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블로그
글 쓰기
앤설로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자이언트북스)

앤솔로지를 읽고 만족한 기억이 별로 없다.

불만족의 가장 큰 이유는 고르지 못한 수록 작품의 질 때문이다.

수록 작품 모두가 마음에 들 순 없겠지만, 가끔 함정 같은 작품이 튀어나오면 읽다가 김이 샌다.

이미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김초엽 작가의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 천선란 작가의 '뼈의 기록' 정도만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작품은 기발한 소재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웠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의 톤과 리듬을 맞췄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고민 없이 스낵처럼 즐기기엔 부담 없는 앤솔로지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김홍 장편소설 『엉엉』(민음사)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문제는 주인공이 무지개 연못에 사는 개구리 소년도 아닌데, 울기만 하면 전국에 폭우가 내리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여기에 금속 내골격과 액체 금속 외피가 별개의 개체로 움직이는 터미네이터 Rev-9처럼 주인공의 본체는 따로 존재하고, 백종원으로 추정되는 이는 홍길동처럼 전국 곳곳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다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고양이는 말을 할 줄 아는 쿠팡맨이다.

얌체공이 인조 대리석 바닥에서 튀듯, 예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끔 뭔가 잃어버린 것 같긴 한데 무엇을 잃어버린지 몰라 혼란스럽고 슬퍼질 때가 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자신이 껍데기 같고.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문득 그런 답 없는 센치한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날이 있다.

운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지만, 그래도 엉엉 울면 기분은 좀 개운해지지 않던가.

우는데 무슨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읽다가 중간에 "이게 뭔 시추에이션?"하며 갸우뚱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나 또한 내게 없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부러워 해왔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는 녀석, 잘 생기고 키가 커서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 녀석, 돈 많은 녀석, 집안 좋은 녀석, 일 잘하는 녀석, 기가 막히게 운 좋은 녀석...

세상에 왜 이렇게 부러운 녀석이 많지?


소설가로 사는 지금의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성석제, 박상처럼 유머와 페이소스를 잘 표현하는 작가다.

미문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데, 웃픈 문장은 이상하게 볼 때마다 부럽더라.

이건 따라 하고 싶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 차례 웃픈 소설을 쓰려고 시도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내가 자전거를 다룬 장편소설 <되면 한다>(가제) 집필을 중단한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다.


작년에 읽었던 작가의 전작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는 내가 한 번쯤은 구사해보고 싶었던 문장을 가득 담은 소설집이었다.

이 장편소설 역시 낯설고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엉엉
엉엉
정지향 소설집 『토요일의 특별활동』(문학동네)

사놓고 깜빡한 채 읽지 않았던 책을 꺼내 읽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주인공은 대부분 예술을 전공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에 걸쳐 있는 여성이고, 위태로워 보이는 연애 이야기가 서사의 주를 이룬다.

20세기 말에 남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예술과 먼 전공(법학, 컴퓨터공학)을 한 40대 중년 남자인 나는, 멋쩍게 낯선 세계를 몰래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 나이대는 성별과 상관 없이 인간적인 호감과 이성으로서의 끌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지 않던가.

이 소설집은 그 시절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특히 플러팅과 가스라이팅에 관한 묘사가 상당히 적나라하다.

'베이비 그루피' 같은 단편이 그랬다.

몇 년 동안 음악기자로 일하며 홍대 앞을 자주 드나들었고, 클럽이나 술자리에서 팬과 사귀는 아티스트를 꽤 많이 목격했다. 

갑과 을이 명확한(갑은 늘 아티스트다) 그리 아름답진 않은 관계가 많았는데, 내가 봤던 풍경이 소설에 실감 나게 묘사돼 있어 꽤 놀랐다.


아무래도 나는 학생 신분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전반부보다는 사회에서 밥벌이하는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후반부를 더 공감하며 읽었다.

발랄한 느낌을 주는 표지만 보고 달려들면 꽤 무거운 내용에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토요일의 특별활동
토요일의 특별활동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현대지성, 김운찬 옮김)

학창 시절에 무턱대고 읽다가 버티지 못하고 포기한 고전이다.

