은 있지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윤석열 정권이 환경도 그렇고 노동도 여성도 약자 편이 아닌 이미 가진 자의 편만 드니까 아예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적이 없어 곤란하고 헤매고 심지어 스트레스였는데 스스로 적이 되어 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아예 대놓고 그를, 이적 행위를 비판하게 된 것이다. 이들을 살맛나게 하는 게 정치적 올바름과는 반대로 가는 윤석열 정권이다. 요즘 아주 살맛난다. 어디에 이 현실에서 오는 불만을 표출할 데가 없었는데 그가 나서서 그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으니, 쓰레기를 배설할 곳을 만들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살아갈 힘을 주는 인간이 스스로 되어 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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