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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버먼 『거의 모든 것의 종말』(예문아카이브)

내게 1992년은 휴거로 기억되는 해다.

당시 다미선교회라는 종교단체가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도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꽤 시끄러웠다.

다미선교회는 구체적으로 10월 28일이라는 휴거 일자까지 제시하는 바람에 더 주목을 받았다.

당시 12살 소년이었던 내가 사는 대전의 변두리 동네까지 휴거 관련 책자가 뿌려졌다.

주말마다 간식을 먹으러 교회에 다녔던 나는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혼자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었다.

마침내 휴거일자가 다가왔고, 내 공포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는 세상에 온갖 종말론이 판을 쳤다.

대부분 웃어넘길 이야기였지만, Y2K만큼은 꽤나 신빙성 있게 들렸다.

나는 코딩에 꽤 능숙한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컴퓨터의 날짜 표기 방식은 월-일-년이었고, 년은 네 자리 중 뒷부분 두 자리의 수만 입력했다.

저장장치의 용량이 턱없이 적어 1바이트라도 줄이려고 했던 과거의 흔적이 그때까지 남은 거다.

이 경우 1900년과 2000년은 똑같이 00으로 처리된다.

컴퓨터의 오작동을 충분히 우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군사 및 우주용 컴퓨터의 스펙은 안정성 문제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의 금융망이 마비되고, 원자력 발전소의 컴퓨터가 오작동해 방사능이 누출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핵폭탄이 갑자기 발사될지도 모른다는 괴담도 퍼졌었다.

나는 1999년 12월 31일 밤에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도시 전체에 정전이 발생하고, 핵폭탄이 날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할지 걱정하면서.

마침내 2000년 1월 1일 0시가 됐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길었다.

이 책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내가 앞서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과 비슷하다.

이 책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종말이라는 자극적이고도 궁금한 소재를 바탕으로 우주와 지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흥미롭게 전하는 교양 과학 서적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저자는 지금까지 지구가 겪은 대격변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대격변이 다가올지 과학적인 근거로 예측하고 설명한다.

그중에는 일식이나 토성과 목성의 만남처럼 근거가 없는 종말론 시나리오도 있고, 태양의 거대화 등 언젠가는 반드시 벌어질 종말론 시나리오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언급된 종말론 시나리오 대부분은 우리가 생전에 경험할 일이 없는 그야말로 '우주적인' 사건이다.

빅뱅, 초신성, 대멸종, 은하의 충돌을 우리 생에 겪을 일은 없지 않은가.

꽤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던 석유 고갈로 인한 대혼란 우려도 쑥 들어간 지 오래다.

돌이 사라져서 석기시대가 끝난 건 아니니 말이다.


우주 기준으로는 10만 년, 100만 년도 찰나의 시간인데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그런 우주적인 사건을 두려워하는 건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이 우주에서 하루살이 만큼의 존재감도 없는 무의미한 생일까.

이 책을 읽으니 오히려 종말에 관한 두려움보다는,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세계에 관한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더 커진다.

끊임없이 세상을 궁금해 하는 게 언제 다가올지도 모를 종말을 걱정하는 일보다 훨씬 즐거운 일 아니겠나.

거의 모든 것의 종말 - 과학으로 보는 지구 대재앙
거의 모든 것의 종말 - 과학으로 보는 지구 대재앙
[그믐북클럽Xsam] 17. 카프카 사후 100주년, 카프카의 소설 읽고 답해요.

그믐북클럽 17기를 모집합니다!


그믐북클럽에서는 그믐이 엄선한 좋은 책을 끝까지 읽고 질문에 대답하며 사유하는 힘을 기르실 수 있습니다. 그믐에서 추천하는 책을 함께 읽으며,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을 나누기 원하시는 독자 30명을 초대합니다.