고전을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오디오북으로 며칠 동안 들었는데 와...

이렇게 좋은 책이었다니.


성우가 존댓말로 내용을 읽어주고 각 챕터마다 중세풍의 BGM이 울리니, 마치 내가 당대 이탈리아의 메디치가 귀족이 돼 신하의 조언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

만약 이 책을 종이책으로 읽었다면 이런 감흥까진 없었을 것 같다.

내용이 대단히 현대적이어서 500년 전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책의 내용을 참고해 오늘날 정치에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이 유명한 이유는 필요에 따라 잔혹하고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파격적인 주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단과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정적을 대상으로만 써야 하며, 그 결과는 반드시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고, 절대 지속해 행사해선 안 된다는 점을 학창 시절엔 배우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조언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조언이 이 책의 핵심인데 말이다.

이걸 못해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정부와 대통령이 지금까지 없었구나.

보국안민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더라.

이 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오랫동안 했던 오해를 이제야 풀었다.


제17장 '잔인함과 자비로움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받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나은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는 몇 번이나 돌려 들었을 정도로 압권이었다.

이왕이면 사랑을 받는 게 좋은데, 그럴 수 없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안전하고, 다만 증오의 대상이 되는 건 피해야 한다는 가르침.

평생 머릿속에 남을 가르침이었다.


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김유담 장편소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창비)

취업 준비 과정이란 게 언제 어디서 내릴지 모른 채 2호선 순환열차를 타고 뱅뱅 도는 일과 비슷하다.

괜찮은 일자리는 적고, 그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전공과 적성을 살리는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꿈과 이상만 좇다간 밥을 굶기 십상이니, 거지꼴을 면하려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회사라는 조직은 직원에게서 월급 이상을 빼먹으려고 달려드는데, 직원은 일에서 밥벌이 외엔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니 말이다.

취업 빙하기인데도 매년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점점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10여 년 동안 몇몇 직장을 경험하고 깨달은 사실은, 직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직원이라는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과연 대한민국에 직원의 개성과 자율을 반기는 조직이 있는지 의문이다.

대체할 수 없는 직원의 존재는 조직의 갑이라는 지위를 흔들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몸통을 흔드는 꼬리를 곱게 바라보는 조직을 본 일이 없다.


그래.

조직이 갑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치자.

그냥 일만 시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일 외에도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지뢰처럼 튀어나온다.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쓸데없는 업무 프로세스가 많고, 그런 예쁜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직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욱여 넣고 출근해 피곤한데, 진상들에 머리를 조아리고 온갖 갑질과 꼰대질을 참아내야 하고, 성과를 내놓으라는 압박은 기본 옵션이다.

직장이라는 조직은 화려한 조명도, 환호하는 관객도 없는 어둡고 살벌한 무대다.


“등장하자마자 퇴장하고 싶은 무대에 선 기분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공감한 문장으로, 주인공이 직장에 출근하며 느낀 심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연극배우가 꿈이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판사 직원으로 취직한 20대 여성이다.

작가는 대학 시절에 연극에 매달렸던 과거의 주인공과 회사원인 현재의 주인공을 번갈아 보여주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의 고단한 일상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혹시 CCTV로 우리 회사를 엿본 거 아냐?", "내 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기록한 거 아냐?"라는 반응을 보이는 독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주인공의 선택은 자신을 회사라는 무대에 오른 배우라고 여기며 버티는 거다.

이렇게 말을 늘어놓으니 우울한 작품 같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톤은 내용과 반대로 따뜻하고 유쾌하다.

원고량이 상당하지만 가독성이 훌륭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예측이나 희망대로 이뤄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문방구 주인이었고 사춘기 땐 로커를 꿈꿨는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전공과 상관없는 기자로 일했고, 급기야 마흔에 퇴사해 소설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창 시절에 적성 검사를 하면 늘 기술자나 농부가 나왔는데, 단 한 번도 검사 결과와 어울리는 밥벌이를 해보진 못했다.

