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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대하여 1 (박재삼 시인)

바람에 대하여 1

                                    박재삼 

 

결국은 우리는

바람 속에서 커 왔고나

그 바람은 먼 여행을 하고

지금도 안 끝나고 있다. 

 

겨울의 아득한 들판 끝에서

봄의 노곤한 꽃 옆에서

여름의 숨차던 녹음 곁에서

그리고 드디어

이제는 빛나는 찬바람이 되어

소슬하게 가슴에 넘치게

수확의 열매와 함께 왔고나. 

 

이 바람을 나는

나서 지금까지

거느리고는 왔으나

어쩔 것인가

아직도 그 끝을 못 잡고

어리벙벙한 가운데 살고 있네 

필연 (이장욱 시인)

필연

                   이장욱 

 

나는 야위어가면서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필연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그것을 애인이라고

생일이라고 

 

신문사에 편지를 쓰고

매일 실망을 했다.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에테르로 변하는 세계를 사랑하였다.

강물이 무너지고

돌이 흘러갈 때까지 

 

사랑을 합니다, 라고 적고

밤과 수수께끼라고 읽었다.

최후라고 읽었다.

토성에는

토성의 세계가 있다고

칼끝이 우연히 고독해진 것은 아니라고 

 

그런 밤에는 인기척이 툭,

떨어졌다.

누가 지금 막 내 곁에 태어났다는 듯이.

마침내 이 세계에 도착했다는 듯이.

오래 전에 자신을 떠나

검디검은 우주공간을 지나온 별빛의 모습으로 

 

뭐라 말할 수 없는 모양으로 누워 있는데

누군가 하늘 저편의 그 검은 공간을

내 이름으로 불렀다. 

 

 

(계간 『시산맥』 2012년 겨울호 발표)

"야 ...... 그러면 좀 어떠냐 ?" (김하나)

언젠가 친한 친구와 술을 마시며 늦도록 애기를 하던 중에, 내가 예전에 했던 애기를 다시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이 애기 내가 너한테 하지 않았던가?"

라고 물으니

친구가 "응, 했어"

한다.

"왜 말 안 해줬어? 지겹잖아, 들었던 애기, 이러다 나 나이들면서 했던 애기만 하고 또 하게 되면 어떡하지? 무섭네."

나는 이때 친구가 취해서 어눌한 말투로 했던 대답을 잊지 못한다.

"야...... 그러면 좀 어떠냐?"

그 말이 그렇게 따뜻하고 고마울 수 없었다.


말하기를 말하기(일반판)
말하기를 말하기(일반판)
겨우 술 한 잔 (김민철)

겨우 술 한 잔 

 

무작정 흘러가는 일상에

스톱버튼을 누르게 하는 힘.

흘러가던 바람을.

의식하지 못했던 햇살을

잡아다가 여기에 앉히는 힘.

딱딱해진 마음을 살살 풀어주고.

딱딱해진 관계도 어느새 풀어주는 힘.

때론 약간의 에너지.

때론 약간의 한숨.

때론 커다란 숨구멍.

때론 폭발하는 행복. 

 

그 모든 것의 시작이

겨우 술 한 잔.

무려 술 한 잔. 

 

('하루의 취향', 김민철 지음. ' 겨우 술 한 잔' 중에서)

하루의 취향
하루의 취향
방문객 (정현종 시인)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벤댕이를 먹으며 (이가림 시인)

벤댕이를 먹으며

            이가림(1943~2015) 

 

무게없는 사람을

달아보고 또 달아보느라

늘 입속에 말을 우물거리고만 있는

나 같은

반벙어리 보라는 듯

영종도 막배로 온 중년의 사내 하나

깻잎 초고추장에

비릿한 한 움큼의 사랑을 싸서

애인의 입에 듬뿍 쑤셔 넣어준다

하인천 역 앞

옛 청관으로 오르는 북성동 언덕길

수원집에서

벤댕이를 먹으며

나는 무심히 중얼거린다

그렇지 그래

사랑은

비릿한 한 움큼의 부끄러움을

남몰래

서로 입에 넣어주는 일이지...

오이지 (김미나 시인)

오이지

                                            신미나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

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

딸꾹질 45-기도 (김명)

딸꾹질 45-기도

                                                                                                                  김명 

 

수유3동 강북시장 아치형 간판 옆에 에이스부동산 옆에 송월한미타월 옆에 제일샷시부속 옆에 천하명당 로또슈퍼

오후 다섯 시 십팔 분 동그란 유리 테이블 앞에 머리를 뒤로 꼼꼼히 단정히 당겨 묶은 꽁지머리 저 여인

신중하다

검정 싸인펜은 골똘히 천천히 필살의 한 획을 그으며 위에서 아래로 그 옆 칸으로 사십오 개의 숫자 중 선택 받을 우주의 암호를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시험을 보듯이 삶의 마지막 생명줄 움켜잡듯이 그분께 보내고 있다





유월 저녁 ( 이상국 시인)

유월 저녁

                                 이상국 

 

아내의 생일을 잊어버린 죄로

나는 나에게 벌주를 내렸다 

 

동네 식당에 가서

등심 몇 점을 불판에 올려놓고

비장하게 

 

맥주 두 병에

소주 한 병을 반성적으로

그러나 풍류적으로 섞어 마시며

아내를 건너다보았다 

 

그이도 연기와 소음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더 이상 이승에서는

데리고 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설렁탕과 로맨스 (정끝별 시인)

설렁탕과 로맨스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추적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시집 <와락>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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