*그믐북클럽은 15기부터 교보문고 구독서비스 sam 의 후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작가들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꼭 100년 전인 1924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믐에서는 바로 그날, 6월 3일부터 29일 동안 카프카의 대표 소설 38편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38편이라고 하지만 종이책 기준으로는 568쪽에 불과(?)하니 아주 힘든 목표는 아닙니다. 엽편이라고 해야 할 짧은 단편들이 많거든요. (심지어 여섯 문장짜리 작품도 있습니다) 게다가 카프카는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가 아니라서, 이 38편을 읽고 나면 어디 가서 “나 카프카 좀 읽었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29일 동안 책 두 권을 연이어 읽으려 해요. 살림출판사의 『변신·소송』과 범우출판사에서 나온 『카프카 단편집』입니다. 전자는 문학평론가이자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을 지낸 진형준 교수님이, 후자는 독일에서 십자훈장을 받기도 한 독문학자 박환덕 교수님이 번역하셨습니다. 두 책에는 겹치는 작품이 없습니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다른 출판사에서도 많이 번역되어 나왔으니 어느 출판사 책으로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38편을 다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기회에 카프카를 읽어보고는 싶은데 부담스러우시다고요.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것 같아 두려우시다고요.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목표뿐이다.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에 불과하다.” 망설이지 말고 신청하세요!


● 신청안내 ●


- 모집 기간: 5월 4일(일) ~ 6월 2일(월) 오후 2시까지

- 모집 인원 : 30명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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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영 소설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문학과지성사)

이 소설집을 읽으며 마치 시규어 로스의 앨범을 듣는 듯한 몽환적인 기분을 느꼈다.

시간과 공간이 두서 없이 뒤얽히다가 느닷없이 한 곳으로 모이고 여러 곳으로 흩어진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도에 없는 미지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였다가 우연히 빠져나온 느낌이다.

낯설고 때로는 당황스러웠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 8편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절묘하게 연결돼 마치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서로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연히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각각의 세계가 변화한다.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평행우주와 양자역학 개념을 활용한 묘사는 뒤얽힌 시간과 공간의 당위에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마치 SF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줬다.

매우 독특한 구성인데도 서로 어색하지 않게 유기적으로 이어져 놀라웠다.

이 소설집은 연작소설로 불러도 어울리고, 나아가 형식을 부드럽게 파괴한 장편소설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나는 이 소설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은하 필라멘트를 떠올렸다.

무수한 별들을 품은 은하가 수백에서 수천여 개 모이면 은하단을 이룬다.

이런 은하단이 모여 군집을 이루면 초은하단이 되고, 초은하단이 모인 구조를 은하 필라멘트라고 부른다.

은하 필라멘트의 크기는 수십억 광년에 달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아득히 먼 곳에서 바라보면 서로 연결된 거시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존재하지만, 서로의 중력이 연결돼 만들어지는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구조다.


삶은 예측할 수 없어서 두렵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 아름답다는 메시지가 소설 곳곳에서 변주돼 드러난다.

그래서 작가는 "사람이 사람을 도와야죠"라는 문장을 작품 곳곳에 남겼을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시작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테니까.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김다은 『영감의 글쓰기』(무블출판사)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영감을 어디에서 얻느냐?"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가진 지인뿐만 아니라 언론사와 인터뷰할 때도 이런 질문이 빠지는 일이 없다.

그 질문에 나는 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나는 쓰고 싶은 소설의 주제를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생각하며 정리한 뒤 짧은 기간에 글로 쏟아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 과정에 딱히 영감이란 게 내게 영향을 미친 일은 없었다.

내겐 소설 쓰기가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백하건대, 나는 다른 작가들이 어떻게 소설의 영감을 얻는지 무척 궁금한 사람이다.

나도 영감이란 걸 받아서 소설을 쓰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이 책을 펼쳤다.

작가가 최근에 쓴 장편소설 『손의 왕관』을 읽었을 때 왠지 모를 영성(?)을 느낀 터라, 왠지 이 책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까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한번 읽는다고 없던 영감이 샘처럼 솟아나지는 않는다.

작가는 이 책의 머리말에 "영감에 대한 일방통행적인 기술이나 정해진 해답을 원하는 독자라면, 부탁드리건대 이 책을 사지 않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경고한다.

이 책은 소설을 쓸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을 해야하는지 헤매는 사람들에게 꽤 훌륭한 길잡이가 돼주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란 결국 사고 실험이니 말이다.


이 책은 수동적으로 내용을 따라가야 하는 책이 아니다.

자주 페이지에 머물러 생각해야 하고, 순서대로 페이지를 넘길 필요도 없다.

때로는 무언가를 책에 적어야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해야한다.

