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블로그
글 쓰기
서정주 시집 『화사집』(은행나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자화상' 중)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뚱아리냐"('화사' 중)

"해와 하늘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문둥이' 전문)

"아스럼 눈 감었든 내 넋의 시골/별 생각나듯 돌아오는 사투리."('수대동 시' 중)


시를 읽을 줄 모르는 나도 이 시집에 실린 시어의 감각이 얼마나 탁월한지 알겠다.

나온 지 80년도 넘은 시집인데 구리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디 이 시집에 실린 시뿐인가.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라던 '견우의 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던 '푸르른 날',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던 '추천사' 등...


아주 오래된 시집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방 크게 얻어맞았다.

그렇다고 '마쓰이 오장 송가'나 전두환 생일 기념시 '처음으로'까지 아름답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화사집 - 서정주 시집
화사집 - 서정주 시집
김경순 장편소설 『장미총을 쏴라』(은행나무)

추리소설 작가가 예술 작품을 닮은 오래된 총을 둘러싼 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이 작품의 큰 줄기다.

이야기는 총기 전문 잡지 인턴기자가 사장과 차장을 사살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정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인터넷 카페, 과거에 근무했던 직원의 의문사, 의문사와 관련 있는 외부인, 잡지사 직원들의 수상한 행보가 가지를 뻗어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구조가 복잡하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매력적이었다.

이야기가 끝이 보이는데도, 어떻게 끝날지 예상이 되지 않아 흥미로웠다.

예상이 모두 처참하게 빗나가 당황스럽기도 했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마치 어려운 퍼즐을 맞추는 듯해 퍼즐의 모양이 어떻게 완성될지 읽는 내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작품 초반에 패를 까고 시작한 터라 정해진 결론을 향해 나아갈 줄 알았는데, 막판에 뒤통수를 정말 세게 맞았다.

여기에 대한민국 문학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총기 합법화 논의, 인간 내면의 폭력성, 친일파 청산 문제 등 묵직한 소재가 절묘하게 엮여 있어 사회파 소설 성격도 상당히 가지고 있다.

메시지의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 장르 소설의 재미를 잡은, 낯설고 개성 있는 작품이었다.

장미총을 쏴라 - 제8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장미총을 쏴라 - 제8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문구 장편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북인)

읽는 내내 술 냄새가 진동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강원도의 허름한 바닷가 술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은퇴 후 노년으로 접어든 주인공이 그의 생을 잘 아는 미스테리한 청년과 예고 없이 술집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가 이 작품을 이끄는 물줄기다.

물줄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고, 청년은 연대기 순으로 주인공의 생을 흔들었던 사건에 닻을 내린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생존이라는 핑계로 묻어뒀던 아픈 기억과 시대상이 선명하게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와 직면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빌릴 가장 쉬운 방법은 술 아니겠나.

깨어나면 후회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 작품의 전면에 흐르는 정서는 변방의식과 회한이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한다.

수도권 과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현실이 있다.

여전히 인구 나머지 절반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작품은 50년대 삼척에서 태어나 70년대 강릉에서 대학에 다닌 주인공을 통해 당대에 서울이 지방에 미친 영향과 지방이 서울을 바라보는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70년대와 80년대 현대사의 비극이 지방에 사는 청년과 이어지는 과정을 아프게 들여다본다.


이 작품은 나보다 한 세대 전의 역사를 다루지만 낯설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은 대부분 서울이고, 중앙언론사는 물론 지방언론사까지도 서울 소식을 지방 소식보다 비중 있게 전한다.

이 때문에 지방에 살면서도 지방의 현실에 어두워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온라인상에서 이뤄지는 담론을 살펴봐도 지방의 현실을 다루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지방에도 수도권 못지않게 많은 청년이 살고 있지만, 파편화돼 흩어져 있어 힘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이 반복되다 보니 뭘 해도 안 된다는 패배의식이 내면에 쌓인다.

지방공동화가 가속화되는 이유다.


이 작품의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머릿속에 기시감이 맴돌았다.

