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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원 연작소설 『고양이의 제단』(엘릭시르)

이 작품은 중학교를 배경으로 벌어진 미스테리한 사건을 추리해 해결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언뜻 보기엔 주요 등장인물이 여자 중학생이고 배경이 학교여서 성장소설처럼 보이는데, 시종일관 차분하게 사건을 풀어가는 진지한 추리물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은 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게감이 상당하다.

억지로 감동을 주려는 요소도 없고, 등장인물의 선악 구도도 확실치 않다.

복잡한 트릭도 없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무리한 설정이 없다. 

배경을 학교 바깥으로 옮기고 등장인물의 연령대를 높이면 색깔이 완전히 달라질 작품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등장인물의 행동과 심리가 어른과 다르지 않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많은 어른이 아이들의 고민을 사소하게 여긴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자.

어린 시절 고민의 무게가 과연 현재 고민의 무게보다 가벼웠던가.

나도 그 시절에 죽을 만큼 괴로운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고민이 있었다.

이 작품은 어른이 10대 여자 중학생에 빙의해 그들의 행동과 심리를 흉내 냈다는 느낌보다, 10대 여자 중학생이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줬다.

감정의 진폭을 좁힌 냉정한 연출이 현실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지난 6월에 치러진 지방선거는 나도 꼰대가 됐음을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개표방송을 보며 나는 두 가지 때문에 놀랐다.

하나는 이제 나보다 어린 당선자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무심코 어린놈이 뭘 안다고 정치를 하느냐고 혀를 찼다는 점이다.

아는 예의라고는 장유유서밖에 없는 꼰대를 실컷 비웃어왔는데, 나도 그런 꼰대로 변하고 있었다니.

내 나이 때 이미 4선 국회의원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늘에도 혀를 찰 일이다.

이 작품은 나이와 상관없이 고민은 누구에게나 무겁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작가가 할 말이 더 있는데 이야기를 끝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회수되지 않은 떡밥이 몇 개 있고, 결말 역시 제대로 매듭을 짓지 않았다.

후속편을 의도한 걸까.

그런 거라면 부디 이른 시일 내에 후속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고양이의 제단
고양이의 제단
박상영 연작소설 『믿음에 대하여』(문학동네)

이 작품에는 작가의 대표작인 <대도시의 사랑법>처럼 네 편의 소설이 연작으로 실려 있다.

그중 두 편은 이미 문예지(악스트, 릿터)를 통해 읽은 터라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30대 직장인이다.

성적 지향이 동성일 뿐, 누가 봐도 평범해 보이는 샐러리맨들이다.

20대를 다룬 <대도시의 사랑법>, 10대를 다룬 <1차원이 되고 싶어>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탄탄한 직장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사랑의 방법이 과거와 비교해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 지점이 갈등의 시발점이다.

의식주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는 지위와 돈을 가지고 있어도 불안하다.

남들과 다른 성적 지향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의식주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흔들리니 말이다.

몸은 함께 있지만 외부 조건 때문에 마음까지 온전히 함께일 수 없는 이들의 외로움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더불어 이 작품은 코로나 펜데믹 속에서 소수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코로나 확진보다 동선 공개를 훨씬 두려워하고, 부동산 거래나 대출도 어려우며, 집들이조차 망설여야 한다.

견고해 보였던 삶의 토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1차원이 되고 싶어>의 등장인물보다 잃을 게 많아진 만큼 어깨에 짊어진 부담도 크다.

코로나 펜데믹이 등장인물의 일상을 뒤흔드는 모습을 문장으로 읽을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작가는 대한민국 문학계의 주류인 퀴어 문학의 대표 주자이지만, 나는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퀴어 서사라는 걸 그리 의식해보지 못했다.

작가의 퀴어 서사가 다른 퀴어 서사와 비교해 유니크한 점은 일상성이다.

작가가 소설에서 묘사하는 연애는 이성애와 크게 다르지 않다.

퀴어 서사라는 사실만 잊고 읽으면 이보다 절절한 로맨스가 없다.

그 일상성이 퀴어 서사를 문학계 주류로 이끈 힘이 됐고, 이를 가장 소설로 잘 풀어내는 작가가 박상영이다.


나는 작가의 소설이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대한민국 사회에 미친 영향만큼.

작가가 중년과 노년의 퀴어 서사도 어떻게 풀어낼지 기대된다.