실제로 이 책에는 공책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여백이 많다

언어 감각을 익히기 위해 끝말잇기를 제안하고, 모르는 단어를 접하면 사전을 뒤지기에 앞서 먼저 상상을 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작가의 소설을 비롯해 중앙지와 지역지를 망라한 다양한 단편소설, 국내외 유명작가의 소설이 사례로 등장해 이해를 돕는다.

영감으로 글을 쓰는 능력을 가르치기보다는, 영감을 키우는 다양한 방법을 제안하는 책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은 책이다.

아껴 읽는 책이 아니라, 막 읽어서 제본이 뜯어져야 하는 책이다.

처음에는 전체를 통독하고, 필요할 때마다 목차를 보며 발췌독하면 활용도가 높은 책이다.


작가는 영감 훈련은 사유의 훈련이므로 자기 내부에서 길어올린 글을 쓰게 만든다고 강조한다.

영감 훈련이 돼 있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몰라서 재미있는 표현이나 흥미로운 사건을 찾아 헤매니 글의 원천을 외부에 두게 되며, 자신이 창의적이지 않음을 아니까 빠르게 지치고 쓰는 기쁨을 잃어가게 된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곱씹을수록 옳은 말이다.


자신이 소설을 쓸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스스로 질문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래. 세상에 뭐든 거저 얻는 건 없다.

영감의 글쓰기 - 프로처럼 배우고 예술가처럼 무너뜨려라
영감의 글쓰기 - 프로처럼 배우고 예술가처럼 무너뜨려라
김유담 장편소설 『이완의 자세』(창비)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목욕탕, 독특하게도 여탕이다.

여탕에서 때밀이로 일하는 어머니를 둔 딸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작가는 여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과 일상을 관찰함으로써 주변부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자화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한때 잘 나갔던 주인공의 어머니는 남자를 잘못 만나 다단계로 모든 걸 날리고 빚쟁이가 된 뒤 동네 목욕탕으로 숨어들어 세신사로 재기를 도모한다.

주인공은 어머니까 때를 밀어 번 돈으로 명문대에 진학해 무용을 전공했지만, 몸이 뻣뻣해 큰 역할을 맡을 수 없고, 본인도 그 한계를 잘 안다.

어머니에게 주인공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대리 만족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그리 밉진 않다.

인생에 바닥뿐만 아니라 지하실도 몇 층이나 있음을 경험한 그녀다.

좀처럼 패자부활전을 치를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그녀가 마음을 붙들 수 있는 곳은 어린 딸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여탕은 서로 알몸으로 만나는 공간이니까, 그 공간 안에서 만큼은 모두가 평등할 거라고 여긴다면 착각이다.

여탕에서도 재산, 직업, 피부, 자식 자랑 등으로 여자들의 서열과 계급이 나뉜다.

때밀이인 주인공의 어머니는 여탕 내 피라미드 구조의 밑바닥에 있는 만만한 존재다.

그녀가 아무리 악착같이 돈을 벌어 괜찮은 아파트를 장만하고 딸을 명문대에 보냈어도, 그녀의 처지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여자는 없다.


하지만, 여탕은 알몸을 보일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아무리 자신을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공간에선, 결국 삶의 핍진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는 매력적인 여탕 단골이 몇몇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단골은 동네에서 돈 많다고 소문이 자자한 오 회장이라는 인물이다,

오 회장이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한쪽 가슴을 잃은 후에도 당당하게 목욕탕에 드나든다.

그 후 이 여탕에는 유방암 환자들의 방문이 늘어나고, 자궁암 등 다른 질병을 앓았던 여자들도 이곳을 찾는다.

그들은 여탕에서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며 보듬고, 언젠가부터 그들은 여탕에서 주변인이 아니게 된다.

서로 적당히 떨어져 지내던 여자들이 느슨하게 연대하는 모습이 감동을 줬다.


나이가 들면 깨닫는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인생이 결코 내 마음대로 돌아가진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산다고 해서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란 것도 알게 된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생의 파도를 받아들일 줄 아는 방법을 배운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몸이 뻣뻣해서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해 주변부로 밀려난 인물이다.

작가는 주인공이 몸에서 힘을 빼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우리가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조건에 짓눌려 지나치게 긴장하며 살아온 게 아닌지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일단 몸에서 힘을 빼라고 말이다.