내가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일하며 보고 느꼈던 감정이니까.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묵직한 작품이었다.

강릉, 겨울 그림자
강릉, 겨울 그림자
서동원 장편소설 『달 드링크 서점』(문학수첩)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만약 그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 작품에 실린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를 변주하며 던지는 질문이다.


이 작품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처럼 옴니버스 형식으로 생활 밀착형 이야기를 전개한다.

완전한 허구의 장소를 배경으로 다루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달리, <불편한 편의점>처럼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장소를 배경으로 다뤄 현실감을 높인다는 게 이 작품의 개성이다. 

에피소드 전체에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인 바텐더 '문'과 달 토끼 '보름'의 로맨스가 드러날 듯 말듯 은은하게 깔려 있어 이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사람, 성공만 보고 달리다가 연인을 놓친 사람, 밥벌이에 매달리다가 꿈을 잊은 사람 등.

이 작품 속 등장인물은 우연에 이끌려 바에 들렀다가 바텐더가 만든 기묘한 칵테일을 마시며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을 만난다.

이 작품을 등장인물이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먼치킨이 되는 회귀물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등장인물의 선택은 종종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뤄지는데, 그 결말이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현실적이다.


회귀물이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 사회가 낙오자에게 패자부활전을 치를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소설,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과거를 되돌려 인생을 바꾸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대리만족의 발현.

하지만 그 끝은 대체로 '현타'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현실은 '아 씨발 꿈' 그대로이니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책을 덮었을 때 "내가 만약 작품 속 등장인물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좋은 소설이었다.

달 드링크 서점
달 드링크 서점
김의경 산문집 『생활이라는 계절』(책나물)

이 산문집에 실린 글 상당수는 구면이다.

나는 작가가 국민일보에 연재했던 이 책의 프로토타입을 인상 깊게 읽었다.

글이 모이면 단행본으로 엮이겠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렇게 됐다.


콜센터에서 힘겹게 일하다가 신춘문예 당선 연락을 받은 순간.

개인파산과 개인회생 때문에 흩어졌던 가족과 재회한 놀이공원.

셀프빨래방에 남긴 메모에 댓글로 달린 메모. 

앓아누운 작가에게 시루떡을 가져다주는 고시원 옆방 언니.

손톱에 봉숭아 꽃잎 물을 들이는 할머니.

명절에도 가게 문을 열고 고향에 가지 못하는 손님을 기다리는 분식집 아줌마, 

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마치 밥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골목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서와 상관없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상관없지만, 가능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하는 게 좋다.

이 산문집은 제목처럼 계절 순서대로 글을 엮었고, 봄-여름-가을-겨울-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감이 살아있다.

매년 계절이 돌아오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글의 연속이다.

작가가 거쳐온 삶 중에 나와 겹치는 부분(특히 열악한 주거환경)도 꽤 있어서 원고지 5매 분량의 짧은 글인데도 몰입하기 쉬웠다.

가난이 글의 주된 소재이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가난하지 않다는 점이 이 책의 힘이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단단하다.


소설 쓰기는 철저히 혼자 하는 작업이다.

사실 이런 형태의 작업이 내 성격에 맞긴 하다.

기자로 일했던 시절에 가장 힘들었던 건 누군가에게 수시로 연락하고 만나는 일이었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철저히 본성을 숨기고 살았다.

요즘 표현으로 I인데 E처럼 살았다고 말하면 적절하려나?

내 낯가림이 엄청나게 심하다는 걸 함께 사는 가족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하고 사람을 만나면 기가 빨리는 터라 숨어 사는 중인데, 기자 시절 경험 덕분에 소설을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문제는 그렇게 혼자 있다 보면 잡생각이 많아진다는 거다.

작업이라도 잘 되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불안감이 쌓인다.

하지만 작업이 잘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다른 소설가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펼쳤는데, 2023년에 처음 읽는 책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지나간 일상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빌드업의 시간이었다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생활이라는 계절
생활이라는 계절
김예은 장편소설 『수상한 초콜릿 가게』(서랍의날씨)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초콜릿을 처방전으로 내주는 가게.