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연작소설
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연작소설
이현석 장편소설 『덕다이브』(창비)

이 작품은 발리의 한인 서핑 캠프를 배경으로 병원 내 괴롭힘인 '태움'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섬세한 필치로 다룬 장편소설이다.

우선 '덕다이브'라는 단어가 낯설어 의미를 웹서핑으로 찾아봤다.

'덕다이브'는 오리가 잠수하듯 수면 아래로 파고들어 타기 어려운 거대한 파도를 피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작품을 읽다 보니 소설의 주제와 내용을 훌륭하게 압축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차 서프 강사인 태경과 캠프에 수강생으로 찾아온 인플루언서 민다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태경은 과거에 한 건강검진센터에서 업무 보조 인력으로 일했고, 민다는 당시 태경과 함께 일했던 간호사였다.

실수가 잦았던 민다는 선배 간호사로부터 태움을 당했고, 태경을 포함한 다른 직원은 태움을 방관하거나 동조하며 민다를 외면했다.

민다의 등장은 태경이 잊고 살았던 과거를 소환하며 외면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방관 또한 가해와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했기 때문에 민다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불편했던 거라고.


최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2017~2021) 산업재해로 인정된 자살 건수는 473건에 달한다.

한 해 평균 100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직장 내 괴롭힘 등의 사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집계는 늘 현실보다 적게 이뤄지므로, 알려지지 않은 자살 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이 같은 자살 소식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쉽게 이런 말을 한다.

힘들면 그만두면 되는데, 왜 버티다가 그런 선택을 하느냐고.

나 같으면 직장을 다 뒤집어 버리고 그만두겠다고.


그런데 참 웃기다.

나도 11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월급쟁이로 일했는데, 영화나 드라마처럼 폼나게 사표를 던지며 다니던 직장에 엿 먹이는 사람을 본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 더러워도 참았고, 억지로 쫓아내기 전까지는 버텼다.

이유는 여럿이다.

퇴사 후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까.

월급이 끊기면 일상이 멈추니까.

제 손으로 밥벌이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취급받으니까.

퇴사 후 다가올 현실이 죽음보다 두려운 거다.

그래서 다들 참고 버틴다.

돌이켜 보니 나도 죽을 뻔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퇴사를 결심하지 않았을 테다.


조금만 용기를 내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면, 대한민국 조직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도 서서히 사라지지 않을까.

태경이 높은 파도를 흘려보내고 위기에 빠진 민다를 향해 다가가려고 결심하는 모습을 그린 마지막 부분의 여운이 깊었다.

파도 위에서 끊임없이 실패를 반복하며 일어서고, 거대한 파도를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덕다이브'로 돌파하는 서퍼들의 모습을 보며 이런 게 바로 삶을 살아가는 지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좋은 장편소설이다.


덕다이브
덕다이브
윤이안 장편소설 『온난한 날들』(안전가옥)

기후 변화가 위기 수준으로 심각해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버디 수사물이다.

식물에 남은 인간의 사념을 들을 수 있는 카페 직원과 본업은 법의생태학자인 탐정이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무겁지 않게 그린다.


사소하게 출발한 사건은 두 주인공이 단서를 찾을 때마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덩치를 키운다.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 예상하며 사건을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상대로 전개되지 않는 부분이 많으니 말이다.

여기에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같은 대한민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몰입감을 높인다.


이 작품에서 사건 해결 과정보다 더 흥미로웠던 부분은 기후 위기에 따른 대한민국 사회의 변화 묘사였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을 제한하는 설정, 불편하지만 탄소배출량을 늘 신경 써야 하는 일상 묘사, 에어컨을 가동하자마자 탄소배출을 감독하는 공무원이 쫓아오는 모습 등은 정말 그럴듯해 마치 예언처럼 느껴졌다.


최근 들어 김초엽 작가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조예은 작가의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 강영숙 작가의 장편소설 <부림지구 벙커X> 등 기후 위기를 다룬 소설이 자주 눈에 띈다.

내겐 과학의 언어보다 소설로 다룬 기후 위기가 더 실감 나게 다가왔다.

급격한 기후 변화가 불러올 파장을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데 소설이 나름의 역할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산성 없는 생각을 해봤다.


온난한 날들
온난한 날들
박상영 산문집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한겨레출판)

내가 문학 출판 담당기자였을 때 신간으로 가장 많이 접한 책은 산문집이었다.