아직 가야 할 인생길이 기니까.

이완의 자세
이완의 자세
정지돈 장편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문학과지성사)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읽는 소설은,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또래 한국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문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문우도 따로 없는 내게, 그들의 생각과 관심사를 엿볼 방법은 그들의 결과물을 읽는 일뿐이니 말이다.

그들의 작품을 바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뒤늦게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정지돈 작가의 작품은 내가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놓인 작품이었다.


문학기자 시절에 『야간 경비원의 일기』를 비롯해 작가의 전작을 몇 권 읽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약간은 오기로 읽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작가의 인터뷰가 실린 <악스트> 2021년 1·2월호까지 따로 챙겨 읽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소설이란 걸 알면서도 실제 역사와 수많은 참고 문헌의 인용 때문에 자주 소설이라는 사실을 잊곤 했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이 아닌지 구별하는 일이 무의미한 걸 알면서도, 자주 갈피를 못 잡았다.

읽다가 여러 각도 바라보는 해석이 필요해 흐름을 놓치는 일이 잦았다.

나중에는 이해를 포기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페이지를 넘겼다.

오한기 작가의 장편소설 『가정법』을 읽었을 때 느낀 당혹감과 비슷한 기분이다.

결은 다르지만, 한유주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고.


소설이란 무엇일까.

내 또래 작가들은 어떤 세상을 보고 있는 걸까.

나만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걸까.

책을 덮으며 낯선 세계를 맞이하기에 내가 너무 고루한 사람이 아닌지 잠시 자책했다.

그와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는 걸 굳이 이해하려 애쓰는 일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봤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문목하 장편소설 『유령해마』(아작)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비파'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지능이고, 이 인공지능이 화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인공지능은 '해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인공지능보다는 실제 인간에 더 가깝게 묘사된다.

'해마'가 어떤 기술로 만들어져 어떻게 작동하는 인공지능인지 명확하게 설명이 나오지는 않는다.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많아 전작보다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SF 장르의 매력이 그런 점이 아닌가 생각하며,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작가가 설정한 공간을 떠올렸다.


나는 작가의 전작인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을 SF보다는 처절한 로맨스로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느꼈던 애절함이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먹먹하게 남아있다.

이 작품도 전작 못지않게 로맨스로 읽힐 구석이 많다.

그렇지만 내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성찰한 끝에 관용과 자유의지를 보여주는 '비파'의 모습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부분은 '비파'가 자신의 백업 인공지능을 '나'에서 '너'로 부르는 순간이었다.

'비파'는 자신이 파악한 거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백업 인공지능을 보조적인 존재로 취급하며 '나'라고 부른다.

백업 인공지능 또한 오기를 부리듯 '비파'를 백업이라고 부르며 무시한다.

하지만 둘은 각자 다른 경험을 한 끝에 서로 같은 결론에 다다랐고,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비파'가 각성한 끝에 백업 인공지능을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하고, 백업 인공지능은 '비파'의 임무를 떠맡는 장면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둘의 관계가 '비파'와 '은하'의 관계보다 더 애절하게 느껴졌다.


이 작품이 쉬운 소설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도 이 작품의 큰 줄기만 파악했을 뿐, 세부적인 부분에선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 많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그런 미래가 다가온다면 우리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인공지능과 관계를 설정해야 할까.

『유령해마』는 다가올 미래를 고민해보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유령해마 (리커버 에디션)
유령해마 (리커버 에디션)
백수린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작가정신)

제목처럼 다정한 글의 연속이다.

다양한 빵과 문학작품을 자연스럽게 엮어 자신만의 시각으로 풀어낸 글에선,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기가 느껴져 편안했다.

호빵, 마카롱, 슈크림빵, 롤케이크 등 익숙한 빵부터 바움쿠헨, 콜롬바, 스톨렌, 자허토르테 등 낯선 빵까지.

단팥빵, 피자빵 정도나 아는 나는 이렇게 많은 빵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글을 읽다 보면 입안에 침이 고였다.

장시간 발효를 거친 소화가 잘되는 빵을 닮은 글이었다.


더불어 이 책을 통해 내가 얼마나 편향된 독서를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책에 소개된 책은 대부분 문학이고, 그중에서도 해외 문학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해외 문학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내가 읽는 비문학작품(특히 과학)은 대부분 해외 저자의 작품인데, 유독 문학만큼은 해외 작가의 작품에 손이 가질 않는다.


