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소설 도입부가 사랑스럽고 좋아서 ‘우와아’ 하면서 읽었다.
애디와 루이스의 지나온 삶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회복되지 않는 상처도 겪고, 모두 언젠가 죽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나는 애디의 말로 대답하고 싶다. “지금 한순간뿐이에요. 그게 우리에게 허락된 전부에요.”
이 소설은 많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형식 자체가 소설의 주제와 닿아있는 것 같다. 흩어지고 사라지는 특성을 가진 구어들로 삶의 순간성을, 주고받는 말들로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애디와 루이스의 마지막 전화 장면은 비극적이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서로 몸은 보지 못하고 목소리만 들린다. 마치 애디와 루이스가 죽음 이후에 영혼으로 나누는 대화 같다. 애디가 죽은 딸의 정신,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말처럼. 작가가 남긴 희미한 위로 같았다.
휴대성 제로인 책이라(천 페이지 좀 넘는 위용), 불평도 슬쩍 나오고 다 읽는데 오래도 걸렸다. 그러나 읽고 나니, 파생상품(?)까지 따지면 훨씬 많을 이야기들을 이정도 분량으로 선별해 준 저자께 절로 감사의 인사. 가볍게 괴담이나 볼까 해서 집었는데, 도시전설=괴담이 아니라는 것부터 이야기들 뒤에 숨은 의미들, 퍼지는 방식이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전문서적의 존재에는 이유가 있어...그리고 드문드문이지만, 아무리 봐도 뻥 같은데 진짜인 일도 소개되니 세상 뭘 믿어야 할지 알쏭달쏭하다.
미드나 소설에 나와 익숙한 얘기도 있지만, 지퍼에 남의 옷 끼는 이야기는 어릴 때 들은 카더라랑 똑같으니 이게 국경을 넘은 건가 아니면 인간의 발상이 유사한 걸까. 황당한 문신 이야기는 비슷한 사례를 목격한 적이 있어서 근거가 충분하다 생각되지만, 자동번역도 되는 시대니 이제 도시전설이 아니라 전래동화가 되려나?
대기업 불신이 만든 괴담과 이민자에 대한 악의 가득한 이야기들에 착잡해지기도 하고, 인터넷 카더라가 이미 사이버전승이란 전문 용어로 해설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출간 당시엔 도시전설에 속하던 휴대전화 관련 이야기가 사실이 된 것에는 한숨도 난다. 거의 공유재산이 된 우리들의 전화번호여...어쨌든 근사한 도시전설 패러디 메일에 쿡쿡대며 마무리. 가짜 뉴스라는 단어가 피곤할 정도로 회자되는 세상, 근거 없는 이야기가 나돌 때는 무시하기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생각해보고 살아야겠다. 슨생님의 미국 민간전승 다룬 책도 보고 싶은데 원서도 절판이니, 정녕 답은 킨들밖에 없는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칼럼 「생명을 보는 이 관점」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허위 경고의 더 많은 사례로 넘어가기에 적절한 이행을 제공한다. "인간 심리학의 기묘한 원칙이 하나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넘 같은 매력적인 흥행사부터 괴벨스 같은 사악한 선동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거짓말쟁이들이 익히 알고 이용해온 원칙이다. 즉 제아무리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도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어법에서는 복사를 통한 '진실'의 이러한 선언이야말로 (…) '도시전설'이라는 매력적인 영역에 해당한다."
오늘 출근길에 엄마를 만났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 아니, 만났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
늘 타던 151번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길이었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책을 읽다가 피곤함이 몰려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반복적인 버스의 움직임이 요람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려야 할 정류소를 지나칠까 싶어 간간이 눈을 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한 번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장소가 달라져있었다. 회사에 다다를수록 습관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정신이 서서히 깨어남을 느끼며 다섯 정거장 정도를 앞두고 있던 와중에 하차문 앞에 서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와 많이 닮아있었다. 작은 키에 수수한 옷차림, 짧은 단발머리, 두툼한 가방, 머리숱이 많아 핀으로 야무지게 고정한 것까지 하나하나 엄마와 닮아 있... 아니, 엄마였다. 아무리 봐도 엄마가 맞았다. 엄마가 하차벨을 누르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비몽사몽했던 정신이 확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엄마가 맞았다. 작년 봄 이후로 처음 보는 엄마였다.