지금까지 결과만 보자면 나는 장래 희망도 전공도 적성도 전혀 못 살린 채 여기까지 온 셈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어느 곳에 속해 있든 내 머릿속엔 늘 딴생각만 가득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학창 시절엔 기타를 만졌고, 전공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다른 전공 과목을 들었고, 기자로 일하던 시절엔 다른 밥벌이는 없나 늘 한눈을 팔았고, 소설을 쓰는 요즘에는 콘텐츠 사업으로 돈을 벌 방법이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아무튼 지금 나는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기다리며 여기저기 영역 표시를 하는 중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의미심장하다.

희곡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지만, 그들은 '고도'가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뭔지 모른다고 말했다지?

그런데도 노벨문학상을 탔다.


삶이란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데, 그 무언가의 정체도 모른 채 지나쳐버리는 일상의 연속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게 최선이 아닐까.

'고도'를 찾지 못하고 삶을 마쳐도,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
커튼콜은 사양할게요
이경혜 산문집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보리)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일기를 쓴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일기 쓰기에 흥미를 잃은 이유는 일기가 숙제였기 때문이다.

쓰지 않으면 교사에게 혼나고, 썼어도 교사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나는 숙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 내가 겪었던 교사 중엔 인격 파탄자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사람이 꽤 많았다.

나는 오늘날 교권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학창 시절에 개차반인 교사를 경험한 학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공부에 재미를 느낀 때는 도서관에서 혼자 3수를 준비할 때였다.

학교는 희한하게 재미있는 걸 재미없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공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일기의 가치를 느끼게 된 계기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 때문이다.

16년 전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

당시 유품 대부분을 태우거나 버렸는데, 일기장만큼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생생한 흔적이 담겨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차마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일기장을 오랜 세월 책꽂이에 꽂아둔 채 외면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 겨우 빠져나오고 있는데, 그걸 보면 다시 슬픔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제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일기장을 펼칠 용기가 났다.

그 속에는 내가 아는 ‘어머니’가 아니라 낯선 ‘여자’가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통해 19살부터 45살까지의 어머니를 만났다.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와 가까워진 나는 한 ‘여자’로서의 어머니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를 썼다.

만약 어머니의 일기장을 버렸다면, 그 일기장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오해하며 살았을 테다.


잡설이 길었는데, 이 산문집에 관한 감상으로는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작가는 13살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150권이 넘는 일기장에 꾸준히 일기를 써 왔다.

이 산문집은 작가가 평생 써 온 일기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의 일기도 일부 발췌돼 담겨 있지만, 주된 내용은 작가가 경험한 일기 쓰기의 즐거움이다.

일기 속에서 작가는 온전히 주인공이다.

작가에게 일기장은 펼치면 언제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고,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나로 살 수 있게 지탱해주는 든든한 친구다.

이 산문집을 읽는 내내 어머니의 일기장이 페이지에 겹쳐 보였다.

어머니에게도 일기장은 그런 존재였던 거다.


완독 후에 나도 일기를 꽤 오래 써왔음을 깨닫게 됐다.

작가에 따르면 아무때나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면 그게 일기다.

그렇다면 내가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오랫동안 끼적여 온 많은 글도 일기인 셈이다.

끼적인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돼 있으니 이보다 확실한 일기가 없다.

그곳에 내가 끼적인 글을 시간순으로 살펴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꽤 많이 변했음을 알았다.


쓰는 데 의무감이나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매일 써도, 몇 달에 한 번 써도 상관없으니 진실하게만 쓰라고.

진실하게 쓰는 것이 일기의 전부라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산문집이었다.

정말 잘 읽었다.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나와 오롯이 만나는 시간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나와 오롯이 만나는 시간
안윤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한국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배경은 중앙아시아 지역인 키르기스스탄이고 등장인물은 현지인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정취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고, 이를 다루는 문장이 섬세하고 우아하다.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데,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낯설어 신선했다.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젊은 작가이고, 심지어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장편이라니.

많이 놀랐다.


이 작품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한국인 '윤'이 현지 하숙집 주인의 부고를 전해 듣고, 그로부터 수양딸의 유품인 공책을 전달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윤'이 공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내용의 연속인데, 따로 '윤'의 코멘트가 더해지지 않아 읽다 보면 공책의 주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으로 살지 못한 채 늙고 병들어 사라질지라도, 누군가에게 이야기로 기록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먼 나라에 도착한 공책이 생명력을 얻으며 전하는 메시지다.