해외문학을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소싯적에는 분명히 해외문학을 많이 읽었던 시절은 있었으니까.

오히려 나는 소설을 쓰면서부터 해외문학을 멀리하게 됐다.

번역된 문학이 과연 원작과 같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어로 해당 문학 작품을 읽으면 될 텐데, 내겐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울 의지는 딱히 없는 터라,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너 작가 맞아?"라고 놀랄 정도로 읽지 않은 해외문학이 많다.


작가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소개하며 프레첼을 다룬 '떠나보내는 여름'이란 글을 읽으며 오랜만에 해외문학에 호기심이 생겼다.

작가는 프레첼이 독일 슈바벤 지방에서 밀가루 반죽으로 부장품인 반지나 팔찌, 목걸이 등을 빚어 장례식장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프레첼이 팔찌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bracelet'과 동의어란 사실도 이 글을 통해 처음 알았다.

작가는 프레첼의 짠맛이 빵을 빚는 사람의 눈물 맛이 아니겠냐며 '애도 일기'의 일부를 인용한다.


"타인의 죽음은 결코 온전히 극복되지 않는 상실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 그런 상실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그럴듯한 거짓말쟁이일 뿐일 것이다."

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앤설로지 『보라색 사과의 마음』(다산책방)

이 앤설로지에는 우울증을 테마로 쓴 단편 6편이 실려 있다.

누군가에게는 잔잔하게, 누군가에게는 격렬하게.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우울증의 얼굴은 저마다 다르다.

6편 모두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은 표제작인 최민우의 '보라색 사과의 마음'과 조수경의 '알폰시나와 바다'다.

아마도 두 작품 속 주인공의 경험이 내 경험과 상당 부분 비슷했기 때문일 테다.


두 작품에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떠나보낸 주인공, 가깝게 지냈던 사람의 자살로 충격을 받고 방황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지만, 끝까지 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들은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별로 슬프지 않아 죄책감이 들고, 때로는 지독하게 슬퍼져 괴롭다.

때로는 지독하게 외로워 괴로워 하다가도, 때로는 외로워지기 위해 모든 사람과 멀어진다.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혼자 멀쩡하게 살아가는 게 옳은 일인가 의문이 든다.

주인공들의 심정과 내 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비롯된 번민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소설 읽기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데 훌륭한 수단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읽을 때는 우울한데, 묘하게도 읽고 나면 우울함이 잦아드는 이야기들이었다.

소설이 무언가에 정답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도 의문이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짊어진 이들이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 인식해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지내니?"

소설의 역할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일기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 소설을 읽은 누군가가 "이건 소설 같지 않은데?"라는 의문을 품었다면, 그 의문은 아마도 억측은 아닐 것이라고 그에게 슬그머니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고 어디까지가 사실이냐는 물음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앤설로지에 실린 남궁지혜의 단편 '당신을 가늠하는 일'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해 대신하고 싶다.


"너무 날 확정 짓지는 마."/"가늠하는 정도가 좋은 것 같아"

보라색 사과의 마음 - 테마소설 멜랑콜리
보라색 사과의 마음 - 테마소설 멜랑콜리
함정임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문학동네)

다 읽고 나니, 홀로 여기가 아닌 먼 어딘가를 여행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용인', '스페인 여행', '해운대', '영도' 등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에는 지명이 제목으로 붙은 작품이 많다.

이 소설집에서 장소는 삶이란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 의미를 깨닫는 장치로 쓰인다.

권지예 작가의 소설집 '베로니카의 눈물'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가까이 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게, 멀리 떨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작품 속 곳곳에 배경으로 깔린 장소는 읽는 내내 생생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 '해운대'처럼 내게도 익숙한 장소가 등장하는 작품에선 풍경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져서 놀라웠다.


작가는 삶이란 계획대로만 진행되지 않는 여행과 같지 않으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그래서 우연처럼 깨닫고 만나는 사랑이 소중하지 않으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작가 자신과 고 김소진 작가를 교차해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자 소설집의 마지막에 실린 '영도'를 읽고 문득 든 생각이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 - 함정임 소설
사랑을 사랑하는 것 - ��함정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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