'이 시간에 엄마가 왜 여기 있을까' 잠깐 생각하다 하차할 정류장이 조계사인 걸 보고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녀는 손잡이를 잡고 버스가 멈추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느릿하게 감각됐다. "엄마"라는 목소리가 차마 나오지 않아 부드럽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손길에 깜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엄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마다 종종 의아했던 장면이 하나 있다.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면 그 사람이 아닌데도 상대를 착각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그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들었던 생각은 '에이,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몇 초 동안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아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화들짝 손을 놓으며 "어머, 죄송해요! 착각했어요!"라고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자 그녀는 인자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때마침 정류장에 다다른 버스의 뒷문이 열렸다. 그녀가 먼저 내렸다. 이 상황이 민망했던 나는 마치 그 정류장에서 내리려고 준비했던 사람처럼,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내렸다. 먼저 내린 그녀는 신호등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멀뚱히 서서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차차 정신이 들었다. 고작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와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를 다그치며 상처주던 엄마가 아니라,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던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징징대지 말라고 속으로 다그쳤다. 눈물을 꾹 참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먹도 힘껏 쥐어 보았다. 다시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러다 지각한다'
국가권력은 헌법과 법에 의해 통치되고 통제 되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한 사람의 양심과 그 사람의 ‘영웅됨’에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이 소위 말하는 ‘정의의 편’을 골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시스템이 붕괴 될 수도 있는 도박장 같은 정치를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국가라는 시스템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의의 편’을 고를 수 밖에 없는 양심을 배양해나가야겠다. 새로 이 땅에 태어나는 생명들과 이 땅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낡은 영혼들이 공유할 수 있는 법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법이 이를 빠르게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법은 국민의 법적 감수성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이 많은 기득권자들이 권려을 붙잡고 있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 늙은 기득권의 늙은 정신이 젊은 ‘기득권 워너비’들에게 그대로 전이 되는 문제도 있다. 사회가 안정 되지 않으면 유약한 개인은 권력과 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버린다. 2030 중 절반은 ‘극우’인 것 같다는 불안한 사회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문화로 굳어지기 전에 바로 잡아야한다는 법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는하다.
약자가 강자의 혹은 일반 시민의 주머니를 약탈하고 있지 않다, 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 누군가의 권리신장은 나의 권리 약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경우에서 나의 권리가 제한된다고 느낀다면, 실상 제한된 것은 나의 권리가 아니라 나의 특권 즉, 내가 나도 모르게 사회 시스템에 기대어 불합리하게 취해왔을 이익일 것이다. 교과서 속의 배려와 나눔이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도 모두의 머리와 양심에 남아있을 수 있는 세계가 되길 바라게 된다.
추리와 가벼운 SF 중단편집. 제목과 ‘구라치’라는 작가의 성 때문에 엉뚱 황당 발랄하리라는 선입견이 들지만 그렇다기보다는 준수하고 안정감 있게 술술 읽히는 딱 그 정도다. 두부도 얼리면 당연히 아주 무서운 둔기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문장을 음미하며 천천히 읽었다. 어떤 통찰에서는 무릎을 치고, 어떤 대목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름답다 느끼고, 전체적으로는 알쏭달쏭. 『불안의 서』는 소설가 배수아의 번역이고, 『불안의 책』은 김한민의 번역이다. 나는 배수아의 번역으로 읽었는데 배수아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독일어를 하므로 이 책도 독일어 중역본이다.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는 저자의 대관식 사진마냥 즐거운 책이리라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사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학창시절에 봤으면 더 많이 웃으면서 봤겠지만, 마냥 웃으며 보기엔 내가 나이를 너무 먹었나보다...독자와 파는 사람의 입장 차이 이전에,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나 위기에 버티는 태도에 두통이 온다. 일생을 한 분야에 헌신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고 그 방식도 각양각색이라는 건 알지만, 더 빚을 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여자 친구 카드까지 쓰면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뭐라고 코멘트할지 전혀 모르겠다.
대학 교육에 대한 지론도 충격이다. 공부 더 하고 싶으면 대학에 가고 아니면 안 가도 되는 세상이 제일이라 생각하지만, 대학 교육 자체가 젊은이들을 망친다는 발상은 살면서 해본 적이 없으니 내가 너무 체제에 길들여진 인간인가 또 머리 싸매게 됨. 헌책방이 있어 절판된 좋은 책들이 계속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은 참으로 근사하지만, 그 책들도 처음엔 신간이었으니 신간 판매 서점을 낮춰 보는 것도 미묘하고..당장 저자 본인도 많은 책을 썼는데 말이다. 유머의 경계선도 그렇고('아주'가 아니라 미묘하게 옛날이라 더 그런 것 같다) 사람 낑낑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많지만, 지방 경제 문제나 관광청의 삽질(분명 똑같은 문제가 한국에도 있겠지), 다른 나라 책마을들 이야기도 알 수 있었고 읽은 보람은 분명히 있다. 너무 오래 '헤이온와이 가고 싶다' 타령만 했더니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사라지고 있다만, 헤이온와이에서 캐리어 터지게 쇼핑하는 상상은 실컷 해도 되겠지...