동시에 보자마자 거른 책 또한 산문집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책을 만드는 데 쓰인 나무가 가엾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 책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진입장벽이 낮다지만, 어떻게 이따위로 책을 내놓나 싶었다.

저자와 출판사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산문집이란 걸 준비하다 보니 시장에서 잘 팔리는 산문집은 어떤 것인지 신경이 쓰인다.

서점에 들를 일이 있으면 산문집 코너에서 잘 팔리는 산문집을 살폈고, 종이책과 전자책을 가리지 않고 꽤 많은 산문집을 읽었다.

특히 '밀리의 서재'는 종이책을 샀다가 실패할 확률을 확 줄여줬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산문집은 이 작품이었다.


우선 이 작품의 BGM으로 무키무키만만수의 '투쟁과 다이어트'를 깔고 싶다.

이 산문집과 딱이다.

글을 쓰고 싶어 미치겠고, 밥벌이는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늘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 때문에 밤마다 폭식하고, 폭식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니 입맛이 좋아져 배가 고파지고, 하지만 밥벌이는 해야 하고, 글을 쓰고 싶어 미치겠고.

작가는 이 같은 악순환과 고민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필터 없이 보여준다.

그 어디에서도 허세가 보이지 않고, 진솔한 자조가 "나도 그래"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내가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유머인데, 이 작품 역시 페이지 곳곳에서 유머가 넘쳐난다.

재미로만 따지면 최근에 읽은 모든 책 중에서 최고였다.


유머 감각은 타고나는 걸까?

내가 아무리 잘 써도 이 작품만큼 재미있는 산문집을 내진 못할 것 같다.

잘 팔리는 작가에겐 팔리는 이유가 있다.

이 양반 좀 짜증 나게 질투 나네.

에라이 살이나 더 쪄라.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에세이
정보라 소설집 『여자들의 왕』(아작)

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칼을 들어 기사를 위협하고, 악당 취급을 받는 용은 알고 보니 꽤 괜찮은 녀석이다.

무슬림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살벌한 권력 투쟁을 벌이는 여성 사이에서 남성은 쩌리가 된다.

남편에게 학대받는 줄 알았던 여인은 실은 그 상황을 즐기는 흡혈귀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섬멸하는 지휘관은 공주님이다.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상상력이 생각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소설집이었다. 

초반의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3부작은 읽는 내내 피식피식 웃게 했다.

세 작품은 연작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상 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세 작품만 따로 떼어내 경장편으로 선보이고, 애니메이션(실사 영화는 놉!)으로 각색하면 대단히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듯하다. 

작가가 무척 신나게 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작품들이었다.

연작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사막의 빛'은 문명의 교차를 다룬 긴 여정을 다루는데, 작품 전체에 드리워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다만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표제작 '여자들의 왕'을 비롯해 후반에 실린 작품의 밀도는 전반의 연작보다 떨어져 아쉬웠다.


제목만 보고 여성이 남성을 때려잡는 이야기의 모음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쓸데없는 오해다.

현실에서 성별 때문에 겪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고전 형태로 변주하는 유쾌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라고 보는 게 적절하겠다.

굳이 깊이 의미를 파고들려 하지 않아도 즐거운 독서가 가능한 소설집이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여자들의 왕 - 정보라 소설집
여자들의 왕 - 정보라 소설집
고요한 장편소설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나무옆의자)

나는 20대 말에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깊은 밤에 좁은 고시원 방에 홀로 누워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고민하다 보면 금세 새벽이 왔다.

사나흘 동안 깨어있는 경우도 잦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술을 마셔도 취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 선택은 몸을 움직여 지치게 만들기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나는 고시원에서 1km가량 떨어진 청계천까지 와서 광화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물길을 따라 황학교, 오간수교, 마전교, 관수교, 수표교, 광교, 광통교를 걷다 보면 어느새 청계광장 뿔탑 앞에 다다랐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거슬러 황학교까지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가거나, 조금 더 걸어서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걸었다.

그렇게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면 언제 불면증을 앓았냐는 듯 쉽게 잠이 들었다.

그때 내가 청계천을 걸어서 왕복한 횟수가 못 해도 수십번이다.

청계천의 밤을 수백km나 반복해 걸었으니 그때 눈에 담은 야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질 리가 없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내가 경험한 청계천의 밤이 페이지에 오버랩됐다.