돌이켜보니 나를 가장 많이 바뀌게 한 계기는 갑작스러운 이별들이었다.

책을 덮으며 지난 이별들의 의미와 그 이별들이 내게 남긴 게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내 이별은 늘 갑작스러웠고, 나는 제대로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소설, 특히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를 쓴 뒤에야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초고 집필을 마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죽을 때 얼마나 많은 이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 이름은 과연 얼마나 많은 이의 마지막 기억에 남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가슴이 뻐근했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김원우 장편소설 『크리스마스 인터내셔널』(아작)

우선 작품의 설정부터 살펴보자.

느닷없이 광화문 광장에 우주선이 불시착한다.

자몽을 닮은 외계인이 우주선에서 나와 한국어로 구성된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한마디를 남긴 후 침묵한다.

군이 광장을 통제하는 가운데, 우주선과 외계인을 연구하기 위해 여러 분야 전문가가 모여 머리를 맞대지만, 딱히 소득은 없다.

그러던 중 자몽 전문가인 전직 아이돌 걸그룹 멤버, 물리학자 출신 신부, 허당인 천체물리학자 교수가 광장에 전문가랍시고 모이고 여기에 유명 북튜버 소녀, 어린 시절에 과학자를 꿈꿨던 공무원이 끼어든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전혀 예상되지 않는 골때리는 설정 아닌가?

우주선이 불시착했든 말든 대한민국 국민의 일상은 평온하고, 외계인과 지구인의 충돌도 없다.

소소한 인물들이 외계인이나 우주선을 다룬 SF에서 흔히 보이는 이런저런 클리셰를 비껴가며 소소하게 좌충우돌하는 활극이 유쾌했다.

읽는 내내 웃기고 시끄러웠다.

파편처럼 흩어진 뜬금없는 이야기가 많아 어떻게 끝을 맺을지 불안했는데, 큰 무리 없이 이야기를 잘 모아 매듭을 짓는다.

정교한 서사나 개연성, 무게감 있는 주제를 기대한다면 난감할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식힐 만한 가볍고 가독성이 좋은 장편소설을 찾는다면, 이 작품은 괜찮은 선택이다.

나는 이 작품을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다.


크리스마스 인터내셔널
크리스마스 인터내셔널
이희영 장편소설 『테스터』(허블)

이 작품은 멸종된 동물을 복원했다가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까지 함께 복원돼 벌어지는 심각한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을 다룬다.

이쯤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전이 과연 인류에게 옳은 일인지 묻는다.

치밀하게 쌓아 올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터트리는 반전이 놀라웠다.

정말 많이 놀라서 몇 차례나 반복해 반전 부분을 읽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작가는 이 반전을 쓰며 엄청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전이 계급 사회를 공고하게 만들고,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희생양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불쏘시개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담긴 문장은 마치 묵시록처럼 읽혔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세상이 더 좋아진다면, 당연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게 인간이다. 그 누군가가 자신이 아니어야 한다는 절대적 조건하에서 말이다."(253페이지)


자연스럽게 코로나 펜데믹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었다.

펜데믹 이후 코로나 예방과 치료를 위한 많은 의약품 개발이 이뤄졌다.

하지만 어떻게 개발이 이뤄졌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동물 실험이 이뤄졌을 것이다.

이에 관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을 테다.

하지만 내 가족의 목숨이 달려있는데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동물이 아닌 인간을 실험 대상을 삼는다고 해도?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무겁고 이를 펼쳐내는 서사가 쓸쓸해 책을 덮은 뒤 여운이 길었다.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이 서글펐다.

그런 선택 외엔 방법이 없었느냐고 따져 묻고 싶다가도, 그런 선택 외엔 방법이 없었겠다며 공감하기도 했다.


굳이 이 작품에 '청소년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뭔가 '청소년 소설'스러운 표지 디자인과 타이틀이 독자 범위를 줄이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히트 작가의 신작인데 괜한 우려인가?

청소년 소설, SF소설이라는 범주에 묶을 필요 없이 그저 훌륭한 장편소설이었다.