안온북스 (250118~250120)
❝ 별점: ★★★★★
❝ 한줄평: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밀물처럼 밀려드는 감동과 먹먹함
❝ 키워드: 섬 | 풍경 | 바다 | 파도 | 그리움 | 우물 | 도전 | 반복 | 육지 | 길 | 가능성 |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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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그렇더라.
가까운 길은 높고 평평한 길은 멀지.
지칠 만해.
다 포기하고 싶지.
그럴 만해.
✴︎
바뀐 풍경을 너는 볼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괜찮아.
괜찮아.
어딘가에서는 보이겠지.
누군가는 볼지도 모르지.
세계가 되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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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연하게 감동적인 책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밀물처럼 밀려드는 감동과 먹먹함에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 섬에서 보이는 풍경을 동경해 바다를 건너가려는 한 소녀. 두 개의 우물을 매일 묵묵하게 오가며 바다를 옮기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섬은 육지의 일부가 되고, 소녀는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죠. 그러나 길은 끝이 없고, 우물을 오가며 물을 옮겼던 것처럼 소녀는 또 묵묵하게 길을 걸어갑니다.
✦ 어른이 되고도 긴 세월이 흘러서야 도달하게 된 섬. 그러나 상상하던 풍경이 아니어서 실망하게 됩니다. ‘다르지만, 괜찮아.’ 기대와 다르지만, 그럼에도 괜찮다고, 또 다른 풍경을 향해 나아갑니다.
✦ 바다는 다시 바다가 되었지만, 어른이 된 소녀는 다시 두 개의 우물을 오가며 물을 긷고, 바다를 옮기고, 다시 길을 걸어 자신의 섬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풍경. 분명히 조금은 달라져 있었어요. 궁금하지만, 이제 그리움으로 남겨두기로 하죠. 바뀐 풍경을 볼 수 없지만, 괜찮다고 말해요.
✦ 소녀의 여정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모두 호기심과 동경을 품고 어른이 되었지만, 우물물을 길어 바다를 옮기는 지난한 과정처럼 삶도 끝이 없어 보이고, 그저 묵묵하게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가며 살아가죠. 지치고 때론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기대했던 만큼이 아니라 실망하게 되는 일도 생기고요. 그렇지만, 괜찮다고, 다시 일어나 걸으면 된다고 나지막하게 속삭여주는 듯한 이 이야기가 좋았어요. 또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분명 풍경의 어떤 부분은 바뀌어 있을 것이라 말해주는 이 이야기가 좋았어요.
✦ 하양, 검정, 파랑, 그리고 아주 약간의 노랑과 초록색 색채로 그려지는 세계는 처음엔 단조로워 보일지 몰라도 마지막 페이지를 펼친 후 앞으로 다시 돌아가면 다르게 보일 거예요. 파랑과 노랑과 초록빛이 주는 감동이 더 커졌습니다.
✦ 삶은 죽음으로 향하고, 또 죽음은 다시 삶을 만들어내고, 바다는 다시 바다가 되는 것. 이 책은 삶이 지치고 외로워서 위로받고 싶을 때 꼭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책이에요. [📝 25/01/21]
(*안온북스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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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았다.
한 사람의 맘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생각.
확실한 신념속의 영웅이 아니라
바로 나, 또는 바로 옆의 사람들이 느끼는
올바름을 알지만,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그네같은 감정의 소요.
결국 행동하는 주인공....
매우 정교하고 잘 묘사된 주인공의 행동이
마지막에서는 교훈을 주는 듯 이야기해서 조금 아쉬웠다.
시작은 했으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야 할 텐데.
옳은 행동을 한 직후의 고양감이였을까.
그 부분이 아쉬워 전체가 무너진 느낌이였다.
『재수사』를 쓰면서 트롤리 딜레마를 다룬 교양도서 두 권을 읽었는데, 한 권이 토머스 캐스카트의 『누구를 구할 것인가?』이고, 다른 한 권이 이 책이다. 이 책을 보다 더 추천한다. ‘트롤리의 딜레마’가 꽤 최근에 제기된 문제이며, 이 주제에 도덕철학 외에도 심리학, 경제학, 인지과학, 신경생리학에서 모두 관심을 가져 이제는 작은 학문 분야가 됐다고.