제목은 수상하지만 내용은 전혀 수상하지 않다.

다양한 형태의 짝사랑 사연이 뻔하고 유치하지만, 공감하지 않기가 어렵다.

사랑하고 있거나 했었다면, 이 작품에 실린 짝사랑 사연 중에 자기 경험과 비슷한 사연 하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은근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가장 밟힌다.

주인공이 손님에게 사랑했던 과거를 예쁘게 잊는 법이라며 전하는 처방전이다.


"그 사람이 여전히 좋은 거라면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 돼요. 근데 그때 함께했던 사랑이 여전히 그리운 거라면,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돼요."


이 작품은 이미 해외에 판권이 팔렸고, 국내에서도 몇 쇄를 더 찍었을 만큼 꽤 잘 팔리고 있다.

작가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와 독자가 읽고 싶은 이야기가 일치하는 행운을 누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자신을 양보하는 게 옳을까?

자신을 양보하지 않고도 독자를 압도할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는 역량이 내게 과연 있을까?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고 해서 작품이 잘 팔린다는 보장이 있을까?

이런 '로우텐션' 계열의 소설을 읽다 보면 고민이 깊어진다.

이 같은 고민은 각본 작업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홀로 매달렸던 소설 쓰기가 상대적으로 참 쉬운 작업이었음을 요즘 들어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수상한 초콜릿 가게 (벚꽃에디션)
수상한 초콜릿 가게 (벚꽃에디션)
김호연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2』(나무옆의자)

1편과 2편을 합쳐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한국소설의 대박 히트작이다.

1편과 마찬가지로 읽은 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로우텐션' 소설이다.

1편과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 이야기여서, 1편을 읽지 않고 2편을 읽어도 무방하다.


이 시리즈가 작가가 쓴 가장 좋은 작품인지는 1편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의문이다.

나는 이 작품보다 <망원동 브라더스>가 더 좋은 작품이고, 작가가 가장 힘줘 쓴 역작은 <파우스터>라고 생각한다.

<연적> 또한 한국소설에선 보기 드문 재치 있는 버디물이었다.

작가와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작가의 생각도 나와 같지 않을까 관심법을 써본다.

작가도 이 시리즈의 성공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데에 내 손모가지를 걸겠다.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게 출판 시장이라는 걸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금 실감했다.

잘 쓴 소설이 잘 팔리는 게 아니고, 못 쓴 소설이 안 팔리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못 쓴 소설이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단지 이 작품보다 더 주목받아야 할 작가의 전작이 주목받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조만간 내 첫 산문집이 나오는데, 그 산문집이 내 소설보다 더 잘 팔리면 나는 마냥 기쁘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내가 해 온 작업은 무엇인가 하는 회의감이 조금 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시리즈의 히트 때문에 작가의 전작도 덩달아 조금씩 관심을 받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편한 편의점 2 (단풍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2 (단풍 에디션)
고호 장편소설 『노비종친회』(델피노)

근엄한 단어인 '종친회'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노비'라니.

오로지 제목 하나에 끌려 집어 든 작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서 읽고 후회하지 않았다.

한국 소설에선 드문 따뜻하고 유쾌한 코미디물이었다.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희성인 헌 씨들이 모여 종친회를 만들고 뿌리를 찾는 이야기'다.

주인공을 비롯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헌 씨들은 소싯적부터 설움을 많이 받아왔다.

'현' 씨로 오해받는 일은 기본이고, 조상을 알 수 없어 노비 집안 출신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왔다.

주인공은 종친회가 나름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곳곳에 흩어진 헌 씨들을 모은다.

그렇게 모인 헌 씨는 몇 안 되지만 출신은 입양아, 탈북자, 주부, 전직 조폭 출신 횟집 사장, 정치인, 교수 등 다양하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이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니,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돼 재미를 준다.


이들은 노력 끝에 자기 뿌리가 진주에 닿아있음을 확인하고 '진주헌씨'를 자처한다.