테스터
테스터
홍종의 동화 『고인돌나라 소년 전사』(기역)

이 작품은 세계적인 고인돌 밀집 지역인 고창을 배경으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가 교차하는 혼란기를 그린다.

누가 먼저 강한 무기를 손에 넣느냐에 따라 무리의 운명이 정해지는 절체절명의 시대.

역사 이래 늘 그래왔듯이 전쟁은 약자에게 잔혹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어린 소년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에 끌려가 척후병 역할을 맡고 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인 곳에선 으레 편 가르기가 벌어지고, 혼란의 강도에 비례해 갈등의 폭도 커진다.

주인공이 사는 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대부분 상호 이익 간의 충돌이다.

노사갈등을 예로 들어보겠다.

노동자 측은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사측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임금과 복지를 쟁취하려 투쟁하고, 사측은 인건비를 가능한 한 줄이면서 매출을 늘리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그런 이익의 충돌을 조절해 균형을 맞추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우리는 싫든 좋든 의견이 다른 사람과 공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를 선악 구도 프레임에 집어넣어 한쪽을 악으로 만드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진다.

멀리 가서 실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퇴임 전까지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는데도, 민주당이 정권을 내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의견이 다른 세력을 오가며 절충안을 끌어내려 애를 쓴다.

독자인 아이들은 맑은 눈으로 정치가 나아가야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될 테다.

동화는 종종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좋다.


고인돌나라 소년 전사
고인돌나라 소년 전사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495051525354555657585960616263646566676869707172737475767778798081828384858687888990919293949596979899100101102103104105106107108109110111112113114115116117118119120121122123124125126127128129130131132133134135136137138139140141142143144145146147148149150151152153154155156157158159160161162163164165166167168169170171172173174175176177178179180181182183184185186187188189190191192193194195196197198199200201202203204205206207208209210211212213214215216217218219220221222223224225226227228229230231232233234235236237238239240241242243244245246247248249250251252253254255256257258259260261262263264265266267268269270271272273274275276277278279280281282283284285286287288289290291292293294295296297298299300301302303304305306307308309310311312313314315316317318319320321322323324325326327328329330331332333334335336337338339340341342343344345346347348349350351352353354355356357358359360361362363364365366367368369370371
[책 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김영사/책증정]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닥터프렌즈의 오마이갓 세계사>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1. 속도의 안내자⭐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박소해의 장르살롱] 15. 경계 없는 작가 무경의 세 가지 경계 [책증정]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함께 읽어요 [북토크/책 증정]경제경영도서 <소비 본능>같이 읽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중간 참여할 수 있어요!
🎬 독립 영화 보고 이야기해요.
[인디온감] 독립영화 함께 감상하기 #1. 도시와 고독[그믐무비클럽] 5. 디어 라이프 with 서울독립영화제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조영주 작가가 고른 재미있는 한국 소설들
[책증정]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함께 읽어요 차무진 작가와 귀주대첩을 다룬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을 함께 읽어요최하나 작가와 <반짝반짝 샛별야학>을 함께 읽어요.
6인의 평론가들이 주목한 이 계절의 소설!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1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2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 있던 이 책, 망나니누나와 함께 되살려봐요.
[Re:Fresh] 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시 읽어요. [Re:Fresh] 1. 『원미동 사람들』 다시 읽어요.
이런 주제로도 독서모임이?
혹시 필사 좋아하세요?문학편식쟁이의 수학공부! 50일 수학(상) 함께 풀어요.스몰 색채 워크샵
어서 오세요. 연극 보고 이야기하는 모임은 처음이시죠?
[그믐연뮤클럽의 서막 & 도박사 번외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그믐밤] 10. 도박사 3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수북강녕
⏰ 그믐 라이브 채팅 : 5월 16일 목요일 저녁 7시, 편지가게 글월 사장님과 함께
[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
🐷 꿀돼지님의 꿀같은 독서 기록들
권여선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수전 팔루디 『다크룸』(아르테)최현숙 『할매의 탄생』(글항아리)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 봄, 시집 한 권 🌿🌷
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2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0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9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8
모집중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