취업에 실패해 장례식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주인공은 일이 끝나면 스쿠터를 타고 도시를 방황하며 24시간 맥도날드 매장을 떠돈다.

광화문, 서대문, 정동...

주인공이 방황하는 공간은 내가 기자 생활을 10년 넘게 하는 사이에 익숙해진 공간이어서 생생했다.

어렸을 때 자기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는 죄책감, 대학 졸업 후 안정된 직장을 찾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 가족의 해체로 인한 상실감이 주인공을 짓누른다.

방황은 그런 답답한 마음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을 맛보게 하지만. 방황은 어디까지나 방황일 뿐이다.

현실은 방황으로 바뀌지 않으니 말이다.


나아질 미래가 보이지 않은 삶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작품은 죽음을 상징하는 공간인 장례식장을 통해 그 질문에 관한 답을 내놓으려고 시도한다.

이 작품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심각하지 않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을 독자에게 상기하려는 듯 담담한 일상으로 묘사할 뿐이다.

당연한 묘사인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죽음이라는 삶의 당연한 결말을 당연하게 묘사하는 경우는 드무니 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죽음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장치다.

지금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는 방법이란 게 이 작품의 결론이다.

뻔한 결론인데,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다정해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한다.


주인공의 미래가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방황이 무의미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내가 잠들지 못하는 밤에 청계천을 걷는 대신, 고시원 방에서 홀로 술에 취해 나를 파괴하고 있었다면 20대 말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스쿠터를 몰며 서울의 밤을 통과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건강하게 느껴졌다.


쓸쓸하면서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블랙코미디가 지배하는 작가의 전작 소설집 <사랑이 스테이크라니>보다 내게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하비누아주의 '청춘'을 이 작품의 BGM으로 깔고 싶다.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최하나 장편소설 『강남에 집을 샀어』(몽실북스)

사법시험, 행정고시, 7급 공무원 시험, 9급 공무원 시험에 차례로 10년 넘게 매달리다가 30대 중반을 넘겨버린 남자.

뒤늦게 간신히 취업한 직장의 월급 수준은 최저임금이고, 주5일은커녕 주말 근무에 고용주의 사적인 지시까지 받들어야 한다.

번듯하게 사는 동창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걸 만회하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갭투자를 시도하지만, 등기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에 근생을 구입해 낭패를 본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불법과 합법을 오가는 임대사업에 뛰어든다.

단시간에 강남에 무려 200채 이상의 빌라를 보유한 임대사업자로 변신하며 신분 상승이라도 한 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수많은 빌라의 보증금이 폭탄으로 돌아온다.

결론은? 파국이다.


제목만 보고 장류진 작가의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 류의 투자 성공담을 기대했다면 페이지를 덮자.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폭풍처럼 펼쳐지니 말이다.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이 작품 속에는 그 어떤 꿈도 희망도 없다.

그래서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주인공의 심리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 소름이 돋았다.

나 또한 20대 말에는 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으니 말이다.

솔직히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는 말은 못 하겠다.

대신 그 안에 담긴 분노와 좌절이 완성도를 압도한다.


나는 점점 하락 중인 노동소득의 가치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좀 먹는 가장 큰 병폐라고 생각한다.

청년층의 가상화폐 투자 열풍도 결국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내 몸 하나 쉴 공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허구헌날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책상머리에 앉아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꼭 한 번 들여다봐야 할 작품이다.

지난 정부는 부동산 시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 하나만으로도 청년세대에게 죽을죄를 지었다는 게 내 의견이다.

그렇다고 현 정부가 그 문제를 해결할만한 역량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강남에 집을 샀어
강남에 집을 샀어
박지영 장편소설 『고독사 워크숍』(민음사)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고독사는 이제 노년층을 넘어 세대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다.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는 청장년층 무연고 시신 비율이 이를 방증한다.

이 주제를 다룬 소설이 이제야 나온 게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첫인상이 서서히 지워진다.

이 작품은 여러 등장인물을 내세워 각자 고독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다.

고독사하면 당연하게 떠올리는 빈곤층 노년이 아니라 젊은 직장인, 학생, 부부 등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이들은 익명의 커뮤니티에 모여 고독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서로에게 공유하는데, 그 과정이 참 시시하다.

그 시시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행위가 묘하게도 서로 의지하고 연대할 힘을 얻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요즘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자연사다.

지금까지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죽음 중에 자연사는 드물었다.

사고사가 아니라면, 병원에서 오랫동안 천천히 시들며 죽어가는 게 전부다.