하지만 겨우 만든 종친회는 전국문중협회가 주최한 행사에서 푸대접받고, 심지어 겨우 찾은 조상이 족보를 조작한 듯한 정황을 포착한다.

그 와중에 돈을 들고 잠적하는 주인공.

과연 '진주헌씨 종친회'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갈까.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코미디다.

헌봉달, 헌총각, 헌신자, 헌학문, 헌자식, 헌금함, 헌소리, 헌정치 등 임성한 드라마를 닮은 등장인물 이름부터 대놓고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한 코미디에 그쳤다면 이 잡글을 끼적이지 않았을 테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좌충우돌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계급문화를 지적하고,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하다.

시대착오적인 소재를 역설적으로 잘 활용한 신선한 작품이다.


노비 종친회
노비 종친회
차무진 소설집 『아폴론 저축은행』(요다)

내 경험상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등장인물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다.

극한 상황에 놓인 등장인물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등장인물은 종종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그럴 때는 그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꽤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온다.

등장인물이 맞닥뜨릴 수 있는 최고의 극한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

정답은 정해져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상황보다 극한인 상황이 또 있겠는가.


이 소설집에 실린 여덟 단편은 문학의 영원한 화두인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설화, 도시괴담, 역사, 고전과 엮어 다채롭게 변주한다.

가족물인 줄 알았는데 심령물로 반전하고, 사극인 줄 알았는데 SF가 끼어들더니, 동화의 한 장면이 고어물로 돌변한다.

작가는 장르, 시대, 배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삶과 죽음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어떤 선택은 섬뜩했고, 어떤 선택은 우스웠으며, 어떤 선택은 서글펐다.


작가가 전작인 장편소설 <인더백>에서 실감 나게 보여준 두렵고 황량한 풍경에 끌렸다면, 이 소설집 또한 마음에 들 것이다.

장편 한 권을 읽을 시간에 장편 못지않게 밀도 높은 단편을 여럿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여덟 단편 모두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독자보다 앞서 나가고 흡인력이 대단하다.

최근에 읽은 소설집 중 가장 집중력 있게 읽었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p.s. 24페이지 여섯째 줄과 넷째 줄의 오타를 고칠 수 있게 빨리 2쇄를 찍는 날이 오기를.

아폴론 저축은행 - 라이프 앤드 데스 단편집
아폴론 저축은행 - 라이프 앤드 데스 단편집
송경화 장편소설 『민트 돔 아래에서』(한겨레출판)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의 후속작이다.

옴니버스 형식이었던 데뷔작과 달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장편소설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이야기를 다루는 깊이도 데뷔작보다 깊어졌다.


작가는 인사청문회, 법안 심사, 국정감사, 예산 심사, 당 대표선거, 지방선거, 대선까지 정치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취재 현장을 두루 다루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따라간다.

대한민국의 언론사 정치부 기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정독하면 된다.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자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나도 이 작품을 읽은 뒤에야 현직에 있을 때 몰랐던 정치부 기자의 일상에 관해 자세히 알았다.

작품 곳곳에 반전이 지뢰처럼 박혀 있어 느닷없이 읽는 재미를 준다.

현직에 있을 때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는데, 왜 그런지 이 작품을 읽고 실감했다.

정치부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기자가 정치판을 흔드는 특종을 마구 쏟아내는 먼치킨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소설만의 재미로 이해하자.


이 작품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 내용은 기업이나 정치권으로 이동한 기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업 홍보실로 이동해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 후배 기자에게 로비하고, 정치권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쓸 때 눈치를 보는 선배 기자들의 모습.

몇 년 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됐을 때 가방 모찌를 했던 인물이 떠올랐다.

그 인물은 삼성의 상무급 임원이었는데, 삼성에 비판적인 언론사에서 활약했던 기자 출신이다.

어디 그뿐인가.

삼성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기자도 있었는데.

자신이 한참 선배라며 내게 은근히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던 기자 출신 모 기업 홍보실 직원의 얼굴도 간만에 생각났다.


이 작품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지금까지 조직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개 비슷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정의로웠으며, 적당히 나빴고, 적당히 비겁했다.

기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개중에는 '구악'으로 불리는 쓰레기 같은 인간도 있었지만, 어느 조직이든 그런 인간은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그런 군상의 모습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얼마든지 자극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를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언론사의 주요 부서는 이른바 '정경사'로 불리는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다.

'정경사'는 주로 스트레이트 기사를 다루는 부서인데, 이들 부서를 두루 거쳐야 편집국장과 같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편집부, 문화부, 체육부, 국제부, 교열부, 지방부, 온라인부 등은 사내 권력에서 먼 부서다.

문화부를 더해 '정경사문'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지만, 사내 권력은 어디까지나 '정경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경제부와 산업부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사회부가 한직인 경제지에서도 정치부의 위상은 상당하다.


나는 '정경사문' 중 '정'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기자에게 부서 이동은 이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언론사에선 부서 간 업무가 확연하게 다르다.

정치부 경험을 전혀 해보지 못한 나는 이 작품의 내용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기자가 발휘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 훌륭한 직업물이었다. 


'시마' 시리즈처럼 후속작이 계속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 알게 된다.

민트 돔 아래에서 - 송가을 정치부 가다
민트 돔 아래에서 - 송가을 정치부 가다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495051525354555657585960616263646566676869707172737475767778798081828384858687888990919293949596979899100101102103104105106107108109110111112113114115116117118119120121122123124125126127128129130131132133134135136137138139140141142143144145146147148149150151152153154155156157158159160161162163164165166167168169170171172173174175176177178179180181182183184185186187188189190191192193194195196197198199200201202203204205206207208209210211212213214215216217218219220221222223224225226227228229230231232233234235236237238239240241242243244245246247248249250251252253254255256257258259260261262263264265266267268269270271272273274275276277278279280281282283284285286287288289290291292293294295296297298299300301302303304305306307308309310311312313314315316317318319320321322323324325326327328329330331332333334335336337338339340341342343344345346347348349350351352353354355356357358359360361362363364365366367368369370371
[책 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김영사/책증정]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닥터프렌즈의 오마이갓 세계사>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1. 속도의 안내자⭐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박소해의 장르살롱] 15. 경계 없는 작가 무경의 세 가지 경계 [책증정]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함께 읽어요 [북토크/책 증정]경제경영도서 <소비 본능>같이 읽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중간 참여할 수 있어요!
🎬 독립 영화 보고 이야기해요.
[인디온감] 독립영화 함께 감상하기 #1. 도시와 고독[그믐무비클럽] 5. 디어 라이프 with 서울독립영화제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조영주 작가가 고른 재미있는 한국 소설들
[책증정]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함께 읽어요 차무진 작가와 귀주대첩을 다룬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을 함께 읽어요최하나 작가와 <반짝반짝 샛별야학>을 함께 읽어요.
6인의 평론가들이 주목한 이 계절의 소설!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1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2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 있던 이 책, 망나니누나와 함께 되살려봐요.
[Re:Fresh] 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시 읽어요. [Re:Fresh] 1. 『원미동 사람들』 다시 읽어요.
이런 주제로도 독서모임이?
혹시 필사 좋아하세요?문학편식쟁이의 수학공부! 50일 수학(상) 함께 풀어요.스몰 색채 워크샵
어서 오세요. 연극 보고 이야기하는 모임은 처음이시죠?
[그믐연뮤클럽의 서막 & 도박사 번외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그믐밤] 10. 도박사 3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수북강녕
⏰ 그믐 라이브 채팅 : 5월 16일 목요일 저녁 7시, 편지가게 글월 사장님과 함께
[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
🐷 꿀돼지님의 꿀같은 독서 기록들
권여선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수전 팔루디 『다크룸』(아르테)최현숙 『할매의 탄생』(글항아리)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 봄, 시집 한 권 🌿🌷
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2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0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9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8
모집중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