그런 죽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자연사하고 싶은데 과연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홀로 살든 모여 살든 죽을 땐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죽음은 홀로 걸어가야 할 확실한 결말인데, 그런 고독을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서로의 고독을 지켜봐 주면 덜 외롭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고독사일지라도 말이다.

이 다정한 작품을 통해 그런 생각을 해봤다.


여담인데 나와 박지영 작가 사이에 소소한 인연이 있다.

박 작가는 지난 2013년에 열린 제5회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 수상자였다.

제3회 수상자였던 나는 마침 조선일보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터라, 시상식에 참여해 박 작가에게 축하 꽃다발을 건넸다.

나는 앞서 제4회 시상식에도 참석해 구한나리 작가에게 꽃다발을 건넨 바 있다.


매년 여름마다 수상자에게 꽃다발을 전하는 일이 올 줄 알았는데, 제5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은 폐지됐다.

구한나리 작가가 장르 문학 필드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여러 단편을 발표하고 있지만, 단시간 내에 후속작을 단행본으로 출간해 반향을 일으킨 작가가 없다 보니 상의 존재감도 빠르게 사라졌다.

당장 나도 후속작인 <침묵주의보>를 수상 후 7년 만에 내지 않았던가.

박 작가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수상 이후 9년 만에 낸 이렇게 신작으로 소식을 접하게 돼 반가웠다.


고독사 워크숍
고독사 워크숍
장강명 장편소설 『재수사』(은행나무)

이 작품은 장기미제로 남은 20여 년 전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만 보고 긴장감 넘치는 수사물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정적이며 치밀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 과정을 이보다 현실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한 소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치밀한 취재가 돋보인다.

그런데도 가독성이 매우 훌륭해 읽는 데 막힘이 없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표백> 이상으로 도발적이다.

분량만 보고 지레 겁낼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학부 시절에 형법을 공부할 때 나를 사로잡았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과연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국가는 형벌을 주는 권한을 독점한다.

이를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서 김승연 한화 회장처럼 아들이 밖에서 맞고 들어왔다고 직접 빠따를 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원칙 때문에 피해자가 형사사법시스템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가해자가 지나치게 낮은 형벌을 받아 홧병으로 뒷목을 잡는 피해자가 얼마나 많은가.

오래전에 홀로 며칠 동안 이 문제를 가장 공정하게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었는데, 고민 끝에 나온 해결방안은 어이없게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함무라비 법전에 명시된 이 원칙은 미개함과 거리가 멀다.

상대방이 내 강냉이를 세 개 털었으면, 나도 상대방의 강냉이를 딱 세 개만 털어야 한다는 게 이 원칙의 핵심이다.

즉 피해를 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해선 안 된다는 대단히 합리적인 원칙이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이 원칙은 범죄 행위의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지 않는다.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지 않고 이런 복수법을 허용하면 어마어마한 사회적 혼란이 벌어진다.

실제로 고려 초에 복수법이 시행돼 막장 사태가 벌어진 일이 있다.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원한을 가진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됐고, 백주대낮에 누군가를 때려죽여도 복수라고 주장하면 땡이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고의범에겐 국가가 대신 나서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른 형벌을 대신 가하는 게 공평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했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과연 물리적인 피해만이 피해일까?

누군가에게는 맞아서 입은 상처보다 마음에 입은 상처가 훨씬 클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정신적인 피해는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떻게 처벌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이뤄질 수 있을까?

오래전에 멈췄던 고민을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 하게 됐다.


이 작품은 분량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 출판시장을 향한 도전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장편소설의 기준이 원고지 1000매에서 800매로 내려온 지 오래고, 요즘에는 400~500매에 불과한 소설도 장편소설 취급을 받는다.

나도 의도적으로 800매에서 장편소설 분량을 끊어온 지 오래다.

그런 상황에서 원고지 3000매 이상 분량의 소설이라니 이게 도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최근에 소설을 읽으며 이 정도로 깊게 무언가를 들여다본 일이 있었던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서사이고, 그런 서사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장편이다.

단편으로 아무리 문장이니 뭐니 장난을 치고, 단편을 억지로 장편으로 늘려 봐야 이런 사고실험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소설은 역시 장편이고, 취재를 제대로 해야 한다.

앉은뱅이 소설로는 어림없다.

그걸 다시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세트] 재수사 1~2 